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최근 편집: 2023년 4월 20일 (목)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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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勞動者)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받은 임금으로 살아가는 직업인. 임금근로자·임금노동자·근로자·피용자·피고용인.[1]

노동자는 일을 통해 상품이나 용역을 생산하는 사람으로 노동력을 제공받는 쪽을 사용자라고 하는 점에서 대등한 개념으로 지칭된다.[2] 사용자에게 고용되어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임금이나 급료 등의 수입을 얻어 생활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근로자라 말하기도 한다. 고용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피용자(被用者), 피고용인(被雇用人)이라고 하며, 임금을 받고 노동한다는 의미에서 임금노동자 또는 임노동자라고도 한다. 타인에게 고용되지 않은 채 자신의 사업수단을 갖고 일하면서 소득을 얻어 생활하는 사람을 비임금노동자라 정의하여 노동자의 개념을 경제적 활동을 수행하는 취업자 전체로 확대하여 일컫는 경우도 있다.[1]

근로자와 노동자 차이

‘근로자'의 정의는 육체노동이나 정신노동의 대가로 받는 소득으로 생활하는 사람이며, ‘노동자'의 정의는 노동력을 제공한 대가로 임금을 받아 생활을 유지하는 사람이다. 주로 근로자는 사무실에서 일하며 안정적인 급여를 받는 ‘화이트 칼라’로, 노동자는 일용직을 전전하며 불안정하고 가난한 삶을 살아가는 ‘블루 칼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근로자’는 인위적인 개념이다. 본래 세계적으로 ‘노동자’가 통용되고 있었지만, 한국의 경우 정부의 주도하에 ‘노동절’이 ‘근로자의 날’로 바뀌며 ‘노동자’또한 ‘근로자’로 대체되어졌다.

20세기 노동자는 시위와 집회의 상징이었다. 자본가들에게 열악한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산업혁명이 일어난 유럽을 중심으로 점차 노동자의 권리가 강화되었다. 연대감으로 뭉친 집회가 만들어낸 경제 민주화였다.

하지만 한국은 노동자의 기본적인 안전조차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다. 명시되어있는 노동권은 ‘효율의 극대화’앞에서 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 ‘효율의 극대화’는 주로 노동자의 희생을 강요한다. 일부 기업은 제대로 된 안전 설비를 노동자에게 제공하지 않으며, 노동자는 다치더라도 후폭풍을 염려하여 산재처리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열악한 노동 환경은 과거부터 지속되었다. 노동계의 반발이 꾸준히 있었지만, 국제노동조합총연맹(ITUC)가 ‘세계노동권리지수’를 조사한 이래로 계속해서 세계 최하위권인 5등급을 유지하는 상황에서 개선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국제노동조합총연맹은 한국이 5등급인 결정적인 요인으로 ‘표현과 집회의 자유가 전혀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뽑았다. 집회 신고제지만 사실상 허가제의 방식으로 운영되며, 언론은 ‘귀족노조’라며 비난한다. 공권력은 함부로 집회 지도자와 참가자를 연행하고, 다른 대중들 또한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짓이라며 폄하한다. 집회 참가는 곧 구속과 비난의 두려움이 된다.

하지만 모두 노동자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노동자들이 서로 연대하여 정당한 권리를 떳떳하게 요구해야하며, 다른 노동자들의 권리가 침해되는 것을 묵인하면 안 된다. 이것이 실현될 때 진정으로 노동이 존중되며 ‘노동권’이 보장될 수 있을 것이다.[3]

