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한인 사회의 정치적 각성

최근 편집: 2023년 6월 16일 (금) 13:07

1990년도에 들어서면서 한인동포들의 시민참여는 적극성이나 발전의 측면에서 유례없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한인동포는 그들의 역할을 자기 만족적인 방관자에서 참여자와 투자자로 바꾸어 나갔다.

한인동포들은 그들 자신의 다양한 신분들을 통하여 정치적으로 참여하는 시민의 임계질량을 구축하여 이민자들의 권리의 쟁점들을 조직화하였고 전국 차원에서 한인동포의 한 목소리를 이루어 내는데 성공하였다.

1995 KTE 동서남북: 반 이민물결

한인동포 사회내에서의 정치적 변화는 이민자 관련법의 제정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고, 더욱이 한인동포 사회가 사용한 정치적인 과정들은 미국적 디아스포라하에서 변화하는 인구통계와 민족적 다양성, 그리고 이민사회의 다양성등과 관련된 사회적 변화의 조직화에 관한 새로운 개념의 발전에 기여했다.

이 논문은 한인동포의 조직화의 성공을 연대기적으로 정리함으로서 미국에서 우리 이민 역사의 풍부하고 역동적인 시기에 대해 문서화 하고자 한다.

저자

본 문서의 원 저자 이은숙은 시카고한인교육문화마당집의 창립 이사이자 2005년 기준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의 사무국장이다. 논문 기재 정보는 다음과 같다:

Lee, Eun Sook. 2005. The Political Awakening of Korean Americans In Koreans in the Windy City: 100 Years of Korean Americans in the Chicago Area. Pp. 337-350. Hyock Chun, Kwang Chung Kim and Shin Kim, eds. New Haven, CT: East Rock Institute for the Centennial Publication Committee of Chicago.

민족학교가 현재 CC BY-SA 라이센스로 배포 중이다.

재미 동포의 정치적 자각

1990년대 재미 동포의 시민적 참여는 활동과 성장에 있어서 전례 없는 단계에 다다랐다. 재미 동포 공동체는 방관자에서 참여자이자 이해당사자로 자신의 역할을 변화시켰다. 재미 동포들은 자기 내부의 다양한 구성원으로부터 정치 활동에 참여하는 비판적 시민 대중을 구성했고, 이들은 이민자 권리 의제를 조직, 전국적 수준에서 재미 동포의 발언권을 확립하는데 성공했다. 재미 동포 공동체 내 정치 단체로의 변화는 이민 관련 입법에 상당히 영향을 미쳤고, 나아가 재미 동포 공동체가 이용한 정치적 과정은 변화하는 인구 통계 그리고 미국적 디아스포라 안의 민족 및 이민 공동체들의 다양성과 관련된 사회적 변화의 조직화에 관한 새로운 개념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재미 동포의 조직화가 이룬 성공을 연대순으로 기록함으로써, 이 논문은 미국에서 우리 이민사의 풍성하고 역동적인 기간을 입증한다.

재미 동포 공동체 내 정치적 정체성과 정치 단체의 최근 발전에 있어서 정치적 기폭제는 1992년 LA 사태와 1994년 반 이민자 정책이었다. 이 사건들은 재미 동포들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취약함을 겨냥했고, 이민자 권리 의제에 관한 재미 동포들의 엄청난 교육과 조직화로 이어졌다. 10년 동안 재미 동포들은 유권자 교육, 등록, 동원, 연구와 권리 지지를 포함하는 정치 및 선거 과정에 참여하기 위한 자원과 능력의 전략적 할당량을 동원했다.

재미 동포 공동체의 정치화 시기, 말하자면 ‘극적인 시작’은, 다수의 고령 이민자들의 정치적 성숙에 적절히 반영된다. 고령 시민들은 취약한 상태로부터 강화, 정체성 및 사회 변화의 주체로 바뀌었다. 반 이민자 정책들로부터 직접적으로 상처받았던 우리 공동체의 구성 연장자는 이 문제에 선명성과 긴급성을 제공했다. 기본적인 생존에 필수적인 것으로부터 배제된 채 한인 연장자들은 발언하기 시작하여 가장 잘 알고 헌신적인 공동체 구성원이자 조직가가 되었다.

한인 연장자들의 참여와 함께 재미 동포의 민권 운동은 대중 운동에서 자주 실종되는 세대간 관점을 독보적으로 체득해왔다. 미 전역의 다른 도시들에서, 그리고 시카고한인교육문화마당집(KRCC) 재미 동포, 청년, 자원 봉사자 및 실무자는 한인 연장자들과 함께 일하면서 한인 연장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의원들에게 써서 알리는 것을 돕고, 한인 연장자들의 입장과 요구 공식 영어 문서로 옮겼으며, 시위하는 동안 한인 연장자들과 나란히 서서 행진하였다. 재미 동포 이민자들의 청년 세대와 연장자 세대는 함께 정치적 과정에 대해서 배웠고, 미국의 정치 지형에 의미심장한 각인을 남기고 재미 동포에 대한 미국 일반 대중의 인식을 바꾸었다. 나는 이 변화하는 과정의 일부에 속했던 나 자신을 행운아로 여긴다.

나는 시민적 참여를 “공동체(지역사회) 문제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정의한다. ‘평균적인’ 미국 시민들(미국에서 태어났고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백인)에게 시민적 참여는 쉽고, 태생적으로 주어진 권리이다. 이 용어와 행동의 형태는 자원이 없고 기회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사회적 소수 계층이 어떻게 이를 인식하고 활동으로 연결시키느냐에 따라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재미 동포는 이러한 윤곽에 부합하는, 많은 공동체들 중 하나이다. 재미 동포들의 사회 참여는 평균적인 미국 시민이 관여하게 되는 시민적 참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경험되고, 접근되며 이해되는 권리이다.

