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통 줍는 할머니, 이주영 할머니(1993)

최근 편집: 2022년 12월 13일 (화) 10:30

“나는 한 것도 없고 배 운 것도 없는 사람이라서..."

이주영(왼쪽), 정만수(오른쪽)

방문을 하기 위해 전화를 했을 때 이렇게 말씀하시는 고 정만수* 할아버님의 미망 인 이주영 할머님댁을 찾아간 것은 일요일 오후 4시경이었 다. 나성에 있는 노인 아파트. 방 하나, 거실 하나로 된 할머니의 집은 할머니 한 분 이 사시는 집이라고는 믿어 지 지 않을 정도로 아기자기한 살림살이가 가득 차있었다. 소파 뒤에 있는 여섯 폭짜리 병풍과 소파 위에 놓여있는 수가 자잘하게 박힌 깨끗한 쿠션들 속에서 할머니의 깔끔 한 성격을 느낄 수 있었다. “방이 참 좋습니다! 했더니 “이제야 고생이 끝났는가 싶어. 나라에서 주는 돈으로 먹고살고, 이런적은 다시 없었 던 것 같아.. 할머니의 주름 진 눈가에 짧은 미소가 퍼진다.

쪼들리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할머니를 지탱시켜 주었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부러질지라도 절대로 휘어지지 않는 할아버지에 대한 굳은 신뢰였다.

이런 장학금, 들어보셧습니까?

한생을 민족을 위해 산 정만수, 이주영님의 뜻을 기리고, 동포사회와 타민족 사이에 이해를 돕고 협력하며, 동포사회에 민족교육을 정착시키고자 마련된 것입니다.

해외에서 우리 민족의 뿌리를 알고, 조국과 미국사회를 이해하며, 이웃과 함께 살기 위해 노력하는, 동포학생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많은 후원자들이 일년동안 깡통과 중고품을 모아 판매한 수익금으로 마련됩니다.

매년 동포 학생 2명을 선발하여 각각 천불씩의 장학금을 수여합니다.
정만수 · 이주영 장학금

지금 생활이 가장 여유있 다고 말할 정도로 할머니의 생활은 언제나 쪼들린 생활이 었다. “영감 열일곱, 나 열여 섯에 만났지. 영감이 남의 머 리를 깎아서 그나마 밥 술이 나 뜨게 됐지. 우리가 밥이나 먹고 사나 싶었던지 여기저기서 친척들이 몰려들기 시작 했어. 그래서 한때 우리 집에 스물 여넓 식구가 산 적도 있었어.. 그러나 할머니는 무엇보다 숨도 제대로 못 쉬던 식민지 상황 그리고 그 속에서 겪었던 할아버지의 고초가 가장 마음 아팠다고 하신다. 할아버지는 일제시대 야학을 세우고 민족의식을 갖고 있다 는 이유만으로 몇 년 씩 옥고를 치르셨던 것이다. 딸린 대식 구들,할아버지의 옥바라지,그리고 한 푼 두 푼 모아 산 땅 뙈기에 농사를 짓는 일로 할 머니의 작은 몸은 언제나 갈기 갈기 찢기는 것처럼 힘들었다고 하신다.

“하루는 너무 힘들어서 하 나님께 ‘나 정말 못 살겠는데 언제나 이 일이 끝 나겠습니 까?’하고 물었어. 그 날밤 꿈 을 꾸는데 하얀 옷을 입은 세 명의 농부가 소처럼 열심히 밭갈이를 하고 있는거야. ‘아! 이것이 주님의 뜻 인가보 다 싶어 그 다음날부터 나는 소처럼 일하는 밭갈이 농부가 되기로 했지.. 쪼들리고 어려 운 상황 속에서 할머니를 지 탱시켜 주었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부러질지라도 절대로 휘어지지 않는 할아버지에 대한 굳은 신뢰였다고 하신다."

해방 후에도 세상은 할아버 지의 진심을 여전히 몰라주었 고 그런 세상인심이 너무나 서러워 할머니는 목놓아 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하신다.

