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주룡

최근 편집: 2022년 12월 25일 (일)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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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에게 사랑 받았다기보다는 남편을 사랑했다.[1]

강주룡은 일제의 차별에 저항한 조선의 노동운동가이다. 1901년 평북 강계 출생으로 1921년 만주지역 독립군 부대에 관여한 기록이 있다. 이후 1926년 평양으로 이주하면서 노동자가 되었다. 1930년 8월 평양 고무공업조합이 일방적으로 노동자들에게 임금 삭감을 통고하고 차별을 하자 투쟁에 나섰다. 1931년 5월 4일 평양적색노동조합을 조직하면서 노동자의 부당대우를 호소하며 평원고무공장의 파업을 주도했으나, 일본경찰의 간섭으로 공장에서 쫓겨났다. 이후 1931년 5월 29일 을밀대 지붕에서 무산자의 단결과 참상을 호소하며 단식투쟁, 한국 사상 최초의 고공농성 1인 시위를 벌였다. 적색노조에서 조직운동 명목으로 기소 투옥되었다.[2] 여러 번의 투옥과 옥중 투쟁을 반복했고, 1932년 8월 13일 오후 3시 반, 평양 서성리 빈민굴 68-28호에서 목숨을 잃었다.[3][4] 독립운동의 서훈으로 애족장을 받았다.

강주룡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으로 <체공녀 강주룡>이 있다.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