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지촌

최근 편집: 2023년 4월 13일 (목) 19:45
왹비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4월 13일 (목) 19:45 판 (→‎동두천)

대개 대한민국에서 6·25전쟁 이후 주둔해 온 미군기지를 중심으로 형성된 생활권을 칭한다. 미군의 외출과 외박이 허용된 1957년부터 급격히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기지촌은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 온 피난민·영세민·성매매 여성·군노무자·군납업자·상인 등이 모여들어 새롭게 형성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국 정부는 1950년대부터 이미 체계적으로 기지촌 여성을 관리, 통제하였다.

기지촌 관련 정책

기지촌 관련 노동자

성노동자

전국미군종업원노조연맹[1]

정식 명칭은 "전국외국기관노동조합연맹"(全國外國機關勞動組合聯盟, 이칭: 전국미군종업원노조연맹, 전국외국기관노동조합)이다.

기지촌 내에 주한미군이 고용하는 한국인 노동자들이 점차 많아지고 사용주와 근로자간의 마찰이 생기게 되자 부산지역을 시작으로 전국 미군 주둔지역에 지역별노조의 설립이 확산되었다. 1959년 11월 8일 서울, 파주, 동두천, 부평, 인천, 부산지구 등 6개 미군노조 산하 조합원들은 ‘전국미군종업원노조연맹’을 결성해 미군 종업원의 권익수호와 생활수준 향상을 위해 미군에 최저노임 인상, 한국 근로기준법 적용, 노동조건과 대우 개선 등을 요구하였다.

노조연맹은 1961년 5.16 쿠데타로 해산 되었다가 같은 해 8월 3일 공포된 법률 제672호 " 근로자의단체활동에관한임시조치법"에 의하여 ‘전국외국기관노동조합’으로 명칭을 바꾸어 전국단위 산업별 노동조합 체제로 재건 조직되어 전국적으로 활동하였다.

1963년 8월 23일 전국외국기관노동조합이 산하 16개 지부로 재결성되었으며, 그 후에 주한미군 산하의 하청업체와 외국인투자업체의 가입으로 다시 산하에 15개의 비직속 지부를 포함하게 되어 외국기관노조로서의 체계를 갖추고 활동하게 되었다.

그 뒤 주한미군의 일부 철수에 따른 조합원 감축과 국가보위법·긴급조치 등으로 활동이 위축되었으나, 지속적인 노력으로 활동을 전개하여 조합원들의 권익 향상과 노동조건을 개선하였다.

1981년 노동조합법의 개정으로 단위사업체별 노조로 체계가 바뀌자, 1981년 2월 27일 제19차 전국대회에서 규약을 변경하여 전국외국기관노동조합연맹으로 개칭하였다. 1990년 한국노총 산하의 산별노조로서 산하에 주한미군노동조합을 비롯하여 80여 개 조합과 5만 여명의 조합원을 확보하였다.

2009년 현재 전국외국기관노동조합연맹의 조직은 주한미군 노동조합 조합원이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밖에 경남지역본부(마산자유무역 제조업체) 6개 노동조합, 외자투자기업(외국상사업체) 12개 노동조합, 용역업체 4개 노동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군사노동자(미군)

인구

갈등

  • 인종차별 문제
    • 기지촌 내부의 인종차별은 1970년대 한국 정부가 실시한 '기지촌 정화운동'의 요인이기도 했다. 예컨대 캠프 험프리가 위치했던 평택 평택읍 안정리 기지촌에서는 1971년 7월 9일 이른바 "안정리 사건"이 일어났다. 기지촌 내 사업장들은 백인 병사들의 인종차별에 동조하고 흑인 출입을 금하기도 했는데 이에 격분한 흑인 50여 명이 이날 "백인전용 홀"을 습격해 집기를 부수며 폭행 했고, 주민들도 맞서 쌍방 30여 명(군인 10여명)이 중경상을 입은 사건이었다. 평택만이 아니라 파주 용주골 등 기지촌에는 대개 백인 출입 지역과 흑인 출입 지역이 분리되어 있었다.

