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의 탄생

최근 편집: 2022년 12월 16일 (금) 04:24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는 1906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제퍼슨장로교회라는 이름으로 설립 된 미국 소재 최초의 한인 장로 교회이다. 1967년에서 1975년 사이 교회의 급격한 성장을 둘러싼 크고 작은 분란이 시작되고, 그 여파로 여러 계기를 거쳐 일부 교인들이 떠나 한인 남가주 교회나성 영락교회를 설립한다. 일부 교인들은 3대 목사였던 백리언 목사를 담임 목사로 다시 초빙하고자 했으나, 이를 둘러싼 찬반 의견 차이가 좀차 좁혀지지 않아 교회를 떠나 새로운 교회(현 평화의교회; 설립시 교회명 해람장로교회)를 세운다.

이민 교회의 역사적 맥락

하와이 이민

미국남북 전쟁을 전후하여 하와이사탕수수 산업은 그 중요성을 더 해가고, 이에 하와이의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농장주들은 이 산업을 확대하기 위해 처음에는 유럽에서 노동력을 수입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게 되자 아시아로 눈을 돌렸다. 그래서 제일 먼저 중국인 노동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1880년대 부터는 일본인 노동자들이 하와이로 오기 시작했다. 그후 하와이 농장주들은 조선 정부와 지속적인 접촉을 가졌고, 드디어 1902년 11월 고종이 노동 이민을 허락 한 것이 한인 이민의 첫 시작이었다.

하와이 농장주들은 조선의 항구 도시 거리마다 하와이의 풍물, 작업내용, 미국 달러로 임금을 지급한다는 포스터를 붙이고 노동자를 모집했다. 1개월에 16달러를 지급한다는 광고는 당시 대기근으로 가난과 기근에 시달리던 조선 노동자에게는 일확천금을 만들 수 있는 기회로 여겨졌다.

그리하여 최초로 121명이 인천항을 떠나, 1903년 1월 13일 개릭(Gaelic)호를 타고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하였다. 그 후 1905년 까지 65차에 걸쳐 7천명이 넘는 한국 노동자들이 하와이로 이주했다.

미국 최초의 한인 이민교회

(하와이 한인 상공회의소 편 ‘하와이 이민사’ 중에서 일부 발췌)

1903년 11월 10일, 하와이 오하우섬에서 미국 최초의 한인 이민교회가 탄생 했다. 현재 ‘그리스도 연합감리교회’의 효시인 ‘한인감리교선교회’(Korean Methodist Church)가 이날 첫 주일 예배를 드렸다. 교회 설립은 안정수 윤병구씨 등 항일운동의 구심점인 ‘신민회’ 설립자들이 주도했다. 하와이 감리교회 선교부 조지 피어슨(George L. Pearson) 목사도 선교회 조직에 힘을 보탰다.

교인들은 말할 것도 없이 처음 미국령을 밟은 사탕수수 한인 이민자들이다. 최초의 한인 이민단은 전부 121명이었다. 대부분이 인천 내리교회 신도들이었던 이들은 1902년 12월 22일 신천지를 향해 인천항을 떠난다. 당시는 한국에서 하와이로 직접 갈 수가 없어서 일본 고베항을 경유했다. 이곳에서 종합 신체검사를 실시하여 20명이 탈락하고 101명만이 고베항을 출발,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다시 신체검사를 실시하여 15명이 탈락하고, 최종적으로 86명만이 상륙 허가를 받아 이들이 최초 미국 이민단이 된다.

1903년 1월 13일 호놀룰루 항에 도착한 초기 사탕수수 이민자 중 절반 이상이 첫 예배에 참석했다. 이듬해에는 하와이에만 한인교회가 14개나 생겨났다. 당시 한인 교인 수는 402명. 그로부터 10년 후인 1914년에는 하와이 교회 수가 39개로 늘었고 교인 수는 2,800명에 이르렀다.

한편, 하와이에서 군사력을 키우며 일제로 부터 무력으로 독립을 계획하던 박용만 선생은, 미국 유학후 L.A.에 머물고 있던 이승만 박사를 하와이로 초청한다. 이후 이들은 동지회를 조직하여 한국의 독립 운동과 한국인의 교육, 문화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한다. 동지회는 미주 각 여러 지역에 지부를 설치 하였고, 이를 통해 상해 임시 정부를 재정적으로 도왔으며, 일제 식민의 부당함을 알리는데 노력 하였으며, 이승만 박사가 설립한 한인 기독학원을 지원하였다. 이러한 동지회의 활발한 활동은 우리의 선조 이민자들이 사탕수수밭에서 피땀을 흘려 모은 돈으로 이루어졌으며, 당시 이민자들은 오로지 조국의 독립과 2세의 교육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했다.

