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

최근 편집: 2022년 12월 29일 (목)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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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러시아어: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ая партия, 영어: Communist party, 共産黨)은 공산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정당을 뜻한다.

개요

벨기에의 청년헤겔파 사회주의 조직인 브뤼셀 공산주의자 연락위원회(Communist Correspondence Committee of Brussels)와 영국의 기독교 사회주의 단체인 정의자동맹(League of the Just)이 1847년 6월에 합당하여 만들어진 '공산주의자동맹'(Communist League)이 그 시초이다. 공산주의자동맹 창당 시기에 쓰여진 선언문이 바로 『공산당 선언』(독일어: 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이다.

공산주의자동맹의 맹원들은 급진적 공화주의자들이 요구하던 기초적 요구와 더불어 자본주의 사회가 갖고 있는 비인간성을 비판하였고, 자본주의 사회보다 질적으로 더 높은 사회 단계를 이룰 것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정의자동맹의 지도자였던 빌헬름 바이틀링과 연락위원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던 칼 마르크스의 노선 차이로 인해 내부 맹원들이 서로 수시로 다퉜고 결국 1852년에 동맹을 해산하게 된다.[1]

이후 제1국제당 내에서 마르크스주의가 지배적인 투쟁 사상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1869년에는 과거 급진적 공화주의자들의 연락위원회의 조직 구성 방식을 모방한 '독일 사회민주노동당'(독일어: Sozialdemokratische Arbeiterpartei)이 창당된다. 이 정당은 중앙유럽 지역에서 강력한 사회주의 정당으로 급부상하였다. 사회민주노동당의 구성원은 모두가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었으며, 온건한 사회주의자들도 존재했었다.[2] 1875년에는 '독일 사회민주당'으로 개칭했으며, 유럽 각국의 사회주의 정당은 모두 이 독일 사회민주당의 양식을 그대로 도입하여 형성되었다. 후술될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도 역시 독일 사회민주당의 구성을 모방한 것이었다.

그러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당은 전쟁 지지파와 전쟁 반대파와 나눠지는데, 결국 전쟁 지지파가 독일 사회민주당의 다수파를 형성하게 되면서 제2국제당의 붕괴와 함께 독일 사회민주당도 급격히 유럽에서의 지도적 위상을 잃게 된다. 종전 후에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부르주아민주주의적 원칙에 따라 일반 대중 정당의 기능으로 온건화된다. 하지만, 1917년 2월에 혁명을 주도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위상은 급격히 올라가게 되었다.[3] 특히, 4월 테제를 발표하여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을 채택한 블라디미르 레닌[4]의 영향력이 사회주의 운동에서 강력한 파벌을 형성하면서 나아갔다. 1918년 3월, 레닌의 볼셰비키파는 이른바 '사회민주주의자'라 불렸던 개량주의 분파와 완전히 결별을 하였고, 동시에 멘셰비키[5]를 최대한 배제하여 조직 명칭을 '러시아 공산당'으로 바꿨고 독자적인 정당 구조를 갖게 되었는데, 바로 이 조직 구조가 현재까지 존재하는 공산당의 조직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

구성

러시아 볼셰비키파가 러시아 공산당으로 개칭하여 당 구조를 개편한 이후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공산당의 기본 세포 골격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 골자는 '민주주의적 중앙집권제'(러시아어: Демократический централизм)라 불리는 원칙에 있다. 민주주의적 중앙집권제는 하급당 조직과 상급당 조직으로 조직을 나눈 뒤, 실정적 측면에서는 하급당의 역할을 중시하고, 이들의 보고에 의지하되, 결정은 상급당에 포함된 당원이 결정하여, 결정한 사안에 대해서는 모든 하급당이 기본적으로 따라야 한다는 원칙이다. 이러한 원리의 강조는 당내 종파 행위를 막아서 혁명에서 굳건한 단결성을 유지하기 위함이 있다.[6] 상급조직은 정치국(Politburo), 중앙위원회(Central Committee), 집행위원회(Executive Committee)로 나뉘며, 하급 조직은 지역당위원회 내 세포 조직 전체를 아우른다.