서울에 올라와 할아버지는 고려대학교에서 작은 이발관 을 운영하셨다. 여섯 식구가 방 한 칸에서 몸을 부비고 사 는 살림에서도 할아버지는 학생들의 머리를 깎아 모은 돈을 장학금으로 내놓으셨다. 그러나 당시는 박정희의 군부 독재 시절. 적색공포증에 걸 린 세상 사람들은 “저런 사람 이 무슨 돈이 있어서 장학금 올 내놓겠어? 분명 북한의 공 작금일 것”이라는 말 을했다. 결국 할아버지는 고려대학교 이발관에서 쫓겨나셨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어. 애국자는 모두 방안에 들어 앉 았고 매국노만 나와 설치는 시절이었지” 라고 할머니는 말씀하신다.

고려대학교에서 쫓겨나신 할아버지는 중앙대학교에서 일자리를 잡아 이발관을 운영 했고 거기서 나온 돈올 모아 작은 농장 하나를 사셨다.

“하루는 함석헌 옹이 애국자니까 그 농장을 주어야 한 다고 하지 않아. 그게 그때 돈으로 삼백만 원이었어. 애국자한테 주는 거니까 아까워 말라고 하면서... 옳은 일에 쓰는 거라니까 말 한마디 제 대로 못했지만 자식들이 자꾸 걸렸어. ‘저것들 공부 시키고 시집, 장가 보내야 할텐데’하는 생각에..."

1980년 아들의 초청으로 미국에 올 때까지 고개 고개 마 다 힘들게 넘어야 했던 조국에서의 생활이었지만 그렇게 산 것을 후회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올바른 것은 누가 뭐 라고 해도 올바른 것이고 그 른 것은 어떤 겉치장을 하여 도 그른 것이라는 믿음이 더욱 확고해 지셨다.

미국에서도 두 분은 여전히 올바른 일에 도움을 주려 고 노력하셨다. “우연한 기회 에 윤씨(윤한봉*)를 알게 되 었고 「민족학교」를 후원하게 되었다”고 하신다.

“윤씨를 만나기 이전부터 「국민회」에다 깡통을 모아 주었지. 나는 국내 있을 적부터 ‘애국자다’하면 그 집안부터 유심히 살피는데 어째... ? 나는 ‘애국자다’하면 모두 영 감처럼 그렇게 사는 줄 알았는데 여기서는 제 먹을 것만 챙기고 제 실속만 차리면서 말로만 애국자고 실천과 행동이 없어. 그래서 그런지 자꾸 만 깡통 갖다 주는 것이 아까 운 생각이 들었어. 그때 윤 씨를 만났지. 퀘이커 교회를 다니고 있을 땐데 윤씨가 거기를 왔어."

“윤선생님이 미더우시던가 요? “그럼 그랬지" 하시며 무릎을 탁 치신다.

“하루는 민족학교 에서 회의하는 것을 보았는데 ‘너 희들이 진짜 애국자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때 내가 유럽 여행 가려고 삼천 불짜리 계를 붓고 있었는데 ‘시집 장가도 안 간 사람들이 저리 고생을 하는데... ’하는 생각 이 들어서 영감한테 ‘유럽여행 안 가겠소!’ 했지. 그리고 그 돈을 r민족학교」 에 주었어. 그때 참 어려울 때였어. 쌀도 없어서 소영 민족학교 전 총무, 암소영남) 이가 집 에서 돈 타다가 쌀 사놓고, 「동서식품」 앞에서 기다렸다 가 버리는 배추 쪼가리 들고 와 김치 담고, 소금 뿌려 시래기국 끓여 먹을 때니까. 소 영이 참 고생했어. 지금도 「민족학교」 가면 쌀 있나 걱정스러워 나는 쌀 독부터 뒤진다니까.

“영감과 나는 새벽마다 쓰 레기통을 뒤져 깡통을 모았지. 어쩔땐 쓸만한 옷인데 그 냥 버려둔 것도 있었어. 그런 것들을 주워다 깨끗이 빨아서 재봉틀로 박고 손으로 기워서 중고품 판매에 내놓으라고 갖다줬어.."

‘애국자다’하면 모두 영감처럼 그렇게 사는 줄 알았는데 여기서는 제 먹을 것만 챙기고 제 실속만 차라면서 말로만 애국자고 실천과 행동이 없었다. 80년대 초 국내와 동포사회의 분위기로 보아 「민족학교」를 돕는다는 것은 쉬운 일 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활동했던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면 두 분의 생활모습 은 세상 사람들의 말에 오히려 초연했다 한다.