재미 동포 지역사회

2000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미국에는 107만 명의 재미 동포가 있고, 시카고 및 외곽 지역에는 4만 명의 재미 동포가 있다. 이 수치는 다른 출처들에 따르면 상당히 높게 추산된다. 한국 외교통상부는, 예를 들자면, 미 전역에 210만 명, 시카고 및 외곽 지역에 가장 밀집하여 거주하는 중서부에는 50만 명이 있다고 열거한다. 대다수 재미동포 중 75% 이상은 1980년 대 미국에 이민 온 신규 이민자이다. 또한 재미동포 인구 수의 18% 서류미비이민자(소위 말하는 불법체류자)이다. 재미동포 인구 50%가 시민권자이고, 78%는 제한적으로 영어를 구사하거나 아예 영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재미 동포가 경제적으로 성공해왔다는 폭넓은 믿음이 있으나, 많은 재미동포들은 빈곤과 사회적 차별의 벽속에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 이들 다수는 하루 14시간 노동, 주7일 노동과 같은 열악한 노동 현실 속에서 살아가며 그들의 건강을 해치고 있다.

이 자료는 재미 동포에 관한 윤곽을 요약하고, 정치적 장으로부터 그들이 소외된 이유와 조건을 나타낸다. 슬프게도 근대 대중문화는 재미 동포들이 자기중심적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들을 일반적으로 양산해왔고, 사회적 관심이나 건강한 공동체를 건설하는데 기여한 점 보다 경제적 성공과 교육적 성취에 집중 했다.

나는 유학생이든 여행자든 또는 영주권자든 상관없이 1965년 이후 미국으로 온 재미 동포들 중 다수는 미국에 계속 머무르기를 희망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들 대부분은 자녀의 더 높은 교육비를 대기 위해 한국에 가서 돈을 버는 것과 상대적으로 편한 한국의 은퇴 생활을 생각 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재정상의 안정성이나 자기 자녀의 학문적 성공을 보장하고자 하는 이러한 욕구 보다 재미 동포들은 고국의 정치적, 경제적 불안정 때문에 미국에 정착하여 영구 이민자로 살아가겠다는 결정을 했다(이런 결정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는 한국근대사에 영향을 미친 일제 식민강점기(1905~1945), 남북 분단(1945), 한국 전쟁(1950~1953)을 포함하고, 남한의 경우 연속적인 군사 독재와 경찰국가를 포함한다.) 많은 재미 동포들은 해방 및 통일, 그리고/또는 남한의 민주화 이후에 귀국할 꿈을 간직하며 미국에서의 일시적인 망명이라 생각하고 살았다. 어린 시골 소녀가 노동하기 위해 강제로 도시로 이주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재미 동포들은 가난하고 나라를 떠나 부유한 선진국인 미국으로 이주 했다. 이들 재미 동포들은 가족 및 살던 고향을 떠나는 슬픔을 느끼며 색과 향기와 감촉이 다른 해외 세계에 들어섰다.

태평양 건너로의 이주를 결정 했던 원래의 주된 요인들과 상관없이 재미 동포들은 학업(유학)과 노동 때문에 해를 넘겨서 머무르는 자신을 발견했다. 재미 동포들은 결혼하고 가족을 부양하기 시작했으며, 해가 넘어감에 따라 귀국을 상상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었다. 동시에 언어 장벽, 사회적 접촉의 결여와 미국의 정치적 과정에 익숙하지 않은 것과 같은 장애물들은 많은 재미 동포들이 시민적 참여를 적극적으로, 또 역동적으로 행하는 것을 방해 했다. 많은 이민자들은 조용히 잊혀진 채 살기를 희망해왔을 수도 있다. 삶은 분리되어 몸은 미국에 있고 심장과 마음은 한국에 있었다.

변화를 위한 기폭제

두 주요 사건들이 재미 동포들의 시민적 참여를 형성하고 그것에 기여했는데, 이는 1992년 LA 사태와 1994년 반 이민 물결이었다. LA시에 대한 재정적, 정치적, 사회적 파괴를 넘어 전자의 사건은 한국과 한국적 디아스포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전 미국 사회 및 재미 동포 지역 사회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LA 사태는 근대 재미 동포 역사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사건으로, 대다수 재미 동포들이 정치적 힘이 없다는 점을 자각하게 되었다. 공격은 양 측면으로 번졌다. 재미 동포들은 지역사회에 공헌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지킬’ 뿐 동화되고자 노력하지 않는 이민자로서 비추어 질 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 보호나 정치적 배려를 정당화 할 영향력이나 의미 또한 갖지 않았다. LA 사태는 미국 사회에서 재미 동포들이 처한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숙고하도록 하였다. 질문들이 재미 동포 공동체 내부에서 쏟아져 나왔다. 우리는 사랑하는 고국으로 돌아가거나 고국에서 은퇴할 수 있을 때를 계획하는, 아니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에서 소외 된, 또는 일시적인 거주자로 인식되도록 남겨질 것인가? 또는 우리는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는데 참여 해야 하는가?

1992년은 고립된 채 남아 있는 것은 무책임하고 정치적으로 불안하며 위험하다는 점을 재미 동포들에게 깨우쳐 주었다. 기존의 조직 활동 변화 및 정책 변동과 함께 이러한 깨달음에 대한 구체적 모습은 시카고의 시카고한인교육문화마당집(KRCC)과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NAKASEC)의 조직 창립으로 이어 진다. 단체들은 새로운 시민 참여 활동과 정치적 역량 개발, 인종 차별과 민권 문제 접목, 그리고 새로운 정체성 확립을 위해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런 조직적 변화들은 당시 우리들이 1994년부터 자주 불렀던 노래 제목, "이 땅에 살기 위하여," 에 가장 잘 설명되어 진다.