하와이 한인 노동자들의 미국 본토 유입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 70년사’ 중에서 일부 발췌)

하와이 이민역사가 시작된지 불과 5년후인 1910 대한인 국민회 인구조사를 보면 그동안 한국으로 돌아간 남자가 964명, 여자가 19명이고, 미국으로 이주한 남자가 1,999명, 여자가 12명, 사망자가 45명이니 하와이에 남아있는 동포의 수는 이민이 4,187명이고 하와이에서 출생한 아이들이 107명 이었다.특히 1905년과 1907년 사이에만 무려 1,003명의 노동자들이 하와이 사탕 재배 농장을 탈출 하여 캘리포니아로 유입됐다. 1907년 에는 무려 1,000명이 넘는 한국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탈출을 감행했다.

하와이 한인 이민자들이 사탕수수 농장을 떠나서 캘리포니아로 유입되게 된 주 원인으로는 고된 노동과 노예에 가까운 처우를 들 수 있다.

하지만 또다른 요인으로 지목할 수 있는 사실은 본래 하와이에 온 중국인 이민자나 일본 이민자들은 농부의 신분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국 이민자들의 직업적 배경은 매우 복잡한 것이었다.한국인 이민의 대부분은 도시의 일상 노동자들이었으며, 그밖에 구 한국 군인, 하급관리, 정치 망명자, 학생, 광부, 가정 사용인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와 같이 농민의 신분을 가진 사람이 극소수이고 도시적 직업을 가진 잡다한 사회적 배경의 사람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사탕농사와 같이 끈질긴 육체노동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적응하기가 무척 어려웠을 거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1907년 까지는 1,000명이, 1910년 까지는 2,000명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을 떠나서 미국 본토인 캘리포니아주로 유입되었다. 이렇게 미국 본토에 들어온 한국인들은 로스앤젤레스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정착하여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가기 시작했다.

미국 본토 한인 교회의 역사

하와이에서 첫 주일 예배가 열린 지 4개월만인 1904년 3월 11일 미국 본토에 최초의 한인교회인 ‘나성한인 감리교회’(현재의 LA연합감리교회)가 세워진다. 그 다음 해인 1905년에는 샌프란시스코에 ‘상항 한국인연합감리교회’가 설립됐고, 1906년에는 제퍼슨장로교회로 불리는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 1914년에는 오클랜드한인감리교회, 1919년 시카고한인감리교회, 1921년 뉴욕감리교회 순으로 세워졌다.

이 당시 한국은 1905년 11월 17일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강압에 의한 을사늑약 이라는 불평등 조약이 체결되면서 더욱 더 깊은 일제 식민지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의 탄생

1904년 3월 11일 미국 본토에 최초의 한인교회인 ‘나성한인 감리교회’(현재의 LA연합감리교회)가 세워진지 2년 후인 1906년 5월 10일 에는 미국 본토에 세워진 세번째 한인 교회이며 미국내 최초의 한인 장로교회인 제퍼슨장로교회(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가 로스앤젤레스에 세워진다.[1]

당시 한인들은 주로 1904년부터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이나 파인애플 농장에서 이탈하여 미국 본토로 유입된 사람들과 로스앤젤레스나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여러 지역에 살고 있던 교포들이었으며, 특히 하와이로부터 이민온 사람들 중에는 고국에서부터 기독교를 믿던 사람들이 있었으나 로스엔젤레스에는 아직 교포들이 모여 예배하는 곳이 없었다.

1906년초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방화중(고향은 평양이고 하와이를 거쳐서 미주로 건너왔다) 전도사가 로스엔젤레스에 머물던중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평양신학교 교장으로 있던 마포삼열(Samuel A. Moffett)목사가 그때 마침 안식년으로 귀국해 있다가 서로 만나게 되었다. 마포삼열 목사는 로스앤젤레스에 한인교포들을 위한 교회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장로교회를 세우기로 마음을 정한후 미 북장로교 나성노회(Presbytery of Los Angeles)에 뜻을 전달한다. 노회에서는 한인을 위한 교회 창립을 위해 프리챠드(Augustus B. Pritchard)목사로 하여금 교회를 조직하고 인도하도록 하였다.

