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라 콜론타이/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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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

알렉산드라의 본래 성(부계 성)은 도몬토비치(영어: Domontovich, 러시아어: Домонто́вич)이며 아명은 '슈라'이다. 그는 1872년 3월 31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귀족 가문에서 알렉산드라 미살리나 마라빈스키 도몬토비치와 미하일 도모노비치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미하일 도몬토비치는 러시아 제국의 군인으로 딸이 태어났을 당시 육군 대령이었고 러시아-튀르크 전쟁(1877년)에 참전해 공을 세워 후일 장군으로 진급하였다. 그의 가계는 부계로 13세기의 우크라이나의 귀족 가문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어머니 알렉산드라 마살리나 마라빈스카(영어: Androvna Masalina-Mravinskaia)는 핀란드의 부유한 목재상 집안의 딸이다. 그는 첫 남편 므라빈스키와 결혼했을 당시 도몬토비치의 딸을 낳았고 므라빈스키와 이혼한 뒤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혼을 감행하였는데 이 점은 딸 슈라에게 오래도록 영향을 주었다.

슈라는 어린 시절부터 소설과 시를 잘 지었으며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음에도 제정에 반대하고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여성가족에 대해 연구했다. 6년간 개인 가정교사로 그를 가르친 가정교사 마리아 이바노브나 스트라호바는 소설가를 꿈꾸던 슈라에게 차르와 귀족들이 부를 독점하고 민생을 돌보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했는데 스트라호바의 영향으로 슈라는 제정 러시아의 부조리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지니게 되었다.

아버지 미하일 도몬토비치는 한때 불가리아에서 살던 시절 자유주의파에 가담했던 일로 인해 정치적 탄압을 받았는데, 슈라는 아버지가 이와 같은 일을 당하는 데 분노하였다. 보수주의자로 알려진 어느 손님이 아버지를 찾아왔을 때 손님에게 담배갑을 건네주길 거부해서 부모님을 당황하게 하기도 했다. 일찍부터 슈라는 일반 사회규범을 잘 따르지 않는 아이였고, 자신도 어린 나이부터 그러한 자신의 성향을 잘 알고 있었다. 후일 회고에서 그는 “어렸을 때부터 나는 ‘남들처럼 살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엄마 속을 많이 썩였다”고 하였다.

슈라가 어렸을 때 귀족 출신이면서 나로드니키당(국민주권당)의 당원인 소피아 페롭스카야가 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을 모의했다가 체포되어 처형당하는 일이 있었다. 이 일은 알렉산드라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후일 그가 혁명 활동에 가담하는 하나의 원인이 된다.

한국식 나이 계산으로 17살이 되던 1888년, 이름을 슈라에서 알렉산드라로 고쳤고 교사 임용 시험에 합격하였다. 이 무렵 그는 모스크바 출신인 한 남성과 사귀었으나 그 남자가 자살하여 첫사랑은 불행하게 종결되었다. 그 뒤 제정 러시아 정부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설치한 여자학교에 입학하려 하였으나 그 학교의 급진적인 분위기에 어머니가 반대하여 입학하지 못했다.

청년기

결혼과 유학

스위스 취리히

한국식 나이 계산으로 22살이 되던 1893년, 먼 친척이자 폴란드계 혼혈인인 블라디미르 루트비코비치 콜론타이와 사귀다가 결혼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딸이 가난한 청년과 결혼하려는 것에 반대했다. 아버지도 독서나 진지한 대화에 관심이 없는 블라디미르가 학식이 있는 자신의 딸을 받아줄 정신적 친밀감을 쌓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와의 결혼에 반대했으나 결국 알렉산드라는 결혼을 감행하였다.

양친의 걱정대로 남편 블라디미르 루트비코비치 콜론타이는 무능력하고 아둔했으며 알렉산드라가 즐기는 독서나 철학 토론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알렉산드라는 결혼생활에 크게 실망한다.

1894년, 아들 미하일 콜론타이를 낳았고 같은 해 단편소설 하나를 써서 잡지사에 기고했다. 사랑 없는 결혼생활을 하던 여인이 연하의 남자와 사랑에 빠져 남편을 버리고 애인과 결합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소설을 잡지사에 보냈을 때 잡지사에서는 문학이 아닌 선전문을 써 보냈다는 평과 함께 작품을 반려해 보냈다. 남편인 블라디미르는 편집자가 아마도 중년 여인보다는 젊고 예쁜 여주인공을 좋아하는 모양이라며 조롱했다. 잡지사의 거절과 남편의 조롱에 화가 난 그는 다시는 소설을 쓰지 않겠다며 분개하기도 했다.