1994년 미연방 선거 직후 공화당이 이끄는 의회는 반 이민자 정책안이 전국을 뒤 흔들게 했다. 이민자들은 실업, 범죄, 복지에서부터 미국 사회 구조의 붕괴에까지 이르는, 많은 사회 문제의 이유, 그리고 비난 받는 희생양이 되었다. 대표적 반이민 정책안을 보면, 저소득층 생활 보조금(SSI)과 식료품 구매권에 비시민자 영주권 이민자의 자격 조건 박탈, 이들 대부분의 해당자는 저소득층 은퇴 이민 연장자 및 극빈 가정 이민 아동 이었다. 당시 미국 내 이민자 지역 사회 내에서는 불안정, 충격과 공포의 분위기가 압도하고 있었다. 재미 동포 연장자들은 특별히 지원과 해법을 찾고 있었다. 심지어 유일한 생활 수단에 없어진다고 생각한 연장자들은 자살까지 고려 했었다.

1990년 65세 이하 재미 동포의 1.1%가 공공 사회 보장 (아시아 태평양계 미국인 중 차하위)프로그램 수혜자였지만, 65세 이상 재미 동포의 44.2%가 공공 사회보장 지원에 의존했다. 1996년 기준 저소득층 생활 보조금 한인 연장자 수혜자는 24,000 여명이 넘었다.

제안된 법안의 통과는 합법 연장자 이민자의 기본 생활 수단을 없애는 것이고, 재미 동포들을 불안정한 경체 상태에 남겨 두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다수의 연장자는 자녀들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게될 상황에 처해졌다. 그러나 이러한 반이민 법안으로 가장 영향을 받게 될 이민 연장자는 영어 문제 때문에 여러 다양한 법안 및 법안 심의 과정을 이해 하는 데 큰 한계가 있었다.

시카고한인교육문화마당집에 관하여

시카고한인교육문화마당집은 1995년 공식적으로 창립했고,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NAKASEC, 로스앤젤레스의 민족학교는 당시 미주 내 타 지역의 동포단체들과 협력하여 NAKASEC 전국 단체를 결성 함)는 1994년 설립되었다. 두 조직 모두 민권에 관한 진보적인 재미 동포의 목소리를 대변한다는 유사한 목적을 공유했다. 이 목적은 원대했다. 그 당시 정치적 상황 속에서, 이민자 권리는 유기적으로 우리 행동의 중심으로 나타났다.

시카고에 있는 기존의 재미 동포 조직 및 단체들과 비교하자면, 시카고한인교육문화마당집은 그 구성 때문에 독특했는데, 조직 발기인의 대다수는 젊은(10대에서부터 20대 후반까지), 최근 이민자이자 영어가 능숙하지 않는, 비전문의, 고등 교육 학위가 없는 자들이었다. 게다가 여성은 지도부의 일부였다. 다르게 말하자면, 시카고한인교육문화마당집과 그 발족 위원회나 실무진 또는 자원봉사자는 시카고 재미 동포 지역사회의 축소판 내에서 최소한의 경제적, 사회적, 또는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시카고한인교육문화마당집은 또한 그 목표와 철학, 집행 구조에 있어서 독특했다. 우리는 사회/복지 봉사, 교육, 문화를 조직화와 지역 사회 정치적 강화와 연결을 추구했는데, 왜냐하면 모든 구성요소들이 전체론적인 접근으로 이어져 개인과 공동체의 삶을 개선되어야 한다는 것을 믿었다. 게다가 우리는 구체적 사회적 변화는 국제적인 정치적 시각을 가지고 접근 해야 한다는 것을 믿고 실천 했다.

오늘날 시카고한인교육문화마당집은 젊은 재미 동포의 행동이 번식하는 토양으로서 인식된다. 이 성장 과정에서 중요한 지원은 1983년 설립된 전국 정치 회원 조직인 재미한국청년연합(YKU) 이었다. 한국에서 민주주의 운동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한국적 디아스포라를 배경으로 조직된 정치 단체가 미국에서 출생하게 되었다. 이는 미국으로 망명한 활동가 (윤한봉)와 유학생 그리고 이민자 청년들이 힘을 모아 미국에서 진보 청년 운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재미한국청년연합의 목표는 미국과 한국 양국 모두에서 인권, 민주주의, 정의를 도모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 군사 독재에 반대하는 활동 및 미국의 일방적인 외교 정책에 대한 비판 적인 시각으로 인해, 재미한국청년연합은 한국 국가보안부 및 한국 정부 대표하는 영사관의 공작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직면 했다.

1992년에 앞서 시카고의 재미 동포 조직은 주로 사회 복지 봉사와 제한된 권익 활동을 했다. 따라서 재미 동포들이 반 이민 정책에 대응 할 정치적 지도력을 찾고 있을 때, 기존의 재미 동포 조직들은 이 필요를 인식하는데 부적절 했거나 할 수 있는 역량이 부족 했다. 동포사회 내에서는 재미한국청년연합이라는 조직된 운동 단체가 있었지만 한국 정부의 공작으로 인한 대중지지 기반이 약했기 때문에 새로운 동포사회 운동세력 조직이 필요 했다. 이에 재미한국청년연합은 시카고한인교육문화마당집의 설립과 조직 활동, 그리고 대중 교육에 큰 지원을 쏟았다. 동시에 재미한국청년연합은 미국의 대외 정책 및 한반도 평화를 위한 캠페인에 힘을 쏟았다.

