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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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나혜석 Edit this on Wikidata
1920년대 촬영한 가족 사진에서 나혜석의 확대 사진.
출생1896년 4월 18일
조선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신풍동
사망1948년 12월 10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동 서울시립자혜원 무연고자 병동) 現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신풍동)
국적대한민국 Edit this on Wikidata
별칭아명(兒名)은 나아지(羅兒只), 나명순(羅明順)
아호(雅號)는 정월(晶月)
학력매향중학교 (수료) 진명여자고등학교 日 여자미술대학 유화과 전문 (졸업)
직업서양화가
판화가
교육자
조각가
소설가
시인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
언론인
종교불교 Edit this on Wikidata
가족최시의 (母), 나기정 (父), 김나열 (딸), 김선, 김진, 김건 (아들), 나경석 (동복 오빠), 나계석 (이복 언니), 나지석 (동복 여동생), 나영완 (할아버지), 나기형 (큰아버지), 나영균 (친정 조카딸), 전민제 (친정 조카사위) 김재민, 김성민, 김황민 손자, 나문희 (친정 조카손녀), 정승호 (친정 재종손서)
정보 수정
여성은 심한 취급을 당하고 있다. 여성을 저능하게 만들어놓고 그 저능을 비난하고 무지를 경시하며 그 지식을 조롱하고 있다. 연애에 있어서는 창녀 취급을 당하고 부부의 애정에 있어서는 하녀 취급을 받는다. 더구나 정조라는 멍에로 여성을 속박해놓으려고 하고 있다. 이것이 남성이다.


나혜석은 대한민국 여성으로 최초 서양화가, 소설가, 작가, 시인, 조각가이다. 페미니스트, 독립운동가, 사회운동가, 여성해방운동가, 언론인이다. 자유연애론을 펼쳐 남자들에게 혐오를 받으며 평가절하 당한 시대를 앞선 인물이다. 김명순, 허정숙, 이광수, 김일엽과 함께 자유연애론을 펼쳤다. 당대 남성들에게 후려치기를 당해 평가절하된 비운의 인물이다. 많은 활동을 펼쳤으나, 당대의 사람들에게 연애 스캔들로만 주목받고 평가를 당했다.

생애

경기도 수원에서 나기정(羅基貞)과 최시의(崔是議)의 5남매 중 넷째 딸로 태어났다. 1910년 6월에 수원 삼일여학교에 입학하여 8월에 졸업하고, 9월에 진명여학교에 편입하였다. 1913년에 진명여고를 최우등으로 졸업하여, 신문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1913년에 먼저 일본에 유학한 오빠의 주선으로, 도쿄사립 여자미술학교 서양화부에 입학하고 유화를 공부하였다.

일본 유학 시절 여자유학생 학우회 기관지인 『여자계』 발행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조혼을 강요하는 아버지에 맞서 여성도 인간임을 주장하는 단편소설 「경희」를 발표했다.

1914년 12월에 '현모양처는 이상을 정할 것도, 반드시 가져야할 바도 아니다.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하여 부덕(婦德)을 장려 한 것이다.'란 내용의 글을 기고하다가 여성해방론을 접하고 여성해방운동가로 활동하였다.

1918년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정신여학교 미술교사로 일하다가, 건강을 이유로 1918년 8월에 사직하였다.

1919년 3.1운동에 여성들의 참여를 조직하는 활동을 하였다. 이화학당 기숙사에서 박인덕, 황애시덕, 김마리아, 김하느론, 신체르뇨 등 11명과 함께 여학생 3.1운동의 참여를 의논하고, 개성과 평양 등지에서 자금모금활동과 만세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 또한 논의하였다.

1919년 2월 8일에는 도쿄로 건너가 2·8 독립 선언에 참석하고, 다시 귀국하여 3월 5일에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3월 8일에 이화학당의 식당에서 체포되었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5개월 정도 옥고를 치렀고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유학 시절 약혼자였던 시인 최승구가 죽은 후, 1917년부터 알게된 김우영이 나혜석의 변호를 맡은 것을 계기로 1920년에 결혼하였다. 나혜석이 김우영에게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오.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케 하여 주시오'란 조건을 내걸고, 1920년 4월 1일부터 4월 10일까지 결혼식 청첩을 신문에 연일 광고하여 화제가 되었다.

1921년에는 서울에서 개인 전시회를 했다.

1921년에 김우영이 일본의 외교관인 만주 안동 부영사가 되자 외교관의 부인이란 직함을 이용하여 다른 독립운동가들의 밀입국을 도왔다.