기지촌의 분포

서울

영등포

용산 일대

경기

평택

파주

  • 용주골[2]
    • 법정 명칭은 파주읍 연풍1리다.
    • 1970년 기준 파주의 220 개 리 중 35개 리가 기지촌으로 분류되었고 인구 수 기준으로는 16.4만 명 중 약 4.8만 명으로 파주시 전체 인구의 약 30%가 기지촌에 거주했다. 인구수가 가장 많은 10개 리 중 절반이 기지촌이었는데 용주골의 인구는 약 4,700명으로 35개 기지촌 중 가장 많았다.
    • 1960년 대 용주골 상업시설을 업종별로 분류하면 식료/잡화점(17%), 양품점(8%), 양복점(8%), 클럽 (7%), 선술집(6%) 순으로, 대부분의 업종이 서비스업이었다.
    • 용주골은 대추골/대추벌(연풍2리)와 혼동 되기도 하는데, 용주골이 기지촌으로서 발달했고 미군을 상대하는 각종 상업과 서비스 업소가 자리했다면 대추골은 한국인 대상 성매매 집결지로 미군 출입이 금지되었다.
    • 2023년 현재 파주시장 김경일이 파주 내 성매매집결지 폐쇄를 선포하면서 연풍리 성매매집결지 종사자 200여명이 지난 3월 23일 생존권 보장을 촉구하고 집결지 해체 중단을 요구하는 검정 소복 시위를 진행하였다.[3]
  • 법원리

동두천

주한미군은 1951년부터 동두천에 주둔하기 시작했다.

  • 중앙역, 턱거리마을 : 동두천 중앙역에서 동쪽으로 3키로 떨어진 곳에 있다. 미군부대 캠프 호비가 위치해있는데, 1954년 설치된 캠프 호비의 규모는 14.05㎢로 동두천시 전체 면적(95.67㎢)의 15%가량을 차지하며 동두천에서 가장 큰 미군 기지다. 캠프 호비가 들어서면서 미군부대 관련 종사자들이 마을로 몰려들었고, 미군부대 정문 앞에 기지촌 성매매 집결지가 생성됐다. 턱거리마을 주민 대부분은 미군 상대로 일했다. 여성들은 미군부대 안 빨래공장에 취직하거나 기지촌 성노동자들의 청소와 빨래, 육아를 대신하며 돈을 벌었다. 식당이나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도 있었고, 성매매업소에서 일하는 여성들도 있었다.[4]
  • 턱거리마을 기지촌 성노동자 혐오 범죄 : 1964년, 기지촌 성노동자 김옥희(28)가 변사체로 발견됐다. 그와 함께 동거하던 미군이 범인이었다.
  • 중앙역, 양키시장 : 청소년 24시간 출입 금지 구역이 있다.
  • 소요산, 몽키 하우스 : 과거 동두천 기지촌에서 일하던 여성들을 가두던 성매매 여성 낙검자 수용소, 몽키 하우스가 소요산 주차장 인근에 버려진 폐허 건물로 존재하고 있다. 박정희 정부가 주한미군 주둔을 위해 기지촌 성매매 산업을 활성화 시키며 기지촌 여성들을 강제로 성병 검진을 하고 감금하던 곳이 몽키하우스다. 기지촌 여성들은 이곳에 끌려가 페니실린 주사를 맞고 부작용때문에 사망하기도 했다.[5]
  • 보산역, 캠프 케이시 : 1960년, 미군이 주둔하던 당시 가장 번화한 기지촌 동네였으나, 2004년 이라크 전쟁 당시 동두천에 주둔하던 미군 절반이 빠져나가고, 평택 미군기지 이전으로 병력이 빠져나가 현재 보산동 일대는 원래 미군 규모의 10분의 1수준으로 줄어들었고, 상권도 몰락하고 있다. 과거에는 한국인 성노동자가 대부분이었지만, 현재에는 이주 성노동자로 채워졌다. 필리핀, 러시아 등의 여성들이 중개업자로부터 E-6(예술흥행) 비자를 받아 유흥업소에서 일하고 있다.[5]

양주

포천

인천

강원도

춘천

원주

충청도

대전

전라도

군산

경상도

대구

포항

칠곡

부산

같이 보기

출처

  1. “전국외국기관노동조합연맹(全國外國機關勞動組合聯盟)”. 2023년 4월 13일에 확인함. 
  2. 강, 수영; 백, 일순; 이, 승욱 (2020년 3월 11일). “미군 기지촌, 용주골의 역사적 변화: 사회경제적 공간구조를 중심으로” (PDF). 《대한지리학회지》 55 (2). 
  3. ““파주시장님, 성매매집결지 싱글맘 대표로 제 얘기를 할까 합니다.””. 2023년 4월 13일에 확인함. 
  4. 윤지연, 은혜은 (2020년 3월 3일). “쇠락한 기지촌 마을, 배제된 사람들의 기록”. 《참세상》. 2023년 4월 13일에 확인함. 
  5. 5.0 5.1 윤지연, 은혜진 (2020년 3월 6일). “동두천, 여전히 배제된 여성들의 도시”. 《참세상》. 2023년 4월 13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