추가적으로 재미한국청년연합은 자신의 정치적 관점과 지식을 한인 이민자의 경험 내에서 관련지었고, 조직화 모델과 방법, 사회경제적 사상과 철학, 그리고 한국과 세계 역사의 비판적인 재평가에 있어서 시카고한인교육문화마당집 자원봉사자들에게 종합적인 훈련과 학습 기간을 제공했다. 행동(행동)과 사고가 일상생활의 통합된 부분들이라는 관념은 학습 기간 동안 주입되었고 실천을 통해서 강조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살아가는 한인 이민자로서의 존재 의의와 방향을 획득하고자 사적, 정치적, 문화적 정체성을 교육하는 것의 중요성이 도모되었다. 상호 존중과 공동 목표의 강력한 연합을 두 조직들이 유지하는 동안, 시카고한인교육문화마당집이 미 국내 정체에 집중 하고, 재미한국청년연합이 국제적, 한반도의 사안들을 담당하는 전략적 역할 분담이 있게 된다..

이민자 권리 조직화

시카고 재미 동포들이 참여한 최초의 거대 캠페인은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와 시카고한인교육문화마당집이 공동으로 주최한 “이민자들를 위한 정의”, 1995년 여름 워싱턴 포스트 전면 광고 캠페인이었다. 원래의 목표는 반 이민 법안에 대항하는 전면 광고를 미 주류 언론 신문에 게재 하기 위해 $25,000달러를 모금하는 것이었다. 캠페인은 재미 동포가 복지와 이민 정책들을 이해하고, 여성, 노동,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같은 다양한 소수민족 지역 사회와 연대하며, 이민자의 권리를 지원하는 단결된 목소리를 전국적으로 조직하고, 입법 변화에 대한 이민자 지역사회와 미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것 이었다. 또한 당시 로스앤젤레스, 샌호세 북가주, 시카고, 필라델피아, 뉴욕 등의 각 지역 센타를 조직하여 이민자 권익 옹호 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계기가 되었다. 워싱턴 포스트는 전술적으로 선택되었는데 왜냐하면 $25,000달러가 뉴욕 타임즈 광고 가격의 절반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워싱턴 포스트는 워싱턴 디씨를 배경으로 미 연방의원과 정책 제안자들이 읽는 주요 신문이었다.

KTE 이민자를 위한 정의 워싱턴 포스트 광고 캠페인

6주 내에 우리는 우리의 목표를 뛰어넘어 300개의 조직들과 수천 명의 개인들로부터 $55,000달러 이상을 모금했다. 캠페인에 $1,000달러를 지원했던 소수 조직들을 제외하면, 각각의 개인들이 평균 1달러를 후원하여 대부분의 $50,000 달러는 일반 대중들로부터 모금한 액수 였다.

시카고의 경우에서 10,000달러를 모금하는데 성공하고 96개의 지역 단체들로부터 공개적인 지지를 확보하는 것을 넘어 캠페인은 다양한 이민자 지역사회가 한 목소리로 연대하게 되었다. 캠페인 제안이 처음 소개되었을 때, 시카고의 이민자 권리 주류 단체들은 침체돼 있었고, 텃세를 부리기도 하였으며, 캠페인이 구체적인 정책적 변화로 이어질 것인지에 관한 회의를 공개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이 주류 조직들은 참여하지 않거나 캠페인 한참 뒤에나 참여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민자 단체들에 기초한 이민자 지역사회는 신문 광고 캠페인이라는 새로운 전술에호기심을 보였을 뿐 아니라 이 캠페인을 시기적절하고 의미 있는 것으로 판단 했다.. 이들은 반 이민자 정서가 미 전역으로 퍼져가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재미 동포 지역 사회와 저소득층 연장자들은 사회 복지 혜택이 폐지 되는 것을 두려워 했고, 젊은 이민 청년들은 학비 보조 혜택이 이민 신분으로 인해 박탈 당하게 되는 것에 대해 절망 했고, 임산부는 의료 서비스로부터 배제될 것을 두려워했고, 그리고 대 다수의 유색인종 이민자들은 차별과 혐오 범죄의 대상이 될 것을 두려워 했던 상황이었다.

캠페인을 알리는 기자회견이 Erie Neighborhood House에서 열렸고, 폴란드계 미국인, 중국계 미국인, 라티노 미국인, 한국계 미국인, 그리고 여성 공동체 대표자들이 기자회견에 연사로 초대 되어 입장을 발표 했다. 발표문은 5개 언어로 만들어졌고, 소수 민족 언론 매체는 광범위한 언론 홍보를 이루어 냈다. 지역 폴란드계 신문은 이 캠페인에 대한 광고를 전면으로 두 장 실었고, 폴란드계 이민자들로부터 5달러, 10달러, 15달러 수표를 모금, 시카고한인교육문화마당집 앞으로 보내도록 하였다. Polish Daily News로부터 기자들은 자신의 소장품을 수집하였고, 기부 행사를 열었다. 라티노 이민자를 위한 이중언어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캠페인 설명을 하고 각 학생들로부터 모은 후원금을 캠페인 사무실로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시카고한인교육문화마당집의 젊은 자원봉사자들은 지역의 슈퍼마켓 앞에 마켓 홍보를 통해 1인 1불 ($1) 가두 모금을 매일 같이 펼쳤다. 또한 지역 교회와 절을 방문하여 회원들을 교육 하고 각 개인들로부터 후원금을 모금 하기도 했다.