노동자에 대해 적대적인 한국 사회

한국사회는 노동자를 '비용'이라는 이름으로 대체하기도 한다. 노동을 비용으로 환산하는 것임금을 손실로 계산한다는 뜻이다. 손실을 줄이려면 노동자를 없애야 한다. 여기에는 보이지 않게 ‘박멸의 논리’가 작동한다. ‘비용을 최소화하라’는 작업지시는 ‘해고하라’ ‘임금을 삭감하라’는 말이지만, 존재를 숫자로 환원하는 순간 그 지시를 이행하며 비용을 계산하는 작업자들에게 부정적 감정을 불러일으킬 양심의 장벽을 효과적으로 제거할 수 있다. 경제화된 파시즘은 이토록 합리적으로 재현된다. ‘경영 효율화’라는 이름으로 투자자에게 돌아갈 이익을 최대화하고 노동자에게 들어가는 비용을 최소화하는 작업은 아우슈비츠의 설계자들이 효율적 운영을 목표로 수용소와 가스실을 설계하는 방식과 다를 바 없다.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직접 살인을 저지르지 않더라도 자신의 행위로 인해 누군가의 죽음을 초래하거나 그가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구하기 위한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런 행위를 유죄로 판결한다. 그러나 개인에겐 마땅히 유죄가 되는 일이, 수많은 노동자를 치명적 상태에 빠트리고 때로는 죽음까지 몰고 가더라도 법인(기업)이 자행하면 무죄가 된다.

이만큼 노동자에 적대적인 사상이 출현한 적은 인류 역사는 물론이고 자본주의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자본주의 초기 단계에서는 노동자 모집이 자본과 국가의 중요한 프로젝트였다. 발전 단계에서도 국가는 노동자를 ‘산업 역군’이라 치켜세우며 근면, 성실, 사명감, 직업의식 같은 노동자의 미덕을 창조하고 교육하며 공장에 조달했다. ‘자원 없는 나라에 사람이 자원’이라는 말속에도 인재(엘리트) 양성과 함께 노동자 양성의 목표가 나란히 들어있었다. 그러나 금융자본주의 시대의 기업은 더 이상 노동자를 ‘산업 역군’으로서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늘날 기업은 기술을 연마하고 경험을 쌓아 높은 숙련도를 가지고 좋은 물건을 만드는 장인적 노동자들을 원하지 않는다. 반대로 작업 과정을 단순 반복적 형태로 만들고, 라인을 교체하며 노동자들이 동료 관계와 숙련을 쌓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알고리즘인공지능의 보조자로 만들며, 초단기 노동과 미세노동의 현장을 수없이 전전하도록 만든다. 이것은 노동자의 힘을 빼앗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우리가 사는 세계를 위험에 빠트린다.

와해된 노동자 계급

세계화와 금융화 이후, 노동자들은 자본-노동 관계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수단들을 계속 빼앗겼다. 과거 노동자는 생산자이자 소비자로서의 이중 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착취의 대상이자 판매의 대상인 노동자들은 경제성장을 위한 생산과 소비 확대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였기 때문에 그 지위를 역으로 이용해 자본에 대한 협상력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런 협상력을 토대로 전후 30년간 서구 사회에서 ‘성장을 통한 분배’라는 합의 위에서 작동했던 노사합의 정치는 성장이 정체되기 시작한 순간 신자유주의의 공격을 받으면서 와해됐다. 이후에 전개된 신자유주의 노동체제는 내부적으로는 ‘쉬운 해고’를 통해, 외부적으로는 합법화된 ‘노동자 수입’과 역외 투자 및 생산지 다변화로 손쉬운 ‘국외 고용’을 통해, 노동자를 훨씬 수월하게 공급할 수 있도록 노동시장을 유연화했다. 이와 같이 변화된 조건들은 자본엔 날개를 달아줬지만 노동자들의 손발은 잘라버렸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어떤 정치세력도 노동자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트럼프로 상징되는 우파 포퓰리즘은 노동자를 치켜세우며 하층 노동자 계급으로부터 지지를 이끌어내고 있지만 그들이 강조하는 노동자란 ‘미국의 백인 남성 노동자’이며, 성차별인종주의, 애국주의, 배외주의 선동에 기대고 있다. 리버럴 정치 세력도 별반 다르지 않다. 비록 노골적인 적대나 혐오의 시선은 아니라 해도, 선량한 사람들이 노동자를 희생자, 피해자로 바라보며 동정하는 시선은 노동자를 쉽게 타자화, 대상화하고 열등한 존재로 만들며 은밀하게 패배시킨다. ‘노동 존중’이란 말이 바로 그런 시선을 담은 말이다. 그것은 노동자를 평등한 관계가 아니라 존중해줄 대상으로 바라보게 만들고, 인정이 아니라 배려를 요청하며, 해방자가 아니라 취약자로 취급한다. 정치에서 노동자 문제는 빈민 문제처럼 구제 대상으로 바라보거나 해결 불가능한 골치 아픈 사회적 문제로 취급된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가 팽배한 가운데 노동자 계급만이 자본주의를 끝낼 역사의 주체라고 말하기는 점점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 이유는 ‘노동자 계급’의 형상을 산업 자본주의 시대의 대공장 임노동자에서만 찾기 때문은 아닐까.