이후 알렉산드라는 집을 나와 친구인 조야 사두르스카야의 집에 머물면서 그와 함께 사회주의에 관련한 서적을 탐독한다. 이때 그는 진화론, 유물론, 변증법 등에 대해 두루 독서하였다. 또한 마르크스엥겔스의 책들을 본격적으로 읽으면서 탐구하였다.

알렉산드라는 1896년에 남편과 이혼한 후 지적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 스위스로 유학을 떠났고, 취리히 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해 국민경제학을 전공했다. 취리히 대학에서 알렉산드라는 러시아에서는 금서였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저작을 자유롭게 탐구하며 사회주의 지식인들과 폭넓게 교류한다. 원전을 읽기 위해 독일어라틴어, 영어를 공부했고, 또 그리스 철학 등을 연구하기 위해 헬라어 등도 틈틈이 공부해 유창해지기에 이르렀다.

여성해방론 연구

그는 여성이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현실에 분노하여 여성의 해방·독립의 길을 모색하게 된다. 그 자신의 회고처럼 알렉산드라는 여성의 사회적 불평등 문제의 해결을 사회주의체제에서 찾고자 하였다.[1] 그러나 이런 시도는 독창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베벨마르크스, 엥겔스사회주의 사상의 선배들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1] 이들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의 여성의 착취를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착취와 동일선상에서 이해하였다. 즉 프롤레타리아가 자본 획득을 위해 자신의 노동을 제공하듯이, 여성은 매춘부나 첩 혹은 아내로서 자신의 성을 남성들에게 제공한다고 보았다.[1]

그는 부르주아 여성들은 남성들의 성적 욕구 충족뿐만 아니라, 법적 재산상속자 생산과 가사 노동이라는 세 가지 의무를 지고 있다고 보았다. 즉 부르주아 도덕이란 경제적 이익이 존재하는 곳에서만 부부사랑이 존재하는 이중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1]

나르바 견학

20대 무렵

다음을 참고할 것 제1차 러시아 혁명 1896년 나르바로 떠난 여행에서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1만 2천 명이 일하는 거대한 직물공장을 견학하게 되고 그 곳에서 너무나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와 그들의 아이들을 목격한다.[2]

1896년 러시아 크론호름 직물공장의 노동자 숙소를 둘러보던 중 큰 충격을 받게 된다. 그의 회고에 의하면 '지저분한 공기가 견딜 수 없이 역겨웠다. 빽빽이 들어찬 침대 사이에서 아이들이 울거나 놀고 있었고, 한쪽에 보모인 듯한 늙은 여자가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의 눈길은 아들 또래인 한 작은 아이에게서 멎었다. '아이는 너무 조용히 누워 있었다. 아이가 죽었다고 말하니까 늙은 여자는 흔한 일이라고 대답했다. 잠시 뒤 누군가가 들어와 시체를 들어냈다.'고 한다.

아이들은 어머니가 일하러 나가면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비위생적인 집단침실에서 방치되면서 죽어 나갔다. 아이들의 죽음에 무심한 극빈층의 모습 역시 경악스러웠다.[2] 후일 알렉산드라는 '그날의 광경과 악취가 혁명가로서의 삶을 결정지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공장의 통풍을 개선하기 위해 기술적인 일을 하는 것보다도 열악한 환경을 만들어내는 경제 체제 전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체제 변화의 가능성을 공산주의에서 찾게 된다.[2]

러시아 빈민층 여성 노동자의 생활을 목격한 그는 '다른 사람이 짐승처럼 살고 있는 이상 지금까지 살아온 생활을 계속할 수 없다.'며 자신의 본가에서 제공되던 혜택을 모두 포기하고 공산주의 정치 활동에 투신한다.

여성과 그들의 운명은 내가 살고 있는 동안 나를 사로잡았고, 그들의 운명에 대한 걱정은 나를 공산주의로 이끌었다.

이후 그는 제정 러시아의 부패와 탐욕을 비판하는 글과 칼럼을 발표하였고, 여성 해방 운동에 가담한다. 다시 취리히로 돌아가 수학하던 중, 1898년 초에 귀국하였다.