최종적으로 모금된 기금은 두 번의 전면 신문 광고를 게재 하게 하였다, 1994년 6월과 9월 두 번 전면 광고 게재 됨. 이 광고들은 지역 및 전국적 정치인 방문 및 압력 넣는 권익 옹호 활동에 주요한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다. 전국적으로 존경받는 전국이민포럽 단체는 전국 로비 행사에 이 신문 광고를 복사하여 배포 하기도 했다. 광고 캠페인으로부터 형성된 반이민법 반대 운동은 1996년 사회 복지 개혁법에 대한 실질적인 서명이 이뤄지는 시간까지 2년 넘게 펼쳐 졌다. 이는 시카고한인교육문화마당집 실무진과 자원봉사자들 및 연장자와 다양한 재미 동포들이 입법 과정에 관하여 직접 배우고 단결된 정치적 목소리를 세우기 시작했던 계기가 되었다. 하나의 법률이 상정 및 심의 되고, 위원회를 통과하고, 총 투표를 통과하거나 대통령 서명 까지의 매 시기 마다 재미 동포들은 청원, 서한 전달, 집회, 행진, 반대 시위, 워크숍, 공동체 포럼을 포함하는 다양한 활동을 수행했다. 제한적인 의원들에게 전화 걸기 캠페인 또한 시작 되었다 바람 한 점 없는 시카고의 여름 폭염 동안 인터넷 기술 도입 전, 전화선과 분리하여 팩스 기계를 연결시켜 전날 수집된 수백 통의 편지를 팩스로 보냈던 많은 늦은 밤을 시카고한인교육문화마당집의 자원봉사자들은 아직도 이야기 하고 있다.

우리는 당시 클린턴 대통령이 1996년 7월 상/하원 두 의회가 통과시킨 법안을 두 번이나 거부권을 발휘한 유래 없는 결실을 보기도 했다. 그러나 세 번째로 법안이 의회를 통과 하고 클린턴 대통령이 최후로 법안에 서명 한다는 정보를 접하고 한 단계 놓은 캠페인 전략을 짜게 되었다. 1996년 대통령 선거를 4개월도 남겨두지 않은 당시 상황에서, 우리는 캠페인 전력 대상을 정당, 주로 재임 중인 민주당 전국 위원회(DNC)를 겨냥하기로 결정 했다.

KTE 반이민법 저지 캠페인

7월 후순, 시카고한인교육문화마당집은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와 함께 복지 개혁법안의 임박한 서명에 대항하여 전국적으로 서한 전달을 공동 주최했다. 법안이 몇 주 안에 서명될 것을 인지하면서 우리는 2주 안에 10,000통의 서한을 전달하는 것으로 우리의 목표를 세웠다. 마침내 17,000통의 편지가 재미 동포사회로 부터 수집되었고, 이 중 200통은 알래스카에서 거주하는 연장자들, 그리고 시카고에서 5,000통의 편지가 수집되었다. 이 편지들은 민주당 전국 위원회의 아시아 태평양 대표부에 전달되었다. 재미 동포 언론 기관은 전국 재미 동포 사회에 널리 보도 하기도 했다.

이와는 별개로 반 이민 법안의 주요 입안자이자 선동자인 공화당 전국 위원회(RNC)가 대중 저항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결정되었다. 재미 동포들은 샌 디에고에서 열린 공화당 전국전당 대회 회의 동안 집회를 열어 수천 명이 참가하였다. 동시적으로 시카고한인교육문화마당집은 공화당 전국 위원회 시카고 사무실 앞에서 집회를 열었고, 이 정당의 반 이민자 입장에 대항하는 공개서한을 제시하여 전국 이민자 단체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8월 21일, 클린턴 대통령이 복지 개혁법안에 서명하기 바로 전날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이 시기 시카고한인교육문화마당집 안에 위치했던)의 시카고 사무실은 당시 미국 보건 복지부 장관 Donna Shalala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Shalala 장관은 재미동포들이 주축이 되어 미 행정부에 전달 한 17,000통의 편지에 대해 보고 받았고, 법안이 제정되어도 부분 적인 개혁 및 수정안 작업을 통해 이민자 차별 내용을 수정하겠다고 약속했다. Shalala 장관은 재미 동포 사회에 이 메시지를 전달해줄 것을 우리에게 요구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 했던 전화를 장관으로 받은 후 우리는 재미동포들이 비록 수도 적고 역량도 약하지만 단결되 목소리로 우리의 입장을 전달하면 정책 변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기대치 않은 이런 결과는 우리가 올바른 전략을 세웠음을 확인 해 주었다.

유권자 동원과 교육

1996년 연방 선거를 준비하면서 시카고한인교육문화마당집은 유권자 등록, 교육, 동원을 도모하고자 최초로 포괄적인 선거 캠페인에 착수하였다. 이는 재미 동포 역사에서 이런 종류에 관한 한 최초의 캠페인이었다. 9월 후순, 시카고한인교육문화마당집은 한국어 유권자 안내서인 “1996년 선거로의 안내”의 제작과 모금 그리고 배포 활동을 했다. 이 종합적인 안내서는 대통령 선거와의 정치적 맥락, 유권자 자원 및 서비스의 안내책자, 유권자 등록과 선거 과정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였고 어떻게 투표권이 달성되어왔었는지 추적했다. 50,000권의 책자는 동포 사회 유력 일간지인 한국일보의 전국 배포망을 통해 배달 되기도 했다.

시카고한인교육문화마당집 자원봉사자들은 유권자 등록 캠페인을 추진 하였고, “어떻게 투표하나요?” 세미나를 개최했으며, 유권자 전화 걸기 활동에 최선을 다 했다. 선거 당일 시카고한인교육문화마당집은 한국어 유권자 안내 상담 핫라인 전화를 운영했다.

수년에 걸쳐 시카고한인교육문화마당집은 유권자 참여를 증진시키고 최초의, 영어가 미숙한 이민자 유권자에 대한 포괄 적인 선거 참여 및 교육 활동을 개발 한 것이다. 이 활동은 포괄적이고 전략적인 동시에, 또한 신규 이민자 지역 사회가 정치적 힘을 결성하기 위한 방법을 개발 했던 좋은 모법이 되기도 했다. 시카고한인교육문화마당집은 또한 중국어와 스페인어로 유권자 안내서를 제작하기 위해 영어 자료집을 제작 했다. 시카고한인교육문화마당집은 2000년 대선을 맞아 최초로 아시안 유권자를 대상으로 한 출구 조사를 조직하기도 했다.

