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신령)

최근 편집: 2020년 11월 18일 (수) 16:00

조선의 제6대 임금. 비극적인 죽음과 관련하여 무속에서 섬기는 신(神)이기도 하다.


8세에 왕세손으로 봉해져서, 문종이 훙(薨)한 뒤에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지만 1453년 10월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자 창덕궁에 거처한다. 성삼문(成三問, 1418~1456), 박팽년(朴彭年, 1417~1456) 등이 단종의 복위를 기도하다가 실패한 사건을 계기로 단종은 군(君)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된다. 유배 중에 또 다른 숙부인 금성대군(錦城大君)이 그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자 이에 연루되어 17세의 나이로 사사(賜死) 당한다.[1]

비극적인 삶과 유배

정변(政變)에 희생된 비운의 왕이라는 평가만이 남아 역사의 표면에서 사라졌으나 단종(1441~1457)은 역사의 이면에서 다시 부활하여 살아 숨쉬는 신령으로 존재하고 있다. 단종의 유배지이자 또한 죽음의 장소이기도 한 영월 일대의 지역민들은 그를 마을신이나 무신(巫神)으로 모시고 있다.


단종이 신령으로 좌정하게 된 것은 그의 비극적인 삶과 죽음에 토대한다. 그는 왕의 신분으로서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비극적인 생애를 살았기 때문에 그의 삶과 죽음을 함께 아파했던 당대의 사람들이나 후대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었다. 비록 그의 육신은 죽었지만 그의 억울하고 외로운 영혼은 그의 죽음을 아파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부활하였다. 생물학적으로는 소멸되었지만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는 살아 있는 것이다. 단종의 비극적인 삶은 양위(讓位)로부터 비롯되지만 일반 백성들이 그의 현실을 피부로 느끼고 아파하는 계기는 그의 유배생활에서 비롯되었다. 단종이 신격화되는 것은 그의 유배 길과 유배생활에서 잘 드러난다. 유배 자체가 신격화에 직접 영향을 주지는 않았으나 영월에서의 유배생활은 단종과 지역민을 하나로 결속시키는 중요한 기제로 기능하였고, 다른 지역보다 단종을 가까이에서 체험한 영월 지역민들에게 있어서 단종은 그들의 마음 속 깊이 간직될 수 있었다.


한양으로부터 영월에 이르는 유배 길에는 도처에 단종과 관련한 전설과 유적이 남아 있다. 비록 기록되지는 않은 역사이지만 주민들의 기억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의 첫 출발지인 서울의 광진구 화양동에 있는 화양정(華陽亭)에는 그가 유배 길에 오르는 것을 보았다는 전설이 깃든 수령 600년의 느티나무가 있다. 이 나무를 필두로 영월에 이르기까지 곳곳에는 단종의 유배와 관련한 전설과 지명이 전한다.

출처

  1. “단종”. 《한국민속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