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기

최근 편집: 2023년 11월 29일 (수) 09:06
인쇄용 판은 더 이상 지원되지 않으며 렌더링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브라우저 북마크를 업데이트해 주시고 기본 브라우저 인쇄 기능을 대신 사용해 주십시오.

백남기(1947년 10월 8일~2016년 9월 25일)는 농민운동가, 사회운동가이다. 민중과 농민을 상징하는 '도라지'와 통일을 상징하는 '백두산', 그리고 '민주화'라는 이름을 가진 두 딸과 아들의 아버지였다. 2015년 11월 14일 민중총궐기 대회 때 경찰이 쏜 물대포를 맞은 후 의식불명 상태에서 서울대병원에서 317일간 사투를 벌였다. 2016년 9월 25일 서울대병원에서 사망한 뒤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한 장례 투쟁을 진행했고, 농민들은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 때 꽃상여를 메고 시위에 참여하곤 했다. 2016년 11월 5일 명동성당에서 장례미사 및 광화문 광장의 영결식과 고향 보성에서의 노제 후 2016년 11월월 광주 금남로에서 노제를 치른 뒤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되었다.

생애

그의 생애는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과 한국 농업을 지키기 위한 활동으로 채워진 일생이었다.

  • 1947년 전라남도 보성군 웅치면 출생
  • 1963년 광주서중학교 졸업
  • 1968년 광주고등학교 졸업
  • 1968년 중앙대 행정학과에 입학
  • 1971년 10월 위수령 사태 때 시위 도중 1차 제적
  • 1973년 10월 교내 유신 철폐 시위 주도[1]
  • 1974년~1975년 – 수배 중 명동성당에 피신
  • 1975년 – 전국대학생연맹 가입 및 2차 제적, 갈멜 수녀원 잡부 1년, 일흥농원 포도원 1년, 갈멜 수도원 수도사 3년
  • 1981년 귀향 [2]
  • 1980년 3월 – 복교
  • 1980년 – 어용 학도호국단을 철폐하고 재건 총학생회 1기 부회장 역임
  • 1980년 5월 8일 – ‘박정희 유신잔당(전두환, 노태우, 신현확)’ 장례식 주도
  • 1980년 5월 15일 – 서울의 봄 때 의혈중앙 4000인 한강도하 주도 (흑석동 캠퍼스에서 서울역까지 도보 행진)
  • 1980년 5월 17일 – 군부 계엄 확대 조치로 기숙사에서 계엄군에 체포
  • 1980년 7월 30일 – 중앙대학교 퇴학 처분(3차 제적)
  • 1980년 8월 20일 – 수도군단보통군법회의에서 계엄 포고령 위반으로 징역 2년 선고
  • 1981년 3월 3일 – 3‧1절특사로 가석방
  • 1981년 – 고향 보성으로 귀향(수도작, 낙농업, 밭농사 등)
  • 1981년 11월 – 박경숙(율리아나) 씨와 결혼
  • 1983년 – 정치활동 규제자에서 해금 및 복권
  • 1986년 – 가톨릭농민회 가입
  • 1987년 – 가톨릭농민회 보성, 고흥협의회 회장
  • 1989년~1991년 – 가톨릭농민회 전남연합회장
  • 1992년~1993년 – 가톨릭농민회 전국 부회장
  • 1992년 –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 창립(준) 주도
  • 1994년 –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 공동의장
  • 2014년 – 가톨릭농민회 전남 동지회 회장
  • 2015년 –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 자문위원
  • 2015년 11월 14일 – 민중총궐기 대회에 참석했다가 경찰의 물대포에 의해 쓰러진 후 의식불명
  • 2016년 9월 25일 오후 1시 58분 – 중환자실 입원 317일 끝에 사망

(따로 각주가 없는 이력의 출처는 가톨릭농민회)

활동

민주화 운동

빈 문단 이 문단은 비어 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농민 운동

빈 문단 이 문단은 비어 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물대포 사건

2015년 11월 14일에 있었던 민중총궐기에 참여했던 농민들을 대상으로 여러 차례 물대포 살수가 있었고, 그 중 네번째 살수가 백남기를 정조준하였다. 백남기는 응급실로 이송되었으나 의식불명 상태가 지속되다가 사건 발생 317일만인 2016년 9월 25일에 사망하였다. 다음을 참고할 것 경찰 물대포에 의한 시민 사망 사건

같이 보기

링크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