저소득층 생활 보조금 복원

1996년 11월 대통령 재임에 대한 빌 클린턴의 재선거 다음, 재미 동포 사회는 클린턴 행정부가 자신의 캠페인에서 사회 복지 개혁 안 중 이민자에 대한 차별 내용을 수정할 것에 대한 선거 약속을 지키도록 집중적 캠페인을 펼쳤다.

시카고한인교육문화마당집은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와 함께 이민자 사회 복지 혜택 복원을 위한 전국 전보 캠페인을 시작 했다. 이 캠페인의 목표는 클린턴 대통령의 취임식 날 최소 2,000명의 개인 전보를 보내서 클린턴 대통령이 미국 이민자에 대한 자신의 캠페인 공약을 이행하도록 촉구하는 것이었다. 전보는 통신의 형태로 선별되었는데, 왜냐하면 긴급성의 기운을 빌어 메시지가 같은 날 전송되도록 조직될 수 있는 기존과 다른 새로운 전술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날이 연휴 기간이었기 때문에, 전보 순서 당 서류작업을 처리하는데 시간이 걸리고, 개별 전보를 보내는데 높은 비용이 들어서 이 목표는 2,000통으로 설정되었다. 전국적, 다민족의 참여를 격려하기 위해 캠페인 자료는 최초로 네 개의 언어(한국어, 중국어, 스페인어, 영어)로 제작되었다. 1997년 1월 19일 취임식 날, 시카고에서 330통을 포함하여 2,600통의 전보가 전송되었다.

1997년 가을 특정 이민자 사회에 대한 저소득층 생활 보조금의 복원은 진실로 시민적 참여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가를 우리들에게 일깨워 주었다. 이는 정치적으로 변화하는 경험이 현장에서 배우고 있던 우리들에게 중요한 원칙을 알려 준 것이다. 각 성원이 경험이나 언어 능력 또는 경제적 영향력에 있어서 결여되어 있는 것, 그리고 하나의 공동체가 구성원 수나 영향력에 있어서 결여되어 있는 것에 관하여 이는 단결된 정치적 목소리와 투표 블록 건설을 통해 큰 영향역을 발휘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 했다. 그리고 이 입법적 승리 그것으로 활동을 마감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회 복지 복원 이후 이민자 권리 조직

특히 연장자들은 복지 개혁의 다른 어떤 사안들도 복원 될 수 있는지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나는 재미 동포 사회에서 시민적 참여의 증가하는 단계와 깊이의 윤곽을 그리고자 아래의 이후 캠페인을 강조할 것이다.

1998년 1월, 시카고한인교육문화마당집은 푸드스탬프를 부활시키고자 “우리의 접시가 비었어요.”라는 메시지가 적힌 수천 개의 종이 접시를 의원들에게 보내는 목표를 세우고 전국적 캠페인에 참여하였다. 연장자들은 자신의 친구들과 가족을 찾아갈 계획을 세우고 수백 명의 서명자를 모았다. 목사들은 설교의 말미에 신자들이 종이 접시에 서명하도록 하였다. 일반 동포들은 마켓에서 펼치는 가두 서명 운동을 통해 이 캠페인의 중요성을 배웠고, 쉽게 캠페인에 참여 할 수 있었다. 같은 해 여름 이후 이민자를 위한 푸드스탬프 조항이 복원 되었을 때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는 백안관 로즈 가든 (Rose Garden) 서명식에 초대 받은 유일한 아시안계 단체 대표 였다.

전국 복원 ‘96 캠페인이 1999년 전국적, 지역적 이민자 권리 연합체에 의해서 시작되었을 때, 시카고한인교육문화마당집과 협력 단체들은 시민적 참여의 새로운 단계에 접근하였다. 저소득 한인 고령 이민자 130명 여명이 전국 복원 '96 로비와 집회를 위하여 여섯 개 주에서 조직되었다. 그리고 이 연장자들은 모두 워싱턴 디씨 미 심장부에 모여 지역 의원들을 방문 하고, 지역사회의 요구를 직접 의원들에게 이야기 하는 로비활동체 참여 하게 되었다.아시아계 및 태평양 계 이민자들은 백악관 아태계 특별 보좌관과의 면담을 통해 복지 혜택 축소로 인한 연장자의 고충을 발언 하였다. 이 행사의 목격자이자 참가자로서 나는 자주 강고한 한인 연장자 수백 명이 의회 복도를 따라 걸어가면서 워싱턴 정책 입안자들과 연방 의원들에게 잊힐 수 없는 각인을 남겼다고 믿는다. 이는 많은 조직들이 힘을 모아 함께 노력한 결실 이었고, 이민자 운동에 좋은 모범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2000년은 낙관과 약속의 시기였다. 이는 재미 동포 사회가 최초로 반 이민 정책을 이해하고 이 흐름에 대응하기 시작했던 이래로 6년이 되는 때이다. 우리는 흐름이 바뀌고 있고, 우리가 이민자 권리에 대한 반작용으로 방어하는 것으로부터 이민자 권리 아젠다를 진취적으로 진전시키는 방향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다고 믿었던 시기였다. 게다가 우리의 전략과 전술은 우리 경험과 지식을 반영할 수 있었다. 이는 자료가 없는 이민자의 합법화와 245조 I항의 부활 및 고용주 허가제의 폐지를 포함하는, 지대한 영향을 가져올, 대담한, 하지만 달성 가능한 목표를 나타내는 장기적 이민자 권익 운동을 여는 시기 였다. 이 목표들은 이민자들이 미국 사회를 더 낫게 하는데 지대하게 공헌했던 개념, 그리고 이민자들이 앞으로의 대의 민주제에 있어서 본질적인 참여자가 되어야만 하는 개념과 함께 표현된다.