정치국

정치국은 공산당의 제일 중심에 위치한 권력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최소 8 명에서 최대 15 명 정도로 구성되는데, 정치국원은 중앙위원회가 선출하기도 하며, 정치국원 집단의 내정에 의해 임명되기도 한다. 대부분 국가의 공산당 정치국은 최일선에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공산당 창당에 기여한 핵심 성원들이 맡게 된다. 사회주의국가에서 정치국원도 역시 핵심 권력이라고 할 수 있으며, 정치국원이 경제, 군사, 내무, 문화, 사상 면에서의 핵심 권력을 겸직하는 경우가 아주 많다. 소련의 경우는 중앙위원회 서기국이 권력의 최정점에 선 집단이었는데 서기국원은 모두 정치국원이 겸직하였다.[7]

중앙위원회

중앙위원회는 공산당의 두뇌라고 할 수 있다. 흔히, '당중앙'이라고 하는 말은 이 중앙위원회를 가리킨다. 규모는 각 국가마다 다르나, 보통 최소 14 명에서 최대 220 명 사이 정도로 구성한다. 국가나 이와 유사한 공동체를 구성한 공산당의 경우에는 당대회에서 당원들이 중앙위원회를 선출하나, 착취 사회에서 공산당을 조직한 경우에는 조직에 참가한 핵심 멤버들이 중앙위원회를 바로 맡는다. 중앙위원회는 공산당이 행하는 여러 투쟁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중앙위원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국도 중앙위원회를 무시할 수 없으며, 공산당의 투쟁 방침은 정치국과 중앙위원회의 공동 논의에 따라 결정된다.

중앙위원회의 존재는 공산당의 생명선과도 같다. 중앙위원회 위원이 체포될 경우 공산당은 신뢰성이 높은 새로운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를 구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중앙위원회의 규모만 축소되기에 이른다. 계속 체포가 진행될 경우 중앙위원회가 더욱 적어질 것이고, 결국엔 공산당은 붕괴할 것이다. 1928년 조선공산당의 해체도 중앙위원의 연이은 체포로 인해 터진 것이다.

군사위원회

군사위원회(Military Committee)는 중앙위원회가 관리하는 군사에 관련된 당 최고 조직이다. 러시아 볼셰비키의 경우는 1917년 10월 혁명 당시에 군사혁명위원회(러시아어: Военно-революционный комитет)가 혁명을 지도했으며, 위원은 볼셰비키 핵심 멤버가 맡았다. 중국공산당이 1927년 8월에 홍군을 조직하면서 만든 혁명군사위원회(革命軍事委員會)도 역시 이와 유사한 조직에 속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마오쩌둥 사상의 '당군주의'에 영향을 받았기에 아직도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실질적인 지도자 역할을 하는 직책으로 되어있다.

집행위원회

집행위원회는 공산당의 입법 기구이다. 집행위원회는 처음부터 존재하는 조직이 아니라, 공산당이 일정한 영토를 획득하여 기타 입법 처리를 해야 할 상황이 생기면 조직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도 입법 행위의 향방을 결정하는 핵심 기관은 중앙위원회이기 때문에 집행위원회는 사실상 중앙위원회의 뜻을 집행하는 형식적인 기관에 불과하다. 국가 성립 이후에는 없어지거나, 민간 입법기관의 권한을 견제하여 공산당의 독재를 수월하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

성분

현대 사회에서 권력을 잡지 못 한 공산당의 경우는 사실상 대중 정당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몇몇 공산당의 경우는 의회주의를 극도로 멀리하여 불법지하활동을 감행하는데, 이러한 경우에는 대중 정당이 아닌, 투쟁 지도의 중축을 담당하는 엘리트 집단으로 기능한다. 또한, 현재 존재하는 사회주의국가의 공산당은 대중 정당이 아니며, 노동자 중 우수한 능력이 인증된 자에 한해서만 가입할 수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우는 2001년부터 자본가의 입당도 허락하고 있다.[8]

