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여성
여성관
보편적 종교로서의 불교는 여성에 대한 차별대우를 비난하고 있다.[1] 불교는 종교적인 만민평등주의에 서있으므로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중생이 궁극적인 목적인 해탈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며, 석가모니 붓다와 그 직제자들 시대에는 남성이나 여성이나 똑같이 번뇌를 소멸시키고 불교가 이상으로 하는 최고의 경지에 이르러 아라한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초기의 불교에서는 남성과 여성 사이에 아무런 차별이 있을 수 없었다.[1]
그러나 붓다가 입멸한 후 수 세기가 지나면서 남자는 성불할 수 있지만, 여자는 성불하지 못한다는 사상이 나타났다.[1] 여성이 성불할 수 없다는 사상이 구체적으로 부각되고 있는 것은 여인오장설[주 1]이다.[1] 오쵸 에니치는 붓다의 32상 가운데의 제10상인 음마장상(陰馬藏相)의 조건이 여인오장설로 발전되었다고 보고 있다.[1] 음마장상은 여래의 남근이 말처럼 감추어져 있다는 것인데 여자에게는 남근이 없으므로 부처가 될 수 있는 32상을 구비할 수 없다는 것이다.[2][주 2]
이 여성불성불사상은 부파불교에서 초기대승불교로 옮겨지면서 새롭게 전개되었는데, 즉 여인은 성불은 하지만 남자 몸으로 변화하여 성불한다는 변성남자라는 새로운 사상이 나타난 것이다.[1] 대승경전 시대인 2세기에서 4세기의 대승경전 성립 시기에 와서는 여성은 여성의 몸 그대로를 가지고 성불할 수 있다고 하는 즉신성불사상이 표면화하여 양성은 모두 평등하게 성불할 수 있다는 평등사상이 다시 새롭게 전개되었다.[1]
교단과 계율
- 출가한지 100년이 되는 비구니라도 신비구에게는 경의를 표할 것.
- 비구니는 비구가 없는 곳에서 안거를 해서는 안된다.
- 비구니는 15일마다 비구에게 포살일(布薩日, 참회)을 묻고 교계를 받을 것.
- 비구니는 안거의 최종일에 비구와 비구니의 양교단에 대하여 견, 문, 의의 참회를 행할 것.
대체로 붓다가 입멸한 후의 불교교단에서는 니승[주 3]들의 존재를 그리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1] 사분율의 계본에 의하면 남자의 계는 250계인데 비하여 여자의 계는 98조가 더 많은 348계를 지켜야 한다고 되어 있다.[1] 이 계의 조항에 대하여는 현대적인 안목으로 볼 때 많은 문제를 안고 있으므로 혁신적인 개정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1] 리영자는 계조항에서 여자가 더 많이 지켜야 하는 것이 율전의 편찬 시에 여성 출가를 두려워하는 남성이 많이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하는 한편, 여성의 청정행을 실천하기 위함이라고도 보고 있다.[1][주 4]
한국불교 최대종단인 조계종단은 총무원장, 교육원장, 포교원장, 호계원장 등 종단의 지도자는 반드시 ‘비구’여야 함을 종법으로 규정하고 있고, 종단 최고의결기구인 중앙종회 구성원 81명 가운데 비구의원 71명과 비구니의원 10명으로 제한하고 있다. 또한, 신도의 다수인 여성불자의 역할은 사찰 내 음식 만들기나 공양간 봉사 등에 한정하여 종단 운영에서 배제했다. 이는 종단 관련 조직이나 단체들에서 여성 지도자의 부재를 가져왔다.[3]
불전
기원전 2세기경 인도 여성의 지위는 그 이전보다 훨씬 하락하였다고 한다.[1] 붓다 입멸 후 수 세기가 지난 뒤에 경전과 율장이 남성 출가인에 의하여 편찬되고 성문화될 때에 여성 출가인은 이 편찬회의에 참여하지 않았음을 주의해야 할 것이다.[1] 또 비구니의 행적들은 비구[주 5]승가에 의하여 전래되었고, 중국에 전하여질 때도 비구에 의하여 역출되었던 것이다.[1] 그러므로 현재 우리들이 보는 불전에는 여성에 대한 차별적인 의식이 의외로 많이 포함될 수 밖에 없다.[1]
부연 설명
- ↑ 여인은 전륜성왕, 제석천, 마왕, 범천, 부처가 될 수 없다는 것.
- ↑ 여기에서 우리는 불교교단이 처했던 당시의 인도사회 상황은 이미 여성의 지위가 하락되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1] 인도사회에서의 여성의 비참한 지위는 아무 거리낌없이 불교의 여인오장설을 발생케하였으며 이 설은 마누법전의 여성멸시사상들에 힘입어 불교의 논사들에 의하여 쓰여진 논서에 반영되었다고 추측된다.[1]
- ↑ 니승(尼僧). 여자 승려.
- ↑ 남성출가인일 경우에는 거주지가 성밖에 있는 것과 반대로 여성은 성내가 거주지가 되는데 당시 인도사회의 치안 유지가 곤란했음과 불교 교단이 청정행을 실천함에 있어 남성과 여성이 공동으로 기거한다면 세속의 의심의 눈을 피할 수 없기에라고 할 수 있다.[1]
- ↑ 남자 승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