이 캠페인에 착수하고 폭넓은 공동체 지원을 발휘하기 위해, 우리는 30,000통의 편지(15,000통은 민주당 전국 위원회로, 15,000통은 공화당 전국 위원회로)를 수집하여 민주/공화 양 당 강령 안에 이 캠페인의 세 가지 목표들이 도입되도록 요청하였다. 그 해 5월, 공화당 전국 위원회의 대표들과 민주당 전국 위원회 의장인 Joe Andrews가 참여한 면담이 성사 되었다.

우리가 집회와 포럼과 같은 다른 활동들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는 동안 이 서한 발송은 처음부터 토론을 형성하고, 정당 입장이 드러나는 대로 이에 단순히 응답하지 않기 위한 목적의, 재미 동포 공동체 성장의 유익한 사례다. (공화당 전국 위원회의 최종 강령에는 우리의 요구 사항이 반영 되지 않았지만, 민주당 대통령 후보 엘 고어는 자신의 캠페인 동안 공식적으로 이민자 합법화를 지원하겠다고 공표했다.)

우리의 진화

중요한 순간이었다. 우리는 정의와 평등이라고 하는 가치를 지역 사회와 함께 느끼고 싶었다. 우리에게는 새로움이 넘쳐나고 장애나 제한 따위와 상관없이 뛰어들 각오가 되어있다. 나는 기억에 기초하여 서술했지만 오늘날 정확할 순 없다. 우리가 하는 많은 일이 새롭거나 처음의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거꾸로 스스로 발달하면서 재미동포 공동체는 혜택을 입고 있고 사회 변화의 주체로 서고 있었다.

시카고한인교육문화마당집과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의 조직의 활동을 통해서 우리는 미주 동포들이 보수적이고 비참여적인 선입관을 어느 정도 바꾸었다고 자신한다. 우리는 새로운 미주 동포들의 진보 운동을 보여 줬고, 새로운 이민자 사회 참여 모법을 제시 했다고 믿는다. 더욱이 세대를 거스르는 협력과 연대는 우리가 지역 사회의 미래를 위해 올바른 운동의 참여 주체를 보여 준 것이다.

오늘날 재미동포의 활동적 운동의 요소를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가? 나는 다른 세대간의 협력과 참여, 문화적 배경을 초월한 연대, 다언어로 접근하는 소수민족 언론 활동, 풀뿌리 대중 참여 캠페인, 그리고 구체적인 전술과 장기적인 전략이 서로 소통하는 운동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중요한 때의 이 운동은 새로웠으며, 즉각적 성공이었다. 이 성공은 운동의 긍정성에 영향을 주었다. 확실한 장애가 우리 앞에 놓여있었다. 숫자 부족과 영향력 부재 였다. 우리 재미동포들의 인구는 1백만 명이 조금 넘는 아주 작은 숫자 이다. 또한 신규 이민자로 어렵게 생활하는 노동 인구로써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은 지극히 제한적 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극복할 다른 다수 대중과의 연대, 문화 및 인종을 초월한 협력이 그 해답 이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오랜 조직 활동을 통해 만들어진 경험, 그리고 이러한 경험은 20년 넘게 조국 민주화 및 평화를 위해 노력해온 재미한국청년연합 조직의 역사있었기에 가능했고, 재미한청련의 자랑스러운 역사는 1980년 5.18 광주에서 희생한 시민 들의 숭고한 저항 정신과 대동 정신이 이어져 내려 왔기에 가능 한 것이 믿는다.

조직적, 그리고 사회적 도전

사회단체에 있어서, 특히 재미동포 단체만큼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켜야 하는 것은 항상 도전적인 과제이다. 그래서 종종, 조직은 노인 이민자들이나, 연장자, 여성, 입양아들과 같은 구체적인 대상에 집중 한다. 시카고한인교육문화마당집 설립 과정에서 나는 영어는 유창하게 잘하면서 한국어는 못하는 소수인원 중에 한 명이었다. 재미 동포 2세와 입양아들의 지속적인 참여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 우리는 조직 운영에 있어서 뿐 아니라 프로그램과 조직 내 포괄적 구조 및 의사 결정 구조를 확실히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소속감과 투명한 조직 구조를 만들면서 가장 어려운 것 중의 하나는 이중 언어 사용을 통하여 모든 자원봉사자 및 활동가들이 올바로 생각 한 것을 말하고 다른 이의 의견을 이해하는 것이 었다.

최근에 영어만 할 줄 아는 재미동포 2세, 한국어만 할 줄 아는 1세대 이민자들과 1.5세대 한국계 미국인들의 혼합은 지역사회 세대 변화와 공유된 비전에 관하여 두 개의 언어로 지속적인 대화를 해야 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더 큰 세대 간의 다양성은 모든 조직의 이사들이 반드시 전형적인 1세대나 2 세대에서부터 입양아나 한국계 미국 여성에 이르는 우리사회의 다른 구성원을 포함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매번 이러한 과정이 고통스럽고 좌절되기도 했지만 이러한 시도는 우리가 더 정확하고 넓은 “재미동포 주체성”이라는 개념과 재미동포 사회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인종에 직면하는 것은 한국계 미국인에 있어서 민감한 움직임이다. 최근의 역사동안에 한국계 미국인은 다른 소수민족들과 대립해 왔다. LA 사태 동안에 한국인 소유의 가게 약탈 사건과 같은 사건이나 한국인 소유의 사업에서 근무하는 라티노 노동자들에 대한 진행 중인 분쟁은 한국계 미국인이 또 다른 종류의 소수 집단이라는 인식이 생기게 하였다. 그들은 착취적인 소수민족으로 오인 받았던 것이다.