노동 운동 투신

1900년 무렵

1898년 공개적으로 자신의 사회적 특권을 포기하고 러시아 사회민주당에 입당한 알렉산드라는 여성의 인권 향상과 여성 해방 운동을 주관하고 여성노동자들에게 혁명을 전파하였다. 그는 1915년 러시아 공산당으로 당적을 옮기게 된다.


청년기 - 혁명기

피의 일요일 전후

1905년 제1차 러시아 혁명의 단초가 되는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났다.[3] 콜론타이는 피의 일요일에 겨울궁으로 평화적 행진을 하던 노동자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황제의 군대와 경찰은 평화 시위를 하는 노동자들을 향해 무차별 발포를 하였고, 6백여 명이 사망자와 수천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현장에서 모든 상황을 생생히 목격한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이날의 비극을 통해 직업적 혁명가로 거듭났다.[3] 그의 제정 반대 운동은 더욱 격렬화되었고, 차르를 살인자, 무능한 군주라며 강한 비난을 퍼붓고 정권 타도 운동을 벌이게 된다.

이후 그는 단순한 이론가나 작가로서가 아니라 행동가로서 적극적으로 공산주의 활동에 참여하였으며, 노동자들의 모임에 지도자로 나서게 되었다. 그의 웅변적인 연설과 어린 시절 양질의 교육의 결과인 세련된 몸가짐은 투박한 노동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3] 그리고 직접 낮은 자리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숙식하고, 그들을 직접 대화로 설득시켰으며, 사람에게 유식과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 역시 많은 노동자들의 마음을 얻게 된다.

1905년 혁명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여성 노동자가 혁명에 대규모로 참여했다는 점을 지켜보았다. 알렉산드라는 여성의 노동 참여와 이 여성 노동자들의 더 많은 참여로 개혁을 이룩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여성 노동운동과 여성노동단체 조직

1905년의 혁명에 여성 노동자가 대규모로 참여했다는 점을 지켜본 알렉산드라는 여성 노동자 계층을 만들기 위해 여자들도 생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함을 적극 홍보했다. 또한 기존의 여성 노동자들에게도 여성 노동자들이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단체를 조직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이 여성 노동자들을 다시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시키려 하였다.

여성노동자 운동은 노동자 운동 전체에서 따로 뗄 수 없는 일부이다. 여성 노동자는 모든 반란에서 남성 노동자와 함께 일어났다. 그럼에도 남성 노동자들 만큼의 권리를 찾지 못하고 외면당하는 것이 보통이다. ...(중략)... 소심하며 짓밟힌 채 무권리 상태에 처해 있던 여성은 파업과 격동의 시기에 빠르게 성장해 홀로 우뚝 설 수 있었다.

1900년대 무렵

1907년 콜론타이는 직물노조와 수공업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 '여성 노동 상호부조협회'를 조직하였다. 여성 단독 노조를 결성하자 남자 노동자들이 이를 분파주의라고 반대했다. 이어 러시아사회주의자들까지 콜론타이의 여성노조 결성을 분파주의, 편향주의이며, 노조 활동 내부의 분란을 일으키는 것이며, 큰 대의에 대한 위협이라고 규정하였다. 남성 사회주의 운동가들조차 '수동적이고 교육수준도 낮은 '바바들'(러시아 여성을 낮추어 부르는 말)은 혁명세력이 될 수 없다'며 조롱하였다. 이에 콜론타이는 '여성들의 관심과 욕구를 외면하면 여성들은 계급투쟁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항변했다.

여학생과 인텔리겐차 여자들은 부르주아 남녀 평등론자들에게 빼앗기고, 프롤레타리아 여성은 분파주의가 무서워 우리 편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혁명은 남자 노동운동가들끼리만 할 것인가.

