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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한국의 역사에서 [[삼국시대]]부터 [[후삼국 시대]]까지 한반도에 자리잡았던 국가로, 기원전 57년부터 기원후 935년까지 지속되었다. 수도는 서라벌(현 [[경주시]]).{{주|"[[서울]]"은 "서라벌"이 변해서 된 말이다.}} ==연혁== ===주요 사건=== {{이동|신라/주요 사건}} ===역대 군주=== ===멸망=== 경북대 황상일 교수와 경희대 윤순옥 교수가 2013년 한국지리학회지에 실은 논문에서 신라의 멸망의 원인 중 하나로 환경 파괴를 지목했다. <ref>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783</ref> 이에 따르면 삼국통일 시점에 인구가 급격히 늘어 신라의 멸망 50년전 시점인 헌강왕기(857~886)에 수도 경주 시내에 민간 가옥이 모두 기와집이었고, [[나무]]가 아닌 [[숯]]으로 [[밥]]을 지었으며, 경주 인구는 17만호로 가구당 4~5인으로 잡으면 70만~80만명에 이르렀다.{{주|천년 가까이 지난 1884년 [[한양]]의 인구가 30만 명 정도였다.}} 그런데 통일신라에서 연료라고는 나무밖에 없었다.{{주|[[석탄]]은 [[고려국|고려]] 시대에 들어서야 쓰이기 시작한다.}} 거대 도시가 된 경주를 부양하기 위해서농업, 연료, 토기 제작, 제철, 건축, 기와제조, 제염 등 온갖 곳에 목재가 쓰이다 인근 숲에서 땔나무 공급이 불가능해졌고, 경주·울산 지역의 인근의 삼림은 거의 황폐화되어 경주 이외의 지역에서 생산된 숯에 의존해 연료를 공급받게 되었다. 삼림이 파괴되니 작은 비에도 홍수가 발생하게 되고, 마침 신라 말기에 기록된 홍수의 빈도가 높아진 점을 두 교수는 지적했다. 또한 강수의 대부분이 지표수로 유출되어 산지 토양이 지하수를 함유하지 못하므로 저지대의 지하수 유출 속도가 빨라져 지하수위가 낮아졌다. 경주분지의 과밀인구는 지하수 부족이 만성화된데다 당대의 기술은 하수처리가 미비하여, 경주 분지에서 오염된 물을 음용수로 이용할 수밖에 없었고 수인성 전염병에 취약해졌다. 신라 말기에 기근과 자연재해, 전염병이 빈발하여 국가가 곡물을 공급하는 기능을 상실하면서 주민들이 이탈해 도적떼가 되거나 자식을 팔아서 생존하고, 반란이 일어나며 지방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를 상실하게 된 데에는 이런 연유가 있다는 것이다. ==사회== ===골품제=== {{이동|골품제}} ==문화유산== ===유적=== *[[경주시]] *[[불국사]] **[[석굴암]] ==부연설명== {{부연설명}} ==출처== <referenc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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