블라디미르 레닌의 조직 이론에 따라, 공산당에 가입한 당원은 중앙위원회를 선출할 자격을 가지며, 동시에 중앙위원회 위원이 될 수 있는 피선거권을 갖고 있다. 그리고 당원은 비당원에 비해 높은 권리를 누리는 대신에 생활 면에서 엄격해야 하며, 스스로의 정예화를 위해 자기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점에서 공산당은 처음부터 전체주의국가에서 권위주의적 엘리트 집단으로 변질될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현재

러시아 내전에서 볼셰비키파가 승리한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공산당의 노선은 크게 세 번을 변화를 겪었다. 최초의 공산당은 코민테른(Comintern, 국제공산당)의 지시로 블라디미르 레닌의 이념인, '레닌주의'를 따르는 게 보통이었다.

첫 번째 변화는 레닌 사후에 일어나는데, 이오시프 스탈린이 1924년에 전연방공산당의 패권을 잡고, 스탈린이 코민테른을 주도하면서 1930년대 중반부터 스탈린식 공산주의인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주요 이념이 된 것이 그것이다. 트로츠키를 지지하던 각국의 공산주의자들은 기존 공산당을 거부하고 트로츠키의 사상을 따르는 새로운 공산당을 창당하였다.

두 번째 변화는 스탈린이 사망한 시점인 1953년부터 흐루쇼프에 의해 탈스탈린화가 진행되자, 대부분의 공산당이 흐루쇼프의 수정주의 노선을 채택한 것이다.[9][10] 이에 따라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은 마오쩌둥과 엔베르 호자를 지지하면서 기존의 공산당을 지지하지 않고 새로운 정당을 만들어서 교조적인 노선을 이어나갔는데, 주로 'ML당', '공산당 ML파', '노동자공산당' 등의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1970년대 후반부터 국제혁명에 관한 소련의 지도력이 약해지면서 대부분의 공산당은 '유럽공산주의'라는 온건화 된 노선으로 우경화되었다. 오늘 날의 공산당도 대부분 유럽공산주의 노선으로 당을 이끌고 있다. 중국공산당과 베트남공산당은 소련 붕괴 1년 전인 1990년에 이미 시장주의 노선을 택하였다.

이렇게 하여 오늘 날에는 크게 다섯 가지의 공산당 분파가 공산주의 운동을 이끌고 있다.

  1. 마르크스-레닌주의파: 이오시프 스탈린의 레닌주의 해석을 고수하는 이른바 '반수정주의'(Anti-revisionism) 그룹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 날에는 마오쩌둥 사상과 호자주의, 그리고 주체사상을 따르는 공산당을 일컫는 말로, 극단적인 계획 경제 추구와 반미 및 반제국주의, 일국혁명, 제3세계와의 적극적 협력 등을 고수하고 있다. 국내에도 존재하는데 전국노동자정치협회노동사회과학연구소가 대표적이다. 주로 ML당, 공산당 ML파, 노동자공산당이라는 당명을 사용한다.
  2. 트로츠키주의파: 레온 트로츠키가 주장한 노동자국가론과 영구혁명론을 따르는 공산주의자 집단을 가리킨다. 제3세계와의 협력을 거부하며 동시에 통일전선을 거부하고, 세계혁명, 순수한 산업노동자에 기반한 고립주의적 전술을 택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주로 반자본주의신당, 사회주의노동자당이라는 당명을 사용한다. 일본의 신좌익 운동도 모조리 트로츠키주의의 영향을 받은 운동이었으며,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革命的共産主義者聯盟)이 아닌 다른 계파에게도 영향을 줄 정도로 일본 60-70년대 공산주의 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줬다. 국내 단체로는 볼셰비키그룹이 있다.
  3. 수정주의파: 1953년부터 대두된 소련의 수정주의 노선을 채택한 그룹이다. 특징은 공산주의 투쟁에서 의회주의 전술을 주 전술로 한다는 점과, 자유주의 정당과의 적극적인 타협을 통해 제도권에 진입하려 한다는 것이다. 미국 공산당, 영국 공산당, 캐나다 공산당 등이 이에 해당한다.
  4. 유럽공산주의파: 선거라는 민주주의 절차를 통하여 합법적으로 권력을 잡겠다는 마르크스주의 노선이다. 그 외에도 전통적인 계급투쟁노선을 포기하고, 자유주의 정당과도 적극적으로 연대하는 등 극좌 이념이라고 하기 매우 어려운 부분이 있으며, 신좌익의 성격도 갖고 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이탈리아 공산당이 제창한 노선으로 현재 이탈리아 공산당, 프랑스 공산당이 대표적인 정당이다. 일본 공산당도 이에 포함할 수 있는데, 이 경우에는 유럽공산주의 노선 중에서도 상당히 온건화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5. 시장사회주의파: 중국공산당과 베트남공산당의 시장 경제 노선이다. 수정주의를 과격하게 받아들인 예로, 자본주의적 소유 구조를 회복하고 자국우선주의를 채택하는 등 마르크스주의 노선에서 사실상 이탈했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공산당의 여성해방 관점

