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역사

최근 편집: 2023년 8월 1일 (화) 09:22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은 미노아 문명으로, 미노아는 크레타 섬에서 기원전 2700년경부터 기원전 1450년까지 존속하였던 문명이었다. 미노아 문명은 오늘날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며, 미노아 문명은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하여 해양을 기반으로 하여 활발한 무역활동을 전개하였다. 미노아는 기원전 1400년경 미케네의 침략으로 멸망하였는데, 미케네 문명은 고대 그리스의 청동기 시대라고 하며, 후기 헬라스 문화라고도 한다. 기원전 1600년경부터 기원전 1100년경까지 존속하였으며, 미케네인들은 그리스 본토와 에게 해의 자잘한 섬들에 거주하였다. 미케네 문명 시기의 그리스는 띄엄띄엄 도시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는데, 아테네와 테베, 티린스가 그 예이다.

미케네 문명(암흑기)

기원전 1100년경부터 기원전 800년경까지 그리스에는 도리아인의 침입이 있었는데, 그로 인하여 미케네 문명은 붕괴되었다. 도리아인들이 그리스에 거주하게 된 시기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기원전 9세기 무렵에는 도시국가가 차츰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미케네 문명이 붕괴하게 된 시점에는 철기로 무장한 해양인들이 이 지역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었는데, 도리아인들도 역시 철제 무기로 무장하여 미케네 문명을 사실상 붕괴시켜벼렸다. 정체의 시기가 끝나자 그리스 문명은 흑해 연안 등에 전파되었고, 암흑기를 마치고 황금기를 맞게 된다.

고대

고대 그리스 문명은 서구 문명의 시발점이 되었고, 로마 제국을 비롯한 유럽 전역에 전파되어 유럽의 르네상스 등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고대 그리스의 기본적인 정치 단위는 폴리스로, 세력이 큰 아테네와 스파르타와 같은 폴리스는 이들 중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

그리스가 도시 국가를 이룰 무렵, 대부분의 도시국가에서는 아리스토이Aristoi라는 귀족 계층 남자들이 권력을 잡았다. 대부분의 권력가는 무제한의 권력을 사회의 번영이 아닌 개인의 이익을 위해 휘둘렀고 그렇기에 독재 역시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끊임없이 정복 전쟁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그리스에서는 민주주의가 태동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이 국가의 통치 방법을 정확히 정할 일련의 법률을 생각해낸 것이다. 이 법률은 최대한 많은 남자들이 국정에 참여하며 부자 남자는 물론이고 가난한 남자도 포함시켜 1인 남성 독재의 전횡을 막으려고 했다는 점에서 최초의 민주주의 혹은 시민의 지배로 일컬어지곤 한다. 아테네 남성 시민들은 아크로폴리스 신전 밑의 광장 아고라에서 500인 평의회를 조직해 결정사항을 의논했고, 최소 6000명의 참가하는 민회를 구성해 중요한 현안에 대한 투표를 했다.

철학의 기원

올바른 결정을 내리자면 국민이 모든 공적 영역, 즉 무역, 도시건축, 이웃 나라와의 관계, 정의와 부정 등에 대해 훤히 알아야만 했기에 대부분의 결정은 최고의 논리로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소수의 뜻을 따랐는데, 이로부터 기원된 새로운 사고방식이 바로 필로소피Philosophy, 철학이다. 다음을 참고할 것 철학#기원[1]

고대 그리스의 여성 배제

고대 그리스에서 남성으로 태어나면 그는 농부도, 정치인도, 상인도, 수공업자, 시인과 철학자, 연설가, 조각가, 건축가, 의사가 될 수 있었다. 오늘은 연극을 하고 내일은 전쟁터로 나가 싸우고, 모레는 평의회에서 정치 현안을 논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자는 민주주의에서 배제되었다. 아테네에서 무엇을 계획하고 건축하고 토론하고 결정한다 해도 여자는 참여하거나 발언할 수 없었다. 연극의 여자 역할마저 남자들이 대신했다. 여자에게 허용된 것은 무희로 춤을 추는 것뿐이었다.[1]

여자는 보아야 하는 것, 그 말은 듣지 말아야 한다.

