5·18 광주 민주화 운동

최근 편집: 2019년 5월 25일 (토) 04:45
Zu Kim (토론 | 기여)님의 2019년 5월 25일 (토) 04:45 판 (5월 16일 등 시위에도 일반 시민들의 참여가 많았다는 차명숙님의 증언에 따라 수정함.)

박정희의 독재 정치에 저항하던 한국의 민중은 1979년 박정희 암살 후 희망을 보고 전국적으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었다. 이 중 광주에서 1980년 5월 18일부터 학생 집회를 필두로 사람들이 대대적으로 시위에 참여하자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는 공수여단을 투입해 시민들을 대상으로 발포했다. 분노한 시민들은 경찰서에서 얻은 총으로 무장하고 군인들을 쫓아냈다. 이후 광주는 며칠간 군부의 개입 없이 시민들이 자립적으로 운영하는 "해방 공간"으로서 기능했다. 그러나 5월 27일 군부는 대규모로 군대를 투입해 시민군을 살상하고 시위대를 소탕했다. 200여명이 죽고 수천명이 부상당했다. 무자비한 고문과 언론 조작, 사실 은폐가 뒤따랐다.

이 열흘간의 운동을 5·18 광주 민주화운동 또는 5·18 광주 민중 항쟁이라고 부른다.

1980년 5월 광주의 시민들이 신군부의 민주주의 파괴에 저항한 민주화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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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26일 박정희의 암살 이후 "서울의 봄"으로 불리는 민주화 운동이 벌어 졌다. 하지만 같은 해 12월 12일 전두환을 필두로한 신군부는 군사 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장악하고 이듬해 (1980년) 5월 17일 2차 쿠데타를 일으켜 사실상 정권을 장악하였다. 5월 17일 신군부는 전국에 비상 계엄령을 내리고 정치인, 재야인사 등을 감금하였다.

하지만 광주지역의 대학생과 시민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시위를 일으켰고 신군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공수부대 등 계엄군을 투입시키며 폭력으로 진압하였다. 하지만 폭력진압에 분노한 시민들과 청소년들이 동참하며 시위는 더욱 커졌다. 5월 20일에는 만 명의 시민이 시위에 동참하였고 시민군이 조직되었다. 5월 21일 계엄군은 시민들에게 무차별 발포를 한 후 외곽으로 철수하여 광주 봉쇄작전을 펼쳤다.

이후 5일간은 역사에서 보기 힘든 장면이 펼쳐졌다. '광주해방구'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이 기간 동안 시민들은 빼앗은 무기를 스스로 반납하는 등 자치질서를 만들었고 주먹밥 등 음식을 나누고 줄을 서서 헌혈을 하는 모습이 벌어 졌다. 치안 공백에도 불구하고 이 기간동안 상점, 은행, 백화점 등에는 한 건의 약탈도 없었다.

이 기간동안 광주시민들은 김대중 등 정치수 석방을 외치며 평화시위를 벌였고 또 미국이 도움의 손길을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한국군의 작전권을 가지고 있던 미국은 경기도 양평에 있는 20사단을 광주에 진압군으로 보내는 것을 허용했다.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은 "화려한 휴가"라는 작전 명으로 광주 시내의 당시 전라도 도청을 공격하여 남아서 항전하던 시민군들을 살상하며 광주항쟁은 막을 내렸다.

영향과 평가

당시 계엄군은 광주 시민들의 시위를 폭력으로 진압하였으며, 학살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한국 국군의 존재목적은 국토를 방위하고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는 것이다. 그런데 5월 광주에서는 군이 자신이 보호해야 할 시민에게 총을 겨누었다. 사건 당시 군부는 광주를 폐쇄하였고 이후 5.18을 간첩이 일으킨 폭동이라 날조하여 사회적으로 선전하였으나, 광주에서 벌어진 일들을 완전히 숨기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광주시민들은 미국이 한국의 민주화를 지켜줄 것으로 믿고 있었으나 주한미군 사령관 위컴이 양평 20사단의 투입을 승인한 것이 나중에 알려졌고, 또 레이건 대통령이 전두환 정권을 승인하면서 광주항쟁은 미국의 선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 더 나아가서는 반미감정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5.18은 이후 한국 민주화 운동의 큰 불씨가 되었고 1987년의 6월항쟁을 거치는 한국의 민주화의 시작점이 되었다. 1997년(김영삼 정부)에는 '5.18 민주화운동'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5.18 민주화 운동은 한국 뿐 아니라 1989년 천안문, 1999년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의 다른 민주화 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 규명은 40여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현재 진행형이다. 2018년에는 미투 운동의 일환으로 미성년자를 포함한 많은 광주의 여성들이 계엄군에게 성폭행을 당한 사실이 밝혀지기도 하였고 2019년에는 전두환이 광주민주화운동 기간 중에 광주에 갔다는 증언이 나오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