감춰진 노동자들

임노동자로 협소하게 좁혀 사용하는 노동자 개념은 임노동 체계 바깥으로 밀려나 버린 노동자와, 돌봄 노동이나 분해 노동처럼 오래전부터 생산체제 밖에서 임금 없는 노동을 수행해온 수많은 비공식 노동자로부터 노동자란 이름을 지워버린다. 그러나 오늘날 노동자임이 부정된 많은 노동자는 ‘노동자’라는 이름을 얻기 위해 싸운다. ‘노동자성’을 인정받기 위한 투쟁을 어떤 이들은 ‘착취당할 법적 지위’를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비하하기도 한다. 우버 노동자나 화물 노동자들의 사례에서 보듯이 ‘노동자성’을 인정받기 위한 투쟁은 지난 세기 노동운동이 만들어낸 노동자 권리를 되찾고 확장하기 위한 중요한 권리 투쟁의 성격을 갖고 있다. 나아가 이것은 싸울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내는 싸움이자 계급의 와해와 소멸에 대항하고 노동자 계급을 재구성하는 싸움이기도 하다. 노동자의 이름을 다시 붙이는 작업은 그런 점에서 주체를 구성하는 중요한 시작점이다.

낸시 프레이저는 최근《좌파의 길-식인 자본주의에 반대한다》[4]에서 착취와 수탈의 개념을 구분하는 작업을 통해 자본의 축적에서 수탈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 논의를 확장해보면, 그동안 숨겨졌거나 배제됐던 노동자, 즉 여성, 농민, 원주민, 그 외 비공식 노동자들과 권리 없는 노동자들을 ‘수탈당하는 노동자’의 이름으로 불러낼 수 있다. 임금으로 노동의 몫을 가로채는 것이 ‘착취’라면, 대가라는 형식도 없이 무상으로 전유하는 것이 ‘수탈’이다. 공장의 노동자들이 착취당한다면, 집안의 노동자와 자연의 노동자는 수탈당한다. 자본은 전자의 노동에 대해서는 임노동 관계로 흡수해 관리·통제하지만, 후자의 노동은 임노동 체제 외부로 밀어내고 방치하며 비가시화한다. 착취 체제는 수탈 체제 없이 지탱될 수 없다. 남성 노동자들의 저임금은 여성과 자연의 무상노동 위에서 성립한다. 여성과 자연, 식민지에 대한 수탈로 나타났던 초기의 수탈 양식은 자본의 시초 축적 단계에서 끝난 것이 아니고, 덜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도 아니다. 오히려 고도로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더 크게 수탈에 의존한다. ‘고용 없는 성장’을 대표하는 금융과 IT산업이 부채와 비공식 노동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은 후기 자본주의로 갈수록 수탈이 점점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입증한다.[5]

출처

  1. 1.0 1.1 “노동자(勞動者)”. 2023년 4월 2일에 확인함. 
  2. 강효백 (2015년 4월 30일). “[시론]‘근로자’를 ‘노동자’로 바로잡아야”. 《경향신문》. 
  3. “홈>사회>사회이야기 > ‘근로자’와 ‘노동자’, 당신은 무엇입니까? | 웹진 MOO”. 2023년 4월 2일에 확인함. 
  4. “좌파의 길 : 네이버 도서”. 2023년 4월 2일에 확인함. 
  5. “참세상 :: 노동자”. 2023년 4월 2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