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오랑

최근 편집: 2022년 12월 27일 (화) 0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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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오랑은 대한민국 육군의 군인이다. 1979년 12.12 군사반란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비서실장이었다.

1974년 특수전사령부에 배치되었고, 3공수여단 중대장이 되었다.

12.12 군사반란

김충립 씨의 증언에 따르면, 김오랑 중령은 "(정병주 사령관에 대한) 체포조가 들이닥칠 것이라는 정보를 파악하고 권총의 실탄 장전 상태를 확인하는 등 진입에 대응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고 한다.[1]

정병주 사령관을 체포하러 온 것은 제3공수여단 15대대장 박종규 중령이었다. 김오랑 중령은 반란군과 총격전을 벌이다 실탄을 맞고 사망한다. 박종규는 김오랑 중령과 친하게 지내던 육사 선배였고 반란 얼마 전 부부동반 식사도 했다고 한다.

사망 이후

1980년 2월 김오랑 중령의 유해는 국립묘지에 안장된다.

김오랑 중령의 죽음 후, 배우자 백영옥 씨는 박종규를 만났고 그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박 중령)는 애써 감각 없는 얼굴을 짓고 앉았다. 여느 때 같으면 ‘제수씨’ 하며 반갑게 웃었을 그 얼굴이. ‘며칠 전까지만 해도 충성을 외쳤던 당신의 상관(정병주 특전사령관)에게 장교인 당신이 군화발질과 총을 쏠 수 있습니까?’ ‘당신과 같은 장교이며 후배인 김 소령 가슴에 당신의 총탄을 박을 수가 있습니까?’ 단지 그 두 마디의 말을 했을 뿐인데도 나는 이미 흥분된 상태였다. 끝까지 침착하게 사실을 확인받자고 수없이 다짐했지만, 막상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을 한 박 중령의 얼굴을 보자 도저히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박 중령은 나의 따지는 듯한 태도 때문인지 얼굴을 시뻘겋게 상기시키고 언성을 높여 대답하였다. 그의 말은 김 소령은 대세의 흐름을 모르고 반항했기 때문에 그 같은 변을 당한 것뿐이라는 것이다. ‘여자인 당신이 무엇을 알겠다고 나를 찾아다닙니까? 몹시 불쾌합니다.’ 그러면서 박 중령 자신도 ‘작전’ 때 엄지손가락을 다쳤다며 내 앞에 손가락을 들이밀었다. 엄지손가락이 너무 아프다는 표정도 지었다.[2]

많은 시간이 흐른 뒤, 박종규 중령(최종 계급 예비역 소장)은 <고 김오랑 추모사업회> 측에 용서를 구한다고 전화를 했다고 한다.[3]

2013년 국회는 무공훈장 추서 및 김오랑 중령 추모비 육사 내 건립 촉구 결의안을 의결하였다. 2014년 정부는 김오랑 중령에게 보국훈장 삼일장을 추서하기로 의결하였다.

출처

  1. 한기홍. 시사저널(2010. 8. 3.). 군사 반란, 죽음으로 저항했다. (http://www.sisapress.com/journal/article/129822)
  2. 백영옥씨 자서전(한겨레(2013. 5. 21. “내 남편 죽음까지 이르게 한 사람 자기는 총겨눈 손 다쳐 아프다 해”에서 재인용)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88474.html#csidxc05de3bf20e68c48b6a9dd5882b84fb)
  3. 김도균. 오마이뉴스(2009. 12. 12.). "김오랑 없었다면, 참담한 현대사 됐을 것"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8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