여성의 삶

여성들의 장소는 집이었다. 여자들은 남자들이 들판에서 거두어운 것을 식품으로 가공했다. 밀을 빻아 빵을 굽고 치즈와 올리브유를 만들었다. 가장 중요한 임무는 천과 옷을 만드는 일이었다. 양털이 실이 되고 그 실이 다시 천이 되려면 물레는 거의 쉬지 않고 돌아가야 했다. 작가 크세노폰은 물레질이 여성에게 가장 명예롭고 적합한 일이라고 말했다.
여성은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없었다. 남성을 동행하지 않으면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여자는 남자의 장신구였고, 미혼일 때는 아버지, 기혼일 때는 남편의 소유였다. 혼자 사는 여자는 위험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자가 공공장소에 나갈 때는 베일이라도 써서 자신을 가려야 했다.
역사학자 헤시오도스는 이렇게 말했다. "고귀한 제우스가 여자를 창조한 것은 남자를 괴롭히기 위해서였다."

페르시아 전쟁과 마케도니아 전쟁

기원전 500년경부터 448년까지 벌어진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은 고대 그리스 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아테네는 이 시점 델로스 동맹을 결성하였고, 이에 맞서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결성하여 이로 인하여 기원전 431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아테네는 멸망하였고, 곧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마케도니아 왕국에 의해 정복된다.

2차 마케도니아 전쟁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사망한 기원전 323년에서 기원전 146년까지 기간에는 그리스 본토의 중요성이 급락한다. 기원전 323년 아테네와 동맹국들은 마케도니아 왕국에 대항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라미아 전쟁에서 패배하였고, 기원전 198년에는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일어났고, 이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는 그리스에 대한 지배력을 가지게 된다.

로마 제국

기원전 168년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하였으나, 그리스 문화는 로마인들의 삶을 지배하게 된다. 로마는 그리스를 네 개의 작은 공화국으로 분할하여 통치하였고, 정복되지 않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조공을 바쳐 살아나게 된다. 또한, 제국 내 모든 자유민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안토니누스 칙령을 선포하자 그리스는 환영의 입장을 밝힌다. 기원전 30년경 전성기 무렵, 로마는 남유럽을 통일하여 지중해를 마레 노스트룸Mare nostrum, 우리 바다라고 부를 정도였다.[1] 324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비잔티움을 로마 제국의 수도로 삼게 되고,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사망한 후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이 된다. 동로마는 존속이 되어 번영한다. 동로마 제국은 그리스 본토와 아나톨리아 및 지중해 동부 연안을 중심으로 하였으며, 610년 재위에 오른 헤라클리우스는 공용어를 라틴어에서 그리스어로 바꾸기까지 하였고, 황제의 명칭도 그리스어로 변경하였다. 9세기 중반 그리스인들은 그리스에 대한 지배권을 되찾을 수 있게 된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여 1453년, 결국 오스만 제국의 침략에 의해 비잔티움 제국은 멸망하게 된다.

로마 제국의 남성민주주의

최초 로마 제국은 왕정 정치였다. 하지만 제국의 권력은 승리로 끝난 수많은 전쟁의 결과였고, 농부와 수공업자, 상인과 학자 같은 다양한 계층의 남성들이 전장에 나가 싸운 결과였다. 남성들은 이를 바탕으로 제국의 통치권을 요구했고, 왕을 폐위시키고 백성의 이름으로 통치하는 두 명의 남집정관을 선출했다. 로마의 남집정관은 항상 두 명이었으므로 서로를 견제해야 했고, 그 임기도 1년밖에 되지 않았으며 무슨 일을 하건 원로원에 보고할 의무가 있었다. 한 남성이 많은 권력을 갖지 못하는 제도를 만든 것이었다. 이렇듯 정치는 모든 남성의 것이었기에 로마 남성들은 자신의 국가를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 즉 '공공의 것'이라고 부르곤 했다. 남성 중심 로마 제국이 남성 중심 공화국이 된 것이다.
로마 제국의 정치는 포룸 로마눔Forum Ramanum이라는 제국의 중심 도시에서 진행되곤 했다. 왕궁의 닫힌 문 안에서 정치가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원로원에서 선출된 남성 의원들이 중요한 문제를 투표로 결정했던 것이다. 전쟁과 종전, 새 법의 가결이나 세금의 사용도 남성들의 표결을 거쳤다.