방화중 전도사는 시내 벙커힐(Bunker Hill)에 사가를 얻어 프리챠드목사의 인도 하에 1906년 5월 10일 18명의 교인들이 모여 창립 예배를 드리면서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의 100년이 넘는 역사가 시작 된다.

창립 후 4년 뒤 한국에서는 1910년 8월 29일 발효된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사이에 이루어진 양국 합병조약이 체결된다. 이 조약은 대한민국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의 3대 한국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형식적인 회의를 거쳐 8월 22일에 체결되어 8월 29일로 공식 발표된다. 이로써 을사늑약 이후 실질적인 통치권을 잃었던 대한제국은 일본제국에 편입되어 암울한 일본 강점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창립 후 32년이 지난 1938년 5월 4일에 현재 위치인 1374 W Jefferson Blvd. Los Angeles, CA 90007로 이전하게 된다.

한인 담임목사와 당회구성

미국에 한인을 위한 최초의 장로교회가 창립 되었으나 노회에서는 아직도 장로도 없이 교회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한국인 장로교 미션(Korean Presbyterian Mission)으로 허락을 하여 모든 사무적 관할을 하게 되었다. 방화 중 전도사는 주일마다 설교를 담당하며 프리챠드목사를 도와 충실한 전도인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교회는 미 북장로 산하의 지역노회에 속하고 프리챠드목사의 지도하에 운영되어 왔으나 제반 활동은 한국인 전도사들의 희생적인 인도로 이어져 나갔다.

1926년에는 프리챠드목사의 사회하에 노회대표가 참관하는 가운데 세명의 장로와 세명의 집사를 선출하여 당회를 구성 하였으나 교회를 전담할 한인목사를 구하지는 못하였다. 이러하던 때에 1928년 로스엔젤레스의 콜리시엄에서 열린 세계 주일학교 대회(World Sunday School Convention)에서 한국교회의 대표단으로 입국한 20명중에는 4명의 목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때 이 대회의 환영준비위원으로 참석했던 교회의 임원들은 한국교회의 대표단으로 입국한 4명의 목사중에서 김중수목사를 교섭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김중수목사는 1928년 11월 4일 담임목사로 시무하면서 이 교회의 한인 담임목사 시대가 아래와 같이 이어 진다.

  • 1대 담임목사 김중수 1928.11.4~1936.8.1
  • 2대 담임목사 김성락 1937.2.16~1958.5.31
  • 3대 담임목사 권희상 1959.7.1~1967.12.1
  • 임시 담임목사 김형일 1968.3.1~1969.5.31
  • 4대 담임목사 백리언 1969.7.1~1972.6.18
  • 5대 담임목사 우상범 1972.9.19~1985

백리언 목사의 부임

나성연합장로교회의 3대 담임목사인 권희상 목사의 시무기간 중에 장로들이 1967년 1월 16일 ‘목사 사면 권고안’을 제출 하면서 담임목사와 장로들간에 갈등이 표면화 되기 시작한다.

갈등이 본격화 되자 노회는 교회 분규 해결을 위해 노회는 ‘행정위원회’(Administrative Commission)를 구성하여 중재 하려 노력 했지만 결국 권희상 목사를 1967년 12월 1일 부로 해직하고 다음 해 2월 1일부로 당회를 해산 시킨다. 그리고 노회에서 5인, 교회측 장로 2인 추가된 총 7명으로 구성된 새 행정위원회를 구성한다.

교회의 운영를 맡게 된 7인 행정위원회는 김형일 목사를 임시 담임목사로 1968년 3월 1일부터 시무하도록 한다. 7인의 행정위원회가 교회를 운영 한 후 교회가 안정되어지자 새 당회를 조직하기로 하고 1968년 5월 4일 7인의 장로 임직식을 가진다. 또한 안승화 장로를 위원장으로 한 청빙위원회를 구성하여 새 담임목사를 선정하는 일에 힘쓰게 된다.

마침내 서울에 있는 연세대 교목실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백리언 목사를 교섭하면서 백목사로부터 부임할 뜻이 있음을 전달 받는다. 백목사 위임투표를 위해 노회에서 나온 버레이목사의 사회로 1969년 2월 9일 공동의회를 소집 하였는데 투표결과 찬성 60표, 반대 10표, 기권 1표, 무효 1표로 위임목사 청빙 건이 가결 되었고 청빙이 가결된지 5개월이 지난 7월 1일부터 부임하게 되었다.