그는 노동하는 여자들의 권리를 대변하는 단체를 만들어야 된다고 주장했고, 여성들이 공장 등으로도 적극 진출하여 여성 노동계층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여자들은 집에서 가사를 돌봐야 된다고 보던 기독교멘셰비키, 일부 볼셰비키조차 그의 의견에 부정적, 회의적이었다. 여자들이 수공업과 노동에 종사하려 하겠느냐는 것이 이유였다. 이에 그는 홀로 여성 노동자 계층을 구성하는 운동을 계속했다. 후일 회고록에서 알렉산드라는 '이 문제는 관심을 끌지 못했던 것이다.', '외롭고 고단한 싸움의 연속이었다.'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제1차 러시아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고 이후 3년간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러시아 내에서 기존의 부르주아 여성 해방론자들과 이론적 공방을 벌이고, 사회주의 운동을 해 나가면서 러시아 경찰 당국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3]

다른 여성운동가들과의 갈등

1908년 부르주아 여성 지식인들과 일부 귀족 여성들이 여성대회를 열어 '러시아 여성당'을 창당하려 하자 콜론타이는 이를 강하게 비판하여 무산시켰다. 콜론타이는 남성들의 편견 못지않게 진정한 여성해방을 가로막는 행위는 바로 부르주아 여성들의 부르주아식 남녀평등운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저 똑같은 교육과 직업의 기회를 요구하는 것과 상위 계층과 고위직을 요구하는 것 따위의 '위선적인 주장'은 여권 신장과 여성들의 권익 향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 이들 부르주아 여권운동가들은 오직 그들의 부르주아 남편이나 형제들과 동등해지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었고, 단지 고위 직에 여성의 자리만 늘려주기를 원하였다며 비판했다. 그리고 그들보다 못한 남성들을 다시 짓밟고 착취하려는 것이 본질이라며 강하게 비판하였다. 콜론타이는 부르주아 여성 운동가와 여성 귀족들을 향해 '노동하는 여성들이 살면서 날마다 마주치는 기아와 자녀들의 질병 문제, 위생 문제 등은 외면한다'며, '부르주아 여성들이 공동체의 복지보다 사회적으로 특별한 범주에 드는 여성만의 자아실현을 추구해 왔다'며 비판하였다.

콜론타이는 상류사회 여성들의 일반적인 취미인 자선활동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다.

임금노동을 통한 자본주의의 착취 때문에 생겨난 고통과 가난과 궁핍의 바다를 티스푼으로 비우려 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바로 그자들이다.

그는 동료 남성 공산주의자, 남성 노동운동가들에게도 분파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부르주아 여성들과도 싸웠다. 그는 여성들이 경제적으로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성의 경제적 독립만이 진정한 여성 해방을 이룰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프롤레타리아 여성에게 모든 것은 빵 한 조각의 문제라고 지적했고, 혁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혁명으로 여성 노동자 계층, 빈민 여성 계층의 경제적 독립을 얻어내지 않고는 여성해방을 이룩할 수 없다고 역설했다.

여성의 세계는 남성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두 진영으로 나뉘어 있다. 여성노동자에게 평등권은 오직 (남성노동자와) 불평등을 똑같이 나누는 것일 뿐이다. 상층계급 여성이 일단 정치권력에 접근하면, 이 ‘여성 권리’의 옹호자들은 자기계급 특권의 열광적 옹호자가 된다. 어린 자매들을 무권리 상태에 내버려두는 데 만족하면서 말이다.

망명 생활

반전 평화 운동과 망명

1910년 무렵

그는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운동, 반전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08년 콜론타이는 핀란드의 독립을 지지하였다. 그해 콜론타이는 핀란드 독립을 적극 주장하다 반국가 사범의 죄명으로 수배, 독일로 망명하였다. 이후 6년간 독일과 스웨덴 등에서 체류하며 칼럼과 기고를 하였고, 러시아의 여성운동가들을 후원, 독려하였다. 또한 그곳에서 콜론타이는 반전운동을 지지하였고, 좌파 국제주의자들에게 국경을 초월하여 단결하고 뭉칠 것을 호소하였다.

망명 생활 중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각국의 국제 사회주의자들이 모두 국가주의자로 돌아서는 실망스러운 상황에서 레닌은 신념을 지켰다. 그는 레닌과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 속에서 모두가 국수적 애국주의자가 되어가는 마당에 레닌은 혼자 반전 운동을 펼쳐 나가고 있었다.[4] 콜론타이는 레닌의 주장에 깊이 공감했고 그와 함께 행동하고자 하였다.[4]

또한 독일스웨덴 등에서 출판, 강연활동을 계속 하는 한편 러시아 제국의 억압에 대항하다가 넘어온 핀란드인 사회주의자들과도 꾸준히 교류하였다. 또한 그의 명성을 듣고 방문한 영국, 프랑스, 그리고 독일의 명사들과 잘 알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이때 만난 지식인으로는 로자 룩셈부르크카를 리프크네히트 등이 있다.