안동에서 살면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 화가로서 한계를 느끼고 1927년에 유럽과 미국 시찰을 가게 된 김우영을 따라 여행길에 올라 조선 최초로 구미 여행에 오른 여성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최린과의 염문을 이유로 당시 외도중이었던 김우영과 1930년 11월에 이혼하였다.

이후 나혜석은 제국미술전람회에 입선하고 여자미술학사를 차리는 등으로 독립적인 생활을 꿈꾸었다. 하지만 가족이나 친지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오빠의 경제적 지원이 끊기고 사회로부터 비난과 조소를 들으면서, 아이들을 보지 못하는 고통으로 나혜석은 심신이 병들어갔다. 1935년에 경제적, 정신적 괴로움을 잊기 위해 수덕사에서 불공을 드리며 자신을 찾아온 학생들에게 유화를 가르쳤다. 불교를 이유로 1937년 신사참배령을 거절하였다.

1940년창씨개명령을 거부하고 조선총독부의 감시를 받으며 방랑생활을 하였다. 1944년 10월에 경성 인왕산의 청운 양로원에 들어갔으나 1945년파킨슨병이 악화되면서 정신이상이 심하다는 이유로 퇴소하고 보육원과 병원, 산사를 오가다가 1948년 11월에 서울의 시립 자제원 병동에 무연고자로 입원하였다.

1948년 12월 10일에 나혜석이 병동에서 세상을 떠나고, 1949년3월 14일에 무연고자 시신 공고가 실리고서야 신원이 밝혀져, 나혜석의 죽음이 알려졌다.

작품

미술

나혜석은 69편의 저작과 캔버스의 유채작품을 통해서 신여성의 모델로 주목받았으며, 작품 속에 여성해방과 민족해방의 메시지와 시대변혁을 추구하는 메시지를 담았다. 유화작품을 전시, 판매하면서 전업화가로 활동하였다. 1923년 서양화 그룹 고려미술회의 창립멤버.

소설

1918년에 발표한 소설 경희는 국내 첫 페미니즘 문학으로 평가받는다.

수필 및 사상

1930년 6월에 실험결혼론을 주장하는 기고문을 올렸다. 결혼은 두 남녀의 만남으로, 두 사람의 일생에 부모가 일일이 정해주는 것은 잘못이고, 집안이 관여하는 것은 지극히 잘못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정략결혼은 결혼하는 두 남녀를 도구나, 물건 처럼 보는 잘못된 것이며, 결혼을 거래로 만드는 잘못된 풍조라고 비판하였다.

유럽여행기 구미유기 등을 통하여 영국 참정권 운동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1934년에는 이혼 고백서를 기고하였다. 약혼과 결혼, 이혼에 이르렀던 과정과 최린과의 관계에 대하여 기록하면서, 불평등한 남녀관계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하였다. (이혼고백장 전문: [1])

1935년에는 정조 취미론을 발표하여, 자신의 아내, 어머니, 누이, 딸에게는 순결함을 요구하면서 다른 사람의 아내나 어머니, 누이, 딸에게는 성욕을 품는 한국 남자들의 위선적인 행동에 대한 비판과 자유 연애론을 주장하였다. 당사자들의 의견이 존중되지 않고 집안의 뜻에 따라 결혼하는 것에 대한 비판, 가정폭력을 일삼는 남성들에 대한 비판 등으로 화제가 되었다. 다음을 참고할 것 독점연애 정상성

페미니즘 행보

나혜석은 자신이 내딛는 한 걸음이 조선 여성 전체의 진보라는 점을 늘 의식할 수밖에 없었던 신여성의 대표 인물로서, 조선미술전람회에 거듭 입선한 화가일 뿐만 아니라 자의식적인 여성적 글쓰기를 펼친 작가이기도 했다. 특히, 페미니즘과 최초의 여성작가라는 주제의 두 측면으로 나혜석 문학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져 왔다.

나혜석은 근대 사회로의 길목에 선 조선 사회에서 시대를 너무 앞선 나머지 자식들에게는 나쁜 여자로 기억되고 사회에서는 잊힌 인물이 되어버렸다. 나혜석의 예술가적 영혼이 너무나 자유분방하고 의식도 너무나 첨단에 있어 고루한 인습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이다. 그의 말마따나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신생활에 들면서」)”되었던 터이다.