로마인들은 공화국이 되자 12표법을 공표하였다. 이 12표법은 모든 백성에게 동일한 효력을 미쳤지만, 모든 이에게 동일한 권리를 부여한 것은 아니었다. 가족의 최고 연장자인 남성 가장이 가족의 모든 것을 결정했으며, 여성은 일생 동안 아버지와 남편 혹은 남자 형제의 보호 감독을 받아야 했다. 그 이유에 대해 12표법은 친절한 설명을 곁들였다.[1]

여자는 경솔하기 때문에 성년이 되어서도 보호를 받아야 한다.

오스만 제국

오스만 제국이 그리스 세계를 지배하게 되면서 지식인들이 서유럽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평야 지대에서 살던 사람들이 산지로 숨어들어 정착하게 되는 두 유형의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그리스인들은 오스만 제국의 영향에도 자신들의 종교와 언어 등을 지키게 된다.

19세기까지 오스만 제국은 그리스를 지배하게 되는데, 그리스인들은 1821년 3월 25일 반란을 일으키고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1829년까지 독립을 이루지 못하게 되나, 19세기와 20세기 초에 그리스는 수차례 오스만과 싸우면서, 전쟁을 벌이게 된다. 또한, 1912년부터 1913년까지 벌인 발칸 전쟁으로 그리스는 마케도니아 지방의 남부와 크레타 섬, 에게 해 제도를 병합하게 되었고, 결국 현대의 영토를 1947년에 갖추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

제1차 세계대전에는 그리스는 삼국협상 편에 섰는데, 세계대전에서 승리하자 열강은 소아시아 일부 지역을 그리스에 넘겼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연합국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으나, 추축국에 의해 그리스 전투를 당하게 된다. 1941년 5월 20일 독일은 크레타 섬에 공수부대를 투입, 침공하였으나 심각한 손실로 인해 개시할 수 없게 된다. 1944년에서 1949년 사이에는 그리스 내전이 일어났는데, 그리스 공산당의 군사조직인 그리스 민주군과 정부군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다. 내전으로 당시 그리스의 정계는 양극단으로 달리게 되었고, 그리스는 미국과 동맹을 맺고 북대서양 조약기구, 즉 나토에 가입하게 된다.

근대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그리스는 급속도로 성장하게 된다. 초창기에는 마셜 계획으로 지원금과 차관을 받게 되었고, 점점 갈수록 관광업의 발달로 경제 성장이 이루어지게 된다. 1967년 그리스 군부가 정변을 일으켜 중도 우파 정부를 전복하고 그리스 군사 정권을 건립하였다. 그리스 군사 정권은 국민들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하여 경제 개발 정책을 선도하였으며, 이 기간동안 경제는 급속도로 성장하였고 대기업들이 생겨났으나, 민주주의는 후퇴하였다. 1974년 독재자 파파도풀로스는 미국에 대한 협조를 거부하였고, 미국은 파파도풀로스를 제거하기 위해 쿠데타를 사주한다. 이로 인해 같은 해 두 번째로 쿠데타가 일어나 요안니데스 대령이 새 정부 수반으로 임명된다. 요안니데스 대령은 민정이양을 선언하고 군부독재를 종식시켰다.

현대

1975년 국민투표로 콘스탄티노스 2세의 폐위가 확정되자, 민주 공화제 헌법이 들어섰다. 이전에 망명했던 정계의 거물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도 귀국하여 각각 범그리스 사회주의 운동과 신민주주의당을 창설하였는데, 이 두개의 정당은 양대 거대 정당으로 군림하며 거의 20년 가까이 그리스 정계를 이끌게 된다. 2008년에는 경찰이 소년 1명을 살해한 사건과 경기 불황, 실업률 증가 등이 겹쳐 그리스 폭동이 일어났다. 알렉시스 치프라스는 2015년 급진좌파연합을 여당으로 만들고 자신이 총리가 되었다. 그 뒤 그리스 경제 위기를 겪었으며 그리스는 EU의 긴축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2018년 중순 구제금융을 졸업하였으며 2019년 선거에서 신민주주의당이 승리하여 정권교대가 되었고 2020년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출처

  1. 1.0 1.1 1.2 1.3 케르스틴 뤼커; 우테 댄셸. 《처음 읽는 여성 세계사》. 번역 장혜경. 어크로스.  인용 오류: 잘못된 <ref> 태그; "01:"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