목회와 교육의 경험이 풍부한 백목사가 부임 하면서 교회는 모든 면에서 생동감 있고 희망적인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한 백목사는 우선 주일학교 교육을 강화 하기 의해 조직을 재정비 하면서 학생수가 매주 늘어났으며, 한국으로 부터 오는 이민자 수가 증가 하여 매 주일마다 새로온 교인의 소개가 끊임없이 이어졌고 교인수 증가에 대비해서 교회 기구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70년도 부터는 12인의 장로 가 당회원으로 시무 하였다. 또한 교회 규칙을 수정하여 1970년 2월 15일 공동회의에서 새로운 규칙을 통과 시켰다. 이 규칙은 미 연합 장로교 헌장과 함께 교회 운영의 기본적 법이 되었다. 그리고 과거 1938년도에 입당하여 사용 중인 건물이 증가하는 교인들을 수용하기에는 부족할 것 같아서 ‘교회 확장 헌금’을 모으기로 하여 $9,000의 헌금 약속을 받고 교인들의 정성을 교회 증축에 집중 시켰다.

당회의 분규와 백목사의 사임

백리언목사가 부임한지 1년 7개월이 넘은 1971년 2월 22일 당회에서 다수의 결정에 따라 “이제부터는 장로가 대 예배시에 기도와 광고를 하기로 하고 3월 첫 주일부터 실행하기로 한다”고 결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백목사는 이를 수용하고 더 이상의 충돌을 피했다.

그러던 중 그 해 6월 27일 백목사는 ‘교회 건물 확장 계획’이 부진한 가운데 있음을 알고 다음과 같은 제의를 하였다. “교인의 증가로 예배 장소가 문제가 되니 지금의 사교실을 없애고 긴 의자를 비치하여 예배당으로 하고 사교관계의 모임은 주일 학교실을 쓰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로부터 3개월 후 9월 19일 당회안에 구성된 ‘교회확장연구위원회’(위원장 오영균 장로)는 건축법상의 문제를 이유로 불가하다는 의견을 제시하면서 당회도 백목사의 제안을 부결시킨다.

당회의 부결에 실망한 백목사가 당회에 사표를 제출하자 장로들의 만류로 사표가 철회되지만 그 여파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당시 관여했던 문영조 장로의 인터뷰

이듬해 1972년 2월 5일에는 백목사가 제의한 ‘목사를 돕고 심방을 위한 부목사(임시)를 초빙 하는 일’이 예산상의 어려움 문제로 당회에서 부결된다. 이처럼 백목사가 소신을 가지고 목회하기 어려운 일들이 당회에서 일어나는 상황에서 3월 16일 ‘시무 사면서’를 당회에 제출했다. 이 소식이 바로 집사들에게 알려지면서 3월 18일 ‘집사회’는 이번 ‘시무 사면서’ 사태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의서를 회장 문영조, 서기 김희선 집사 이름으로 당회장에 제출한다.

“첫째, 당회는 백리언 목사의 사표에 관한 결정을 연기해 줄 것. 둘째, 사표수리 여부는 제직회나 공동의회에서 처리해 줄 것.”

이 같은 집사회의 결의서는 장로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였고 4월1일 당회에서는 백목사의 사표를 반려하게 만든다. 사표가 반려되면서 백목사도 “더 열심히 교회를 위하여 일하겠다”고 장로들에게 전하며 교회의 어려움을 해소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로 장로들의 사표와 당회 불출석 등의 파행이 시작되고 각종 교회 행사가 분규 이후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이 같은 과정을 바라보던 백목사는 1972년 6월 18일 주일 아침예배를 마친후 임시당회를 소집하고 ‘시무 사면서’를 노회에 제출하였음을 통보한다.

백목사가 사표를 제출하고 교회를 떠나자 교인들은 불안해 했고, 사면서를 접수한 노회의 목회 인사 위원회 (Ministerial Relations Committee)는 긴급회의를 열고 교회문제를 파악 하기 위해 휴브러(Kenneth L. Hubler)목사를 노회를 대표해서 파견하여 6월 29일 장로들과 연석회의를 열었다. 사태의 내용을 파악한 휴브러목사는 이 문제를 공동회의를 통하여 결정하기로 하였다. 그 당시 교인들은 이미 “장로들이 목사의 활동을 심하게 제약하였다”는 의견과 “백목사의 사임은 교회의 미래를 위해 잘 된 것이다” 라는 두가지 의견으로 갈라지고 있었다.

