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대

최근 편집: 2023년 4월 20일 (목) 10:26
강경대
출생1972년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사망1991년 4월 26일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
학력휘문고등학교 명지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직업학생운동가
웹사이트강경대 열사 추모사업회
정보 수정

강경대는 대한민국 학생운동가였다.

강경대 열사 투쟁의 배경

강경대 열사가 명지대학교를 입학한 1991년은 처음으로 각 대학 신입생 등록금이 100만원이 넘기 시작한 해였고, 사학비리에 대한 사회적 문제인식이 확산되던 해였기에 전국적으로 학원자주화 투쟁이 활발하였다. 특히 명지대학교의 학교재단인 명지학원은 사학재단의 의무인 법정 부담 전입금(교직원용 연금, 의료보험)을 대학에 지급하지 않고, 재단의 의무사항인 학교 건물의 증개축 비용을 학생 등록금으로 대체하였다. 또한 재단은 용도 불명의 토지를 매입하는 등 등록금을 이용한 땅 투기를 한다는 의심을 받고 있었다. 이에 명지대 학생들은 등록금 인상 반대, 교내 강의실 확보, 비리재단 퇴진을 요구하며 총장실점거, 비리교수 감금 등 학원자주화 투쟁을 진행중이었다. 또한 사회적으로는 군사정권인 노태우 정권 퇴진이라는 민주화 운동의 열기가 뜨거울 때였다. 학내에는 공공연하게 사복경찰과 기무사, 안기부 요원들의 사찰이 횡행하였고, 특히 학자투쟁이 격렬하게 벌어지는 대학교에서는 전투경찰이 재단이사장실과 총장실에 상주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건 당시 명지대 인근 상명대학교도 유사한 문제로 학원자주화 투쟁이 진행중이었다. 1991년 4월 24일 명지대학교 총학생회장 박광철은 상명대학교 교내집회에 지지발언을 하고 돌아가는 길에 경찰에게 불법연행을 당했다. 이에 분노한 명지대 학생들은 박광철 석방을 요구하며 교문밖으로 진출을 시도했으나 경찰기동대는 최루탄을 난사하며 강경진압을 했고, 학생들은 학교에서 철야농성을 시작했다.

강경대 열사 투쟁의 전개

1991년 4월 26일 명지대 학생들은 '학원 자주화 완전승리와 노태우 군사정권 타도 및 총학생회장 구출을 위한 결의대회'를 진행하고, 다시 학교 밖으로 진출했으나 백골대까지 동원된 경찰의 초강경진압과 시위학생 폭력연행이 이루어졌다. 강경대 열사는 이 과정에서 경찰의 쇠파이프에 온몸을 구타당했고, 강경대 열사가 쓰러지자 경찰들은 그를 방치하고 다른 학생들을 연행 시도했다. 이에 학생들은 강경대 열사를 구출해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으로 이송됐으나 1시간만에 사망하였다. [1] [2]

강경대 열사의 죽음이 알려지면서 서부총련 학생들은 경찰의 시신 탈취와 은폐 공작을 막기 위해 세브란스 병원 영안실 주변을 지키며 농성을 시작했고, 이어 서총련 학생 2천 여명이 모였다. 당시에는 군사 정권 하에 경찰이나 군에서 유족과 합의 없이 시신을 화장해버리는 경우가 여러 차례 있었다. 이게 경찰은 사인 규명을 위해 부검이 필요하다며 시신 인도를 요구했지만, 유가족과 농성단을 이를 거부하였고, 여러 차례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1991년만 해도 고등학생의 대학교 진학률이 33.2% 밖에 되지 않았고, 중학교도 의무교육이 아니어서 초졸도 흔하고 대학생은 드물던 시절이었기에, 4년제 대학교 학생이 경찰에 맞아죽었다는 것은 사회적 큰 파장을 일으켰다. 안응모 당시 내무부 장관은 사망 다음날인 4월27일 사과성명을 발표하고 퇴임할 정도였다. 같은 날 검찰은 전경 5명이 강경대 열사 구타에 가담했다며 구속했으나, 명령을 내린 책임자는 모두 제외되어 꼬리 자르기에 불과한 것이었다.

국민연합·전대협·신민당 등 44개 단체와 정당으로 구성된 ‘고 강경대 열사 폭력살인 규탄 및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가 구성되었고, 5월 4일까지를 추모기간으로 정하고 열사 투쟁을 주도하였다. 집회를 할 때마다 폭력진압을 일삼는 전투경찰과 백골단 해체, 사찰을 일삼는 기무사/안기부 폐지 등이 목적이었고, 강경대 열사의 죽음을 전경 몇 명이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노태우 대통령의 대국민 공개 사과와 내각 총사퇴, 이종국 치안본부장 등의 책임 경찰 간부 구속이 요구사항이었다. 4월 29일 오후 6시 연세대에서 3만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강경대 구타치사 사건을 규탄하는 ‘폭력살인정권 규탄 범국민결의대회’가 열린 것을 비롯하여 전국 60여 개 대학에서 규탄집회가 열렸다.