신여성론 발표

그는 망명지인 스웨덴에서 신여성론을 주장했다. 여기에서 그는 남성이나 제도에 얽매이지 않는 여성의 등장을 예상했고, 그들은 어쩌면 이미 있는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그가 제시한 신여성의 하나는 전문 직업에 종사하는 독신 여성이었다. 1913년 콜론타이는 자신의 신여성론을 발표했다.[5]

그 여자들은 세계를 마치 틀리는 눈으로 해석하고 생활에 대하여 틀리는 반응을 나타내고 상이한 태도로서 이에 접근하고 있다. 과거 여성들의 대군(群) 속에서 움트는 새로운 여성의 탄생을 찾아내는 것은 별로 특수한 역사적 혹은 문학적 지식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이하 중략)...
그러면 이 새로운 부인이란 어떠한 여성인가? 그것은 그의 로맨스의 결말이 행복한 결혼으로 끝나는 순진가련한 소녀는 아니다. 그의 남편의 부정에 고민하거나 혹은 그 여자 자신의 죄로써 이혼에 조우하는 남편을 가진 여인도 아니다. 부질없이 청춘기의 불행한 연애를 한탄하고 있는 노처녀도 아니다. 또 '애증의 여승(女僧)'도 아니다.
아니, 그것은 전혀 새로운, 이때까지 알려지지 않은 제5타입의 히로인이다. 국가, 가정, 사회에 있어서의 온갖 노예화에 항의하고 여성의 대표자로서 (혹은 개인으로서) 부인의 권리를 위하여 싸우는 히로인! 이러한 타입을 점차 현저하게 내걸고 있는, 거의 전부는 실로 독신 부인이다.

극히 최근까지의 여자의 원형은 '아가씨'였다. 남편의 그림자며 부속품인 여자였다. '독신 부인'은 이러한 종속적인 역할을 연출하며 남편의 반사경으로 그칠 인생을 그만두어 버렸다. 그는 독자적인 내적 생활을 갖고 있다.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자기 이해를 좇아 생활한다. 그는 내적 생활에 있어서나 외적 생활에 있어서나 독자적이다.[5]

그는 결혼 제도나 연애의 굴레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여성상을 제시하였다. 그것이 바로 자기 생활을 자유로이 영위하는 독신 여성이라는 것이다. 그는 2, 3세대 쯤 지나가면 이러한 전문직 독신 여성이 소비에트 연방은 물론이고 세계적으로 나타나리라고 예견하였다.

콜론타이는 이 '독신 여성'을 '노처녀'와 구별하였다. 그는 독신여성은 자기 삶을 스스로 사는 전문직 여성으로, 노처녀는 직업의 유무에 상관 없이 결혼이나 연애하고 싶은 마음, 혹은 결혼이나 연애에 미련을 둔 여성으로 구분하였다. 그러나 감정이나 성욕은 어떻게 해소하느냐는 반론이 제기되었고 콜론타이는 이 점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된다.

망명 생활과 강연 활동

1914년부터는 수시로 블라디미르 레닌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혁명 활동과 지하 활동의 정보를 접하였고, 지하화된 여성 노동 운동 단체들과도 연락을 주고 받았다. 이때 경제이론가인 마슬로프(P. Maslov)와 동거하였다. 그는 자신의 지적 욕망과 활동가로서의 결의를 존중받고 관심을 받고 싶어했지만 마슬로브는 혼외의 성적인 모험을 원할 뿐이었다. 실망한 콜론타이는 마슬로프와 결별하고 당의 선전사업가의 일에 전념한다.

1915년 알렉산드라는 러시아 공산당으로 당적을 옮기며 정식으로 볼셰비키가 되었고 팜플렛 누가 전쟁을 원하는가를 펴냈다.[4] 이 팜플렛에서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맹목적인 민족주의를 강력하게 질타하였고 이것은 곧 전 유럽미국에 퍼져 반전주의자들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얻어냈다.[4] 그는 전쟁 이전에 평화를, 국가와 민족 이전에 인간이 소중함을 역설하였고 이는 양심적인 지식인들의 공감대를 얻어냈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미국의 공산주의 동맹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미국에 4개월간 그가 구사할 수 있는 네 가지 외국어(영어, 러시아어, 불어, 독일어)로 123회에 달하는 강연과 연설을 했다. 그의 외국어 능력은 레닌볼셰비키의 주장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4]