그의 부활은 1970년대 이후부터로, 대한민국의 여성해방인식이 대중적 확산을 이루면서 가능해졌다. 나혜석은 이제 화가, 작가, 민족주의자, 여성해방론자로서 근대기를 대표하는 여성 작가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특히, 주제적 측면에서 페미니즘이라는 계몽 의식에 투철한 작품을 썼고, 그 의식의 첨단성은 오늘날에도 새로움을 느낄 만큼 혁명적이어서 한국의 대표적인 페미니즘 작가로서 조명되고 있다. 나혜석의 페미니즘적 사상은 저서 "이혼고백서"에 가장 잘 드러나 있다. 나혜석의 페미니즘 사상을 이혼고백서 전후로 나눠 전기 페미니즘을 자유주의적인 것으로, 후기 페미니즘을 급진적인 것으로 평가하기도 한다.[1]

강요된 모성 신화 해체

한편, 자신의 임신, 출산, 육아 경험을 솔직하게 토로하면서 “자식은 모체의 살점을 떼어 가는 악마”라고 규정한 「모된 감상기(母된 感想記)」는 여성 고유의 경험을 처음으로 여성의 시각을 통해 공론화시킨 것으로 사회적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모성 신화를 정면으로 부정하며, 모성이라는 것은 날 때부터 여성이 지니는 것이 아니라 기르는 동안 가지게 되는 정이라고 규정한다. 그는 여성으로서의 고유한 경험을 바탕으로 남존여비나 모성성 신비화 등에 관해 단호히 거부할 수 있었다. 이 글을 통해 그는 여성들의 고충을 앞장서서 말하며 그들과 연대하고자 하는 선각자 역할을 하였다.

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솟아오르는 정이라고들 한다. 러면 아들이나 딸이나 평등으로 사랑할 것이다. 어찌하여 한 부모의 자식에게 대하여 출생시부터 사랑의 차별이 생기고 조선이 생기고 요구가 생길까. 아들이니 귀엽고 딸이니 천하며, 자보다 남자를, 약자보다 강자를, 패자보다 우자를- 이런 절대적 타산이 생기는 것이 웬일인가. (중략) 그들은 절대효를 요구하여 보은하라 명령한다. (중략) 세인들은 항용, 모친의 애라는 것은 처음부터 모된 자 마음 속에 구비하여 있는 것같이 말하나 나는 도무지 그렇게 생각이 들지 않는다. (중략) 즉 경험과 시간을 경하여야만 있는 듯싶다.

사 남매 아이들아.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에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이었더니라.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3

나혜석의 연애

나혜석은 최승구와 자유연애를 하며 약혼까지 한 사이였으나, 불행하게 최승구는 폣병으로 죽고 만다. 이 때에 나혜석은 다시 연애를 하지 않을 결심을 한다. 하지만 나혜석을 좋아한 김우영이 10년에 가까운 구애를 한 끝에 나혜석은 마음을 연다. 김우영은 나혜석과 결혼할 적에 전처와의 사이에 아이가 있었다. 나혜석은 김우영과 결혼할 적에 세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고 한다.

  1. 지금 사랑하는 것처럼 평생 자신을 사랑할 것.
  2. 시부모 봉양과 아이들 돌보기를 요구하지 말 것.
  3. 자신의 화가 생활을 방해하지 말 것.

특히 2번은 당시 시대상으로 보았을 때 아주 파격적인 조건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김우영과 결혼할 적에 신혼 여행 대신 김우영의 돈으로 최승구의 무덤에 비석을 세워 세간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나혜석은 이후 조선 총독에서 제공하는 유럽 여행의 일환으로 파리에 놀러갔다가 최린을 만나게 된다. 최린과 연애를 하면서 언론의 물음에 최린과 연애를 한 것이 맞다고 응답을 하지만, 최린은 자신은 그런 적이 없다며 발을 빼 버린다. 이후 "이혼고백서"에서 나혜석은 이런 최린의 태도를 비난하기도 했다.

당시 외도중이었던 김우영은 나혜석의 간통죄를 빌미로 이혼을 요구하였고, 이혼 4개월만에 새로운 여자와 재혼한다.

이광수와도 만난 적이 있다는 소문이 무성하지만, 그 증거는 없다. 아마 만나지 않았을 확률이 더 높을 것이다.

갤러리

출처

  1. 송명희, 나혜석의 급진적 페미니즘과 개방결혼 모티프, 인문학연구, Vol.94 No.- [2014], 충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77-209(33쪽)
  2. “日警에 쫓겼어도 유머 잃지않던 아버지”. 2004년 9월 6일.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