드디어 노회의 주관으로 진행된 7월 16일 공동회의에서 홰니엘(Leon E. Fanniel)목사는 백목사의 사표수리를 표결에 붙여 47대 46표 1표차로 사표를 수리 하였고 이화목, 노서환, 홍순건, 오영균 네장로의 사표를 일괄 접수하여 표결에 부친 결과 70 대 22표로 네 장로의 사표가 수리 되었다.

분규의 해결과 새 당회 구성

주일 초청목사들 중 우상범목사는 교회의 분규를 해결해 보기로 자청했다. 그래서 우목사는 우선 자신이 임시 목사로 부임 할것과, 둘째로 당회에 남은 장로들의 사표를 책임지고 받아 내기로, 셋째로는 당회 해산후에 새 당회를 구성 한다는 중재안을 제시하였고 이 제안은 1972년 9월 19일 노회의 승인을 받게 된다.

노회의 결정에 따라 우목사는 임시 목사로 시무하게 되고 당회가 해산된 후 새 당회를 다시 세워야 했다. 그래서 1973년 1월 21일 노회의 모리슨 목사의 사회로 인사위원회 7인이 배석한 가운데 새 당회를 구성하기 위한 공동회의를 열었다. 장로 추천 위원으로는 7명이 선출되었는데 인사 추천 위원회가 11명의 장로 후보를 추천 하는 과정에서 이화목 장로는 후보들 중 문영조와 차경수 집사를 후보군에서 제외해 달라고 요구 했지만 받아 들여지지는 않았다. 이화목 장로는 마지막으로 문영조 집사만은 장로 후보에서 제외해 줄것을 재차 요청 했으나 이 또한 거절되고 다수의 투표 결과를 따르도록 하였다. 투표 결과 김치은, 김희선, 로스 백, 문영조, 안정옥, 유진형, 이대수, 조규환, 조석현, 차경수, 최옥엽등 11명이 장로 후보로 선정 되었다. 2월 11일 장로 6인을 선출하기 위한 공동회의를 개최 하였다. 이날 173명의 회원이 참가한 가운데 3차 까지 가는 투표결과 김치은, 문영조, 안정옥, 이대수, 조규환, 차경수 6명이 장로로 선출 되었는데 1차 투표에서 김치은, 문영조, 이대수, 차경수 4명이 당선되자 이화목 장로가 일어나서 퇴장하고 이어서 20여명이 퇴장 하였다. 2월 25일 오전에 취임식을 하고 오후에는 당회장 그린리(Max E. Greenlee)목사의 사회로 새 당회 첫 모임을 가졌다. 이후 노회에서 새 당회장으로 베어드(John S. Baird)목사를 임명 하였으며 새 당회를 구성한 이후 교회는 화평을 되찾고 각 부서의 활동도 활발하게 회복 되어 갔다.

교인의 이탈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 70년사’ 중에서 일부 발췌)

새 당회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투표 결과에 불만을 가졌던 장로들과 교인들이 교회를 이탈하여 한달이 채 못되서 일부는 한인 남가주 교회(이화목, 박리근, 한소제, 오영균, 조명섭, 이향근, 김희선, 유진형, 유의영, 김세담)를, 그리고 또 다른 일부 교인들은 나성 영락교회(백보경, 조석현, 이광혁, 강윤만, 홍순건, 노서환)를 시작한다. 한편 1973년 4월 1일 공동회의에서 김치은 장로를 위원장으로 하고, 강영옥, 공성린, 이대수, 문영조, 정문섭, 명재휘, 김종근, 박종갑, 민원식 등 모두 10명으로 “목사 청빙 위원회”를 구성 하기로 가결 하였다.

이후 일년이 넘게 담임목사 청빙 문제를 토의 하던중 사임후 서울 종암교회에서 시무하던 백리언 목사가 미국에 다시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교회는 다시 술렁이기 시작한다. 마침내 백목사가 1974년 7월 1일 로스엔젤레스에 도착 하였고 당시 임시목사로 재직중인 우상범 목사는 7월 7일 설교를 부탁 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 담임목사 청빙위원회 내에서 현재 임시목사인 우목사가 위기의 교회를 안정시킨 공로가 있으니 담임목사로 적합하다는 의견과 백목사를 다시 담임으로 세우자는 의견이 대립되기 시작했다.

이 같은 의견 대립으로 목사 청빙 문제가 지연되자 백리언목사는 1975년 1월 5일 첫 주일 오후 2시에 창립예배를 드린다고 통보해 온다. 당시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 교인들 중 약 10가정이 해람장로교회로 합류 하고 얼마 후 얼마 후 장로 2명과 집사 2명이 추가로 해람장로교회로 합류한다.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