사망 5일 만인 91년 5월1일 검찰은 유족과 부검을 전제하지 않은 공동검안에 합의했고, 검찰 추천으로는 이윤성 서울대학교 법의학과 교수와 이정빈 서울대 명예교수, 황적준 고려대 명예교수, 서재관 당시 국립과학수연구소 법의관이 참여했고, 유족 추천으로는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소속 양 길승 녹색병원 이사장과 신경외과 전문의인 변박장 전 순천향대의료원장, 정형외과 전문의인 고한석 전 서울백병원 교수, 최병수 전 보훈병원 일반외과장이 참여했다.

공동검안 전에는 강경대 열사가 뇌출혈로 사망했을 거라고 알려졌었다. 전신에 외상이 많았지만, 특히 오른쪽 이마에 길이 4.3㎝, 폭 1.2㎝의 파열 상처가 있었고, 정수리에도 지름 3.5㎝ 정도의 함몰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엑스레이와 CT 촬영 결과 갈비뼈가 여러 개 부러졌고, 그 중 하나가 심장을 찔러 심낭막 내 출혈로 사망한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직접적인 사인이 무엇이건 간에 한 마디로 요약하면 맞아 죽은 것이다. 사인이 규명되자 노태우 대통령도 다음날 국민과 유족에게 공개사과했다.

공개사과에도 불구하고 경찰 책임자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1991년 5월 4일 오후 서울, 부산, 광주 등 전국 주요 도시에서 ‘백골단 전경 해체와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회’를 열었다. 이날 강경대 구타치사에 항의하는 가두시위에는 전국 21개 도시에서 수 만여 명이 참가하여 밤늦게까지 시위를 벌였다. 5월 8일에는 여성단체연합이 명동성당 앞에서 ‘백골단·전투경찰 해체 및 폭력정권 규탄 여성대회’를 개최하였다. 여전히 집회가 열릴 때마다 전투경찰과 백골단이 출동하였고, 최루탄과 지랄탄이 퍼부어졌더랬다.

1991년 5월 14일 명지대학교에 영결식이 열리며 5일장이 시작되었다. 발인날이자 5·18광주민중항쟁 11주년인 5월 18일 ‘노태우 정권 퇴진 제2차 국민대회’(고 강경대 열사 장례식)가 거행되고, 서울과 광주 등 전국 주요 도시에서 5·18 추모집회와 함께 강경대 열사 치사 사건을 규탄하는 가두시위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강경대 열사의 장례 행렬은 신촌로타리에서 시청 앞 노제를 저지하는 경찰과 충돌하여 4시간 이상 대치한 끝에 마포구 공덕동 로타리로 장소를 바꿔 노제를 치뤘다. 밤새 이동하여 다음날 광주에 도착한 장례 행렬은 16시간이나 경찰과 대치한 끝에 자정을 넘긴 심야에 노제를 치렀다. 운구차가 도착한 금남로 3가 일대는 학생들과 시민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10만여 명의 인파로 메워졌으며, 학생과 시민들은 경찰의 강제 해산에 맞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3] 결국 5월 20일이 되어서야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강경대 추모사업회

시위대는 명지대학교 등록금 인상 반대를 주장하며 도로 점거·화염병 투척투석전을 전개하였다. 강경대는 민주화 운동에서 살해당하여 민주화 운동 상징으로 남아있다. 강경대 열사 추모사업회와 강경대기념관이 운영되고 있으며, 2007년 7월 5일 민주화운동 관련 인물로 인정되었다. 2021년 6월 10일 국민훈장 모란장이 추서되었다.

같이 보기

각주

출처

  1. [https://web.archive.org/web/20140224204345/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1/1846884_6097.html “MBC���� - news.mbc.co.kr”]. 2014년 2월 24일. 2021년 11월 27일에 확인함.  |제목=에 대체 문자가 있음(위치 4) (도움말)
  2. [https://web.archive.org/web/20140224200237/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1/1846918_6097.html “MBC���� - news.mbc.co.kr”]. 2014년 2월 24일. 2021년 11월 27일에 확인함.  |제목=에 대체 문자가 있음(위치 4) (도움말)
  3. [https://web.archive.org/web/20150209154017/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1/1847704_6097.html# “MBC���� - news.mbc.co.kr”]. 2015년 2월 9일. 2021년 11월 27일에 확인함.  |제목=에 대체 문자가 있음(위치 4) (도움말)


외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