“「민족학교」가 한쪽에서는 이북간첩으로, 다른 한쪽에서 는 중앙정보부 첩자로 몰리던 시대였다. 자원봉사자들은 물론이었고,그들을 돕는 후원 자조차도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면키 어려웠다. 그때 두 분의 헌신적인 도움은 진정 귀한 것이었다”고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올해 초 「민족학교」 설립 10주년 기념식장에서 깡통과 중고품 판매 금을 모아 장학 생 두 명을 선정하여 각 천 불씩 장학금을 주기로 하고, 그 이름을 공개 모집 하였다. 거기서 고른 이름은 다름아닌 정만수•이주영 장학금.

두 분의 정신을 민족학교」 관련자들이 새로 온 사람 들에게 업에서 업으로 전하며 기억하고자 하는 마음이리라.

민족학교」가 정한 장학금 이름에 기쁘지 않냐고 넌즈시 물어 보았다. “장학금 이름을 정만수•이주영 장학금」으로 한다는데 마음이 좋지 않아. 한 것도 없는데. 그리 안했 음 좋겠어"

민족학교를 돕게 된 것 은 한 평생을 올바르고 도움이 필요한 곳을 외면하지 않고 살아온 두 분의 삶으로 보아 선 오히려 당연한 듯 싶다.

영감이 원체 생겨먹기를 그렇게 생겨 먹었어" “영감은 목사들도 말뿐이고 실천이 없다고 했지. 그래서 조용히 명상하는 퀘이커 교회가 성미에 맞았던 모양이야. 그런데 사정이 생겨서 퀘이커 교회를 못 나가게 되었어. 여기저기 큰 교회를 다니게 해보려고 하니까 ‘내가 왜 남의 다 먹 은 김치독에 빠지누?’하며 싫어해. 남이 소금, 고춧가루 다 섞어서 간 맞춰놓은 김치 독에 빠지면 자기자신은 하나도 없다는 뜻이었지. ‘그럼 당 신 민족학교」 좋아하니까 거기가서 모임 만드우’ 하니 그건 좋대. 그렇게 해서 「씨알의 모임」이라는 것을 갖게됐어.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일요일 아침마다 모여 노래도 부르고 돌아가며 책도 낭송했지. 첫 모임을 갖고 며칠 후 에 꿈을 꾸는데 하이얀 쌀이 내 앞에 수북하게 쌓였어. ‘하나님이 진정 기뻐하시는 자리가 이 자리구나!’ 하고 느꼈지"

여러 사람이 위험하다고 말리는 바람에 할머니는 이제 아첨마다 깡통 줍는 일은 그만 두었다고 하신다.

할아버님이 끝까지하고 가셨던 깡통줍기를 주위의 염려로 그만두신 할머님은, 이제는 아파트 쓰레기장에서 깡통을 계속 주으신다.

"4년전 동짓달 초엿새 새벽에 같이 깡통을 주우러 나가는데 중간쯤 가다가 그만 주저앉아. "못가겠수?" 하니 그렇대. "그럼 당신 들어 가우. 나 혼자라도 할테니!" 했어. 그때 영감은 직장암으로 항문을 떼어내고 옆구리에 변기통을 차고 다녔어. 그후 돌아가실 때까지 나는 넉 달동안 혼자 깡통을 모으러 다녔지. 영감은 그렇게 주저 앉더니 몇달 못 넘기더라고."

요즈음도 할머니는 아파트 쓰레기장에서 깡통을 계속 줍는다.

떠나오기 전, 할머니는 마침 선물 들어온 과일이 많다며 키위, 복숭아, 딸기 등을 싸 주셨다. "어머님 갖다드려" 하시면서.

우리는 오늘 한 어머님을 만났다. 그분은 일생동안 왜곡된 역사를 살아오신 모든 우리 어머님들이 그렇듯이 참으며 베푸는 강한 어머니로 살아왔다. 그러나 그것은 작은틀에서 못 벗어난채 남편 에게 무조건 순종하며 자식에 게 헌신하는 어머님의 모습만은 아니다. 세상과 역사에 부끄럽지 않기위해 작으나마 할 일을 찾으셨던 분, 그리고 그 일이 다른 이와 더불어 함께 살기위해 노력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분.

어쩌면 그래서 민족학교」 관련자들은 이주영 할머니를 ‘민족학교 어머니’라고 부르며 따르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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