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셸리

최근 편집: 2023년 1월 24일 (화) 14:29
Reginald Easton이 그린 메리 셸리. 1857년.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셸리(영어: Mary Wollstonecraft Shelley, 1797년 8월 30일 ~ 1851년 2월 1일)은 영국의 소설가, 여행작가이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으로 유명하다.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영상.

생애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셸리는 유명 작가이자 페미니스트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둘째 딸로 1797년 8월 30일 태어났다.[1] 울스턴크래프트는 메리를 출산하고 11일 뒤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했지만 역시 작가였던 아버지 윌리엄 고드윈의 영향으로 교육적인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다.[2] 아버지는 메리의 이른 학교 교육을 감독하고 트위크넘에 있는 Pope's Grotto, 연극 팬터마임, 친구들과의 저녁식사 등 다양한 곳으로 소풍을 갔다.[1] 그러나 메리는 곧 새어머니와의 좋지 않은 관계로 인해 이후 어린 시절 집에서 편안함을 느끼지는 못했다.[2] 메리는 집안일을 요구받았고 편지 등의 사생활을 침해 받고 독서를 보장받지 못했다.[1]

메리는 양자매 제인이 기숙학교로 보내진 것에 비해 정식 교육을 받지 못했다.[1] 그래서 집안의 책들로 공부를 했고, 집을 찾아온 고드윈의 손님들과 함께 정치, 철학, 과학, 문학에 대해 얘기했다.[1]

1808년 출판된 메리 셸리의 시 표지.

메리가 어렸을 때 가장 좋아했던 취미는 이야기를 쓰는 것이었다.[1] 1808년 첫 시인 Mounseer Nongtongpaw가 아버지의 회사를 통해 출판됐다.

메리 셸리는 17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제자 퍼시 비시 셸리와 사랑에 빠져 함께 프랑스로 떠났다.[주 1] 이후 퍼시와 결혼하였으나 결혼 생활이 순탄하지 않았다. 메리는 이탈리아 등 외국을 떠돌며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렸으며, 다섯 명의 아이를 가졌으나 아들 하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산하거나 어린 나이에 잃었다.

피렌체에 있던 1820년 4월 발퍼가를 쓰기 시작했고 그 해 가을 피사에서도 여전히 작업을 하고 있었다.[1]

1822년에 남편이 보트를 타다가 폭풍을 만나 사망하고, 이듬해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다. 메리는 남편의 유고 시집을 출간하고 하나 남은 아들을 키우며 전업 작가의 삶을 살았다.[3]

1824년 2월 메리는 최후의 인간을 쓰기 시작했다.[1]

1840년 Richard Rothwell이 그린 초상화.

1828년부터 1839년까지 The Keepsake를 위해 12개 이상의 이야기를 쓰면서 바쁘게 지냈다.[1] 1831년에는 프랑켄슈타인의 개정판이 출판되었다.[1]

1844년 7월에 두 권의 책으로 된 Rambles in Germany and Italy을 출간했으나 이 책이 메리의 마지막 책이 되었다.[4]

1848년 뇌종양의 첫 증상인 것으로 보이는 통증을 호소했다. 메리는 오른쪽 다리의 감각을 잃고 언어 장애가 생기기 시작한 1850년에야 진단을 받았다.[1]

1851년 2월 1일 세상을 떠났다.[5][1]

메리 셸리와 작품에 대한 해석

메리 셸리는 유럽의 여러 국가를 여행한 경험을 바탕으로 여러 편의 여행기를 출간했으며, 여러 유명한 소설을 남겼다. 『프랑켄슈타인』은 과학기술이 야기하는 사회, 윤리적 문제를 다룬 최초의 소설이다. 메리 셸리는 19살이던 1818년에 스위스 제네베 근처에서 지내며 19살일 때 놀라운 상상력으로 작품을 탄생시켰다. 남편을 잃은 뒤 그녀는 재혼하지 않고 활발한 창작 활동을 이어 나갔다. 1823년에는 역사 소설 『발퍼가(Valperga)』가 출간되고, 1826년에는 과학 소설 『마지막 사람(The last Man)』이 출간된다. 이후에도 역사 소설 『퍼킨 워벡의 행운(The Fortunes of Perkin Warbeck)』(1830), 자전적 소설 『로도어(Lodore)』(1835), 마지막 소설 『포크너(Falkner)』(1837)가 차례로 출간된다.

그녀는 어린 시절 안락한 가정을 꿈꿨으나 원하는 가정을 이루지 못했고 결혼 생활은 죽음으로 얼룩졌다. 19세기 영국의 전통적인 여성상을 중시하면서도 거기서 만족하지 못하는 자신에 불안감을 느꼈다.[2] 메리가 쓴 작품들에는 기괴하고 음울한 사람들이 나오는데 <프랑켄슈타인>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최후의 인간>에서는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씩 죽여 나가며 이것은 남성지배의 상황에서 고통받는 여성이 뿜어내는 분노로 읽을 수도 있다.[6]

성차별

메리 셸리가 젊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은 프랑켄슈타인이 셸리의 아버지가 쓴 작품이라고 여겼다. 이에 셸리는 영리하게도 소설을 아버지에게 헌정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셸리의 남편이 대신 써주었다고도 여겼다.

같이 보기

부연 설명

  1. 당시 퍼시 비시 셸리는 이미 결혼한 상태였는데, 그의 전 부인 해리엇 셸리는 2년 뒤인 1816년 이를 비관하여 자살한다.

출처

  1. 1.00 1.01 1.02 1.03 1.04 1.05 1.06 1.07 1.08 1.09 1.10 1.11 “Mary Wollstonecraft Shelley”. 《Andreas Teuber》. 
  2. 2.0 2.1 2.2 메리 셀리 (18 June 2012). 《프랑켄슈타인 (세계문학전집 094)》. 문학동네. ISBN 978-89-546-1838-0. 
  3. 3.0 3.1 안세영 (2018년 7월 3일). “피처 | [ODD NOTE] 메리 셸리, 괴물을 만든 십 대 소녀 [No.177]”. 《더뮤지컬》. 2019년 12월 24일에 확인함. 
  4. “Mary Wollstonecraft Shelley”. 《Poetry Foundation》. 2019년 12월 24일에 확인함. 
  5. “메리 셸리”. 《민음사 출판 그룹》. 
  6. “[인문학데이트]⑫고정갑희”. 《한겨레》. 2000년 8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