공산당은 표면적으로는 여성해방을 긍정하며, 여성인권 증진을 위한 법률 마련에 힘을 보태고 있으나, 근본적으로 '여성주의'에 대해서는 소부르주아 사상이라고 평가한다.[11] 또한, 내부적으로도 상당히 경직된 수직 구조와 부권제의 영향력이 강하게 남아 있었기에 여성이 공산당의 주도 일원이 된다는 건 상당히 어려웠다. 일례로, 여성주의 철학자이자 실존주의자인 시몬 드 보부아르는 프랑스 공산당을 지지했었으나 남성 공산당원들의 교조주의 논리에 상당한 염증을 느끼고 결국 지지를 포기하게 된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50년대에서 70년대 사이의 여성주의 학자들은 공산당에서 활동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공산당의 여성혐오는 우익 정당과 자유주의 정당 및 사민주의 정당의 여성혐오 성향에 비하면 상당히 온건한 편에 속했으며, 여성을 억압하는 종교 논리에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정당이었기 때문이다.

주석

  1. David Fernbach, "Introduction" to Karl Marx, The Revolutions of 1848. New York: Random House, 1973; pg. 23.
  2. Bonnell(2005) 『The people's stage in Imperial Germany: social democracy and culture 1890-1914』, p. 37.
  3. Julius Braunthal (1980), 『History of the International, 1914-1943, Vol 2』, p38, 52
  4.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내 급진파
  5.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내 온건파였다. 이들은 10월 혁명까지 '정통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고 있었으나, 10월 혁명 이후부터는 급격히 우경화되어 독일 사회민주당의 개량주의를 받아들이게 된다.
  6. History of the Communist Party of the Soviet Union (Bolsheviks). Short Course (1939).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7. "Politburo (Soviet political body) – Encyclopædia Britannica". Britannica.com. 24 April 2013. Retrieved 16 June 2014.
  8. 관련 경향신문 기사문(2001년 7월 3일)
  9. 북한은 소련파와 연안파가 흐루쇼프의 수정주의 노선을 따르면서 조선로동당을 흐루쇼프 노선의 당으로 바꾸려고 했는데, 이에 반발한 김일성 주도의 빨치산파가 소련파와 연안파를 1958년부터 대대적으로 숙청한다.
  10. 마오쩌둥 치하의 중화인민공화국과 엔베르 호자 치하의 알바니아는 이러한 수정주의 노선에 반발하여 소련이라는 틀에서 이탈하였다.
  11. 블라디미르 레닌, 『공산주의청년여성이론』(함성, 1989년) pp. 49 - 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