1916년에는 미국을 방문, 미국 각지를 순회여행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미국이 참전하지 말 것을 호소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레닌의 측근

그 뒤 콜론타이는 즉각적인 휴전을 요구했고, 제국주의 전쟁으로 촉발된 민족주의적 적대관계 때문에 산산히 부서진 제2차 인터내셔널을 다시 세우려는 유럽 각국의 공산,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침머발트 운동(Zimmerwald Movement)을 전개하다가 레닌에 대한 지지로 돌아섰다. 그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전운이 감돌자 유럽 여러 나라 좌파 지도자들과 정당들이 전쟁을 계기로 계급 같은 이해보다는 국가나 민족의 이익을 선택하는 노선을 택하게 된다. 이에 콜론타이는 '제국주의 국가 사이의 전쟁은 노동계급이 정치권력을 얻기 위한 ‘내전’으로 바뀌어야 한다. 제2 인터내셔널은 무너졌으니 제3 인터내셔널을 세우자.'며 국제 공산주의자들은 전쟁에 대한 반대를 해야 된다며 반전 원칙을 또렷이 밝힌 레닌을 지지하게 된다.

또한 그는 레닌이 주도한 제3 인터내셔널에 세계의 국제주의자들을 결속시키고 러시아 볼셰비키를 위한 지원금을 모집하는 데도 큰 힘을 보탰다.[4]

콜론타이는 레닌이나 스탈린의 무비판적 추종자는 아니었다. 그는 소련 공산당의 전신인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레닌의 볼셰비키와 마르토프의 멘셰비키로 갈렸을 때, 레닌의 독선적 태도를 비판하고 멘셰비키에 가담했다. 러시아 혁명 직전에 볼셰비키에 가담해 혁명에 참여한 뒤에도, 콜론타이는 공산당 내의 ‘노동자의 반대’ 파에 소속해 당내 민주화와 노동조합의 정치적 자유를 옹호했다.[6]

러시아 혁명 이후

귀국 직후

연인 파울 디벤코와 함께

1917년 2월 23일 러시아에서 2월 혁명이 발생하여 제정 러시아가 무너졌다. 제정 러시아가 붕괴되자 콜론타이는 바로 귀국했고, 제정 대신 케렌스키러시아 임시정부가 들어섰다. 그러나 온건 사회주의와 부르주아들과도 타협하려는 케렌스키 임시정부를 부정적으로 본 콜론타이는 블라디미르 레닌에게 강력한 공산주의 정부의 필요성을 건의하였다. 콜론타이는 이렇게 미적지근한 정책은 오히려 차르와 제정을 부활시키는 세력에게 호기를 줄 수 있다고 건의한다.

노동자를 대표하는 소비에트가 권력을 잡도록 준비합시다. 케렌스키 임시정부의 온건 사회주의에 협력하지 말고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앞장서시오. 권력만이 빵과 자유를 줄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십분 발휘해 볼셰비키의 세력 확장에 앞장섰다. 그는 누구 보다도 혁명적인 연설가였고 선동가였으며 이론가였다.[7]

1917년 3월 19일 콜론타이는 페테르부르크로 갔고, 바로 볼셰비키의 지지로 소비에트 혁명 집행위원이 되었다. 그해 4월레닌이 귀국했다. 그해 다시 스웨덴스톡홀롬으로 건너갔다. 이때부터 그는 17년 연하의 남자친구 파울 디벤코와 정식으로 혼인신고를 올리지 않은 채 동거하였다.

7월 사태 전후

1917년의 7월 사태 동안 콜론타이는 스톡홀름에 있었다. 그런데 스웨덴 언론이 독일 간첩 추문이 터진 뒤로 콜론타이가 독일의 보조금을 더 얻으려고 외국에 나왔다고 암시하는 바람에 콜론타이는 생활이 어려워졌다.[8] 콜론타이는 서둘러 페트로그라드로 돌아갔다.[9] 뒤에 콜론타이는 7월 13일스웨덴핀란드 국경선에서 벌어진 자기의 영접식을 묘사했다. 토르네오(Torneo)에서 러시아 장교 몇 명이 열차에 올라타 콜론타이를 강제로 연행했다.