어렸을 때 나는 아빠가 한국인들은 동아시아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나는 미국에서 생계를 겨우 유지해 나가는 이민자로써, 수 십 년 간의 식민지배와 가난, 정치적 억압에서 살아남은 한국인으로써 우리 사회의 슬프고 쓰라린 역사의 이야기를 듣고 읽으면서 자랐다. 나는 한국인과 아프리카인이 정신적으로 형제라고 믿었다. 그래서 고등학생으로써, 처음에 반 인종격리 정책 운동을 통해 활동에 참여하게 된 것은 나에게는 자연스러운 일 이었다. 어떻게 우리가 서로를 적대시 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상호간의 존중을 성취하고 공동체 건설의 임무를 공유 할 수 있었을까?

시카고한인교육문화마당집에서 인종과 관련 민감한 사안에 대해 동포사회를 교육하고, 비판하고, 소수 민족 연대의 중요성을 알리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우리 재미동포들은 미국에 살면서 다른 소수 인종들과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어 가며 살아가고 있다. 때론 고용주로, 손님으로, 이웃으로 다른 소수 민족과 살아가는 동포들이 미 주류사회의 인종 차별 제도 때문에 다른 소수 인종을 우습게 보고 쉽게 차별하는 것도 목격하게 된다. 이는 우리 동포사회가 이민자 권익 및 포괄적인 미국 사회의 정의를 위해 일 할 때 크게 우려 되는 사안이다. 숫자가 적은 우리들이 타 소수민족과 연대를 하지 않고 어떻게 우리의 삶과 미국 사회가 변할 수 있을까. 이에 각 지역 센타와 마당집은 청소년 및 성인 교육에 있어 다민족 문화 및 역사 교육에 비중을 두고 있다.

폭넓게 재미 동포들은 우리의 통찰력, 경험과 함께 근대 시민권 운동에 또한 기여하는 것을 추구해왔다. 우리는 언어 권리와 이민자 권리가 시민권 아젠다에 포함되고, 투표권에 관한 토론 역시 이민자 권리의 렌즈를 통해 고려된다는 것을 주장해왔고 보장되도록 일해왔다. 재미 동포들은 미국 내의 경제적 빈곤을 다루고 이것과 연결된 인종 분석에 참여해야만 한다.

시카고는 조직화에 관하여 선도적인 모델을 탐험해왔던 도시이다. 우리는 이 전통으로부터 수립하고 전통적인 모델들에 관하여 숙고할 것을 추구해왔다. 우리 이웃들에게 있어서 물리적, 구조적 변화만큼이나 변화하는 정치적 기후와 관련한 것 말이다.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낳는 재미 동포들을 포함하여 다양한 이민자 공동체들의 성취는 이 필요를 강화해왔다. 근본적인 구성요소들은 강력한 민초들의 행동과 효과적인 정책 지지를 결합하는 것을 포함하여 여러 언어를 사용하는 다면적인 접근을 포함한다.

앞으로의 정치 상황

9.11 이후 정치 상황은 이민자 권리 운동의 진전을 막고, 크게 후퇴 시키는 큰 사건으로 진행 되었다. 지독한 인권 침해와 학대는 미국인과 외국인 모두에게 가해져왔다. 가족은 찢어지고 개인의 권리는 수천 명이 추방되고 감금되는 가운데 짓밟혀왔다. 그리고 혐오 범죄는 그 밀도와 빈도에 있어서 놀라울 수준으로 증가해왔다. 1994년에서와 같이 반성은 기존의 이민자 권리를 보호하고 방어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지난 10년 간 이룬 귀중한 성과들을 흐트러놓기 시작할 것이다. 이민자들과 재미 동포들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이민자 권리를 진전시킴과 동시에 이제 방어하기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보다 위험한 것은 군사화 되는 미국의 사회적 가치, 문화, 생활 방식이다. 개별 미국인들은 가능한 테러 공격의 일상적 공포 속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부시 행정부는 평화와 안보에 대한 미국의 관심을 이용하여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긴장을 상승시키는 것으로 이어져온 공격적인 해외 정책을 감행해왔다. 나는 재미 동포들이 미국의 해외 정책에 관한 다른 관점을 고수하는 동안 반미로 낙인찍히는 두려움 때문에 자기 목소리를 내길 더욱 꺼릴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부시 행정부는 “테러와의 전쟁”을 통해 국내적 정책과 국외적 정책에 관한 관심을 한 데 묶어 전지구적 맥락 안에 지방 의제들을 배치하는 것을 필요케 한다. 이에 상응하여 시카고한인교육문화마당집과 같은 조직들은 자신의 정치적 분석과 작업의 범위를 확장해야할 더 많은 이유를 가진다.

이민자 권리와 시민권이 형성되는 환경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욕망을 넘어 우리는 잘 아는 유권자를 구성하는 개인들을 조직 및 교육 하는 것을 추구해왔다. 재미동포 연장자와 같은 우리 지역 사회 내 구성원의 정치적 각성 및 사회 참여는 진보운동에 있어 큰 재산이다.

이제 더 거대한 도전은 공동의 가치를 추구하기 위한 꾸준한 운동의 생활화 이다.

그리고 이 안에서 재미 동포들은 기념비적인 사회적 변화의 조직화에 관한 두 개의 평행선을 그릴 수 있다. 자주 논해지지 않지만 민권 운동의 풍부한 역사가 있고,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한 한국의 근대 역사를 통한 투쟁이 있다. 이 둘 모두 우리를 이끌고 고무시킬 것이며 이사회에 뿌리 내리게 할 것이다. 이 운동들은 교육과 조직화가 가족의 개념과 사랑하는 공동체에 대한 애정과 함께 시작한다는 점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우리의 신념은 어떻게 우리가 세상을 보는지 가리킨다. 그리고 우리가 숨 쉬는 대로 우리는 변화를 위해 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