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최근 편집: 2022년 12월 25일 (일) 15:45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개요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G. W. F. 헤겔)은 임마누엘 칸트에 의해 제기된 초월론철학(Transcendental Philosophie)의 미해결 문제들을 중심으로 18-19세기 독일 철학계 지형을 바꾼 독일 이상주의(Deutsch Idealismus) 철학의 마지막 주자이자, 독일 이상주의의 미해결 문제들을 완결한 철학자이기도 하다.

헤겔의 저작은 아주 난해하다. 헤겔의 대표 저서로는 『정신현상학』이 있는데, 정신현상학은 칸트에 의해 제기된 의식(Bewußtsein)과 사물 자체(Ding an sich)의 분리라는 문제의식을 거부했다. 대신 정신현상학은 하나의 정신을 욕구하고, 목숨을 걸고 싸우며, 지배하고, 지배받으며, 발전하며,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끝없이 변화하는 존재로 주목했다.

헤겔의 철학 체계

칸트는 보편적인 인간 의식의 이원적 구조(지성을 통한 대상인식과 실천이성을 통한 지향적 의식)를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이 보편적 의식이 모든 학문적 인식의 기저에 놓여 있는 초월론적 지식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모든 학문을 통합하는 체계의 구심점을 세우려고 시도하였다. 반면 헤겔은 인간 의식의 구조가 보편적으로 주어져 있다는 주장을 거부하고, 모든 학문을 정신의 발전과정 안에서 파악하려 한다. 즉, 헤겔은 모든 학문과 지식을 설명하기 위해 정신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헤겔에 따르면 정신은 크게 세 가지 관점에서 이야기될 수 있다. 주관적 정신, 객관적 정신, 그리고 둘을 지양(Aufhebung)한 절대적 정신이 정신 발전의 세 계기이다. 헤겔의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은 주관적 정신을 다룬다. 그리고 『법철학』과 역사철학 강의 등의 저작이 객관 정신을 다룬다. 마지막으로 종교철학 강의 등이 절대적 정신을 다루는데, 이러한 세 가지 정신 발전의 계기는 다시 『정신현상학』에 제시된 체계 안에서 이해될 수 있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대상의식과 결핍된 자기의식

헤겔은 데카르트로부터 이어진 자기의식의 확실성[1]이라는 주장을 반박했다. 왜 그랬는가? 거칠게 생각하면 이렇다. 배고플 때 "내가 나다"라고 의식한다면 빵이 생기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내게 빵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하나의 명제라면, 왜 명증한 자기의식으로부터 왜 그 명제를 유도할 수 없는가? 헤겔에 따르면 오히려 우리의 의식을 하나의 정신으로 만들기 위해 최초로 태동하는 궁극적 바탕은 자기의식이 아니라, 대상의식이다. 인간의 활동은 지향성을 가지며, 우리는 이 지향적 대상이 결여되었다고 느낄 때 마침내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의식한다. 즉, 빵을 얻지 못해 굶주릴 때, 나는 비로소 "(나는) 배고프다"라는 진술을 내놓는다. 만약 모든 지향적 대상이 충족되었다고 느끼면서 그런 충족된 상태만이 이어진다면, 우리는 아무 진술도 내놓지 않을 것이고, 우리는 어떤 지식도 만들어 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자기의식

우리는 지향하는 대상을 욕구할 때 최초로 하나의 진술을 내놓는다. "빵이 필요해"와 같은 진술은 빵이라는 대상에 대한 의식 뿐만 아니라, 빵이 내게 필요하다/필요하지 않다라는 가치판단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빵이 필요해"라는 진술은 대상의식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 즉 자기의식을 포함한다. 문제는 이러한 자기의식은 일시적이라는 데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빵이 (내게) 결핍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빵을 향해 활동하여 그것을 얻어낼 것이다. 그러면 "빵이 필요해"라는 자기의식은 일단 사라져버린다. 더이상 빵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아무 중요성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다시 빵이 필요한 때가 오면, 그 때 스스로를 빵이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말초적인 상태에서 인간은 항상 자신을 무언가 결핍된 존재로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이는 결핍된 자기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독립적 주체이자, 경제적이면서 정치적인 존재인 '나'라는 의식은 도대체 언제 생기는가? 아쉽게도 그런 종류의 자기의식은 한참 뒤에 생겨난다. 문제는 세상에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존재한다는 데 있다.

목숨을 건 투쟁

당연하지만 내가 갖고 싶은 건 다른 사람도 갖고 싶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까지 "나는 대상을 의식한다"라는 사실과 "내게 대상이 결여되어 있다"라는 사실, 그리고 나 말고도 다른 사람도 그 대상을 갖고 싶다는 사실 외에 아무 것도 인정하지 않았다. 법이나 도덕은 물론 이런 말초적인 의식으로부터는 아직 생겨나지도 않았다. 그러니 하나의 대상을 갖고 싶은 여러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뿐이다. 이들은 대상을 쟁취하고 스스로의 결핍을 해결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서로를 죽이기 위해 싸운다!

비대칭적 인정 관계: 주인과 노예

대상의 결핍을 깨달은 사람들은 이제 서로 목숨을 걸고 싸운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는 죽음이라는 궁극적 결핍에 대한 두려움이 앞서는 사람들과, 용감하게 자신의 목표를 위해 두려움 없이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눈 앞에 놓인 결핍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우선적으로 지향하게 된다. 그러므로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을 갖고 싶어 하는 다른 사람을 우선 고려하고, 이들의 욕구를 인정하게 된다. 반면 용감한 사람들은 자신의 눈 앞에 놓인 결핍에서 벗어나고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했다. 이들은 자신이 갖고 싶어 하는 것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며, 못 가지는 사람들은 당연히 못 가지고 빼앗겨야 하는 사람으로 받아들인다. 이렇게, 용감한 사람과 비굴한 사람 사이의 상호 인정이 이루어진다. 한 쪽은 노예로부터 물질을 향유하는 주인이 되고, 다른 한 쪽은 물질을 생산하고 주인을 위해 바치는 노예가 된다.

대칭적 상호 인정: 정치적 사회의 등장

계속

헤겔과 페미니즘

여성을 철저히 사적 영역에 가두고 역사에서 배제하였다는 지적이 있다. 여성을 변증법의 지체된 단계로 보았으며, 여성은 '공동체 생활의 영원한 역설'이라는 말을 남겼다. [2]

각주

  1. 자기의식의 확실성이라는 개념을 알기 위해서는 자기의식이라는 개념에 대해 알아야 한다. 자기의식이란, "나는 나다"라고 말할 때와 같이, 생각하는 자기 자신(주어 '나')을 스스로 분리하여, 의식하려는 대상(술어 '나')으로 삼는 진술 내지는 그러한 의식을 말한다. 자기의식의 확실성이란, 그와 같이 자기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진술이 가장 순수할 뿐만 아니라 가장 맑고 또렷한, 즉 궁극적으로 명석판명한 명제이고 따라서 이 명제가 참이라는 조건 하에 다른 모든 명제들의 진리치가 결정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을 개진한 현대 초기의 사상가들을 가리켜 합리론자라고 칭했다.
  2. 페미니즘 정치 사상사. 캐럴 페이트만&메어리 린든 쉐인리. 도서출판 이후. p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