멘셰비키가 레닌 일파를 제거하려고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고 그는 스웨덴 언론에 의해 독일 첩자로 몰리면서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콜론타이가 체포됐다는 소식이 역에 퍼졌고, 곧이어 플랫폼에 "독일 첩자년이네! 러시아를 배신한 년이야!"라고 쑤군거리는 군중들이 몰려들었다.[9] 냅킨을 팔에 두른 식당차 지배인은 "첩자년 콜론타이를 데리고 오는구먼! 네 년 자리는 러시아를 배반한 놈들이 매달린 교수대야!"라고 외치면서 콜론타이를 쫓아다녔다.[9] 열차라 토르네오를 떠난 뒤 콜론타이의 호송인들은 식당차로 갔다. 그러나 혁명 러시아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그 지배인이 아직 근무 중이었다. 그는 길을 가로막고서 "첩자년 콜론타이가 ...(이하 중략)... 내 객차에서 식사하는 꼴은 허락 못해."라고 내뱉듯 말했다. 그는 "간첩은 콩밥이나 먹어야지."라고 덧붙이고는 시중들기를 완강히 거부했다.[9]

그러나 곧 레닌을 체포하지 않는다는 방침이 정해지면서 멘셰비키에 의해 체포되었던 볼셰비키들은 모두 풀려났다.

여성 해방론 발표

1917년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모스크바에서 전 러시아 여성 대회를 개최하였고, 이 대회에서 그는 가족과 공산주의를 발표했다.[10] 이 팜플렛에서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여성들이 혁명을 통해 남성에 대한 의존성을 탈피하고 이혼에 대한 권리를 획득해야 하며 부르주아식 낡은 가족의 유형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촉구하였다.[10] 그리고 독신자들에 대한 색안경과 편견도 벗어버려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왜 여성들은 혼자 자립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남성들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려 드는가, 남성의 경제적 부양을 받으려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계속하였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가사 노동과 자녀 양육 등 이전에는 온전히 여성의 몫으로만 돌려졌던 것들을 사회화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국가가 모성을 보호하고 공동체 양육을 통해 아동을 범죄의 노출로부터 보호하는 것만이 완전한 여성 해방의 길을 여는 첫걸음이라고 주장하였다.[10]

그의 이러한 주장은 기존의 부르주아적 가족제도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가족의 자리는 공동체가 대신하며 여성들은 자기 자식만이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의 아동 모두의 어머니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10] 그는 일부 부르주아층 여성들이 자신의 자녀는 각별하게 대하면서 타인의 자녀를 천대하고 무시하는 것 역시 잘못이라고 지적하였다. 진정한 어머니라면 남의 자식이라 하여 함부로 대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하였다.

이것은 여성이 가정이라는 굴레에 얽매여 하나의 독립된 경제 주체가 못하는 것을 막고 공동체 속에서 여성이 사회적인 노동자이자 경제적인 독립체로 거듭나는 길을 모색한 것이다.[10] 콜론타이는 여성이 독립을 하려면 여성이 경제권을 독자적으로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18년에는 소비에트 공산당의 여성 기관지인 여성노동자지의 편집위원의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출처

  1. 1.0 1.1 1.2 1.3 한국서양사학회 (2003). 《서양의 가족과 성》. 도서출판 당대. 258쪽. 
  2. 2.0 2.1 2.2 김정미 (2011). 아름다운사람들. 105쪽.  |제목=이(가) 없거나 비었음 (도움말)
  3. 3.0 3.1 3.2 3.3 김정미, 《세계사 여자를 만나다》 (아름다운사람들, 2011) 106페이지
  4. 4.0 4.1 4.2 4.3 4.4 4.5 김정미, 《세계사 여자를 만나다》 (아름다운사람들, 2011) 107페이지
  5. 5.0 5.1 한국여성문학학회, 《한국 여성문학 연구의 현황과 전망》(소명출판, 2008) 349페이지
  6. [오늘속으로<1051>(3월9일)] 콜론타이 한국일보
  7. 김정미, 《세계사 여자를 만나다》 (아름다운사람들, 2011) 108페이지
  8. 알렉산더 라비노비치, 《혁명의 시간》 (류한수 역, 교양인, 2008) 95페이지
  9. 9.0 9.1 9.2 9.3 알렉산더 라비노비치, 《혁명의 시간》 (류한수 역, 교양인, 2008) 96페이지
  10. 10.0 10.1 10.2 10.3 10.4 김정미, 《세계사 여자를 만나다》 (아름다운사람들, 2011) 111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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