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최근 편집: 2018년 7월 5일 (목) 16:49

영혼(靈魂)이란 육체에 깃들어 있는 정신적 추상적 실체를 말한다. 실험에 의하여 죽기 직전 사람의 무게와 죽은 직후 사람의 무게를 측정해 봤더니 15g의 차이가 나서 영혼은 15g이라는 주장이 있다.

종교에서의 영혼

서구

고대 이집트

고대 이집트에서의 영혼은 무의식을 의미하는 '카'(ka)와 사람의 인격 혹은 자아를 의미하는, 사람 머리와 새의 몸통을 한 '바'(ba)로 나뉜다. '바'는 사람이 죽으면, 육체를 떠나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존재이며, 반면에 '카'는 사람이 죽어도 육체에 남는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사후에 신의 심장 무게 재판을 통해 정당한 영혼임을 판정받은 자는 '카'와 '바'가 다시 합쳐져, '아크'(Akh)가 되어 다시 부활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카'가 머물러 있는 육체를 계속 보존시키기 위한 미라와 같은 독특한 장례의식을 발생시켰다. 이 미라들은 빈자와 부자, 인간과 동물을 가리지 않았으며 현대에 대규모의 고양이 미라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고대 그리스

그리스도 이전의 그리스 철학에서는 영혼을 인간생활의 원칙으로 보았는데 플라톤은 육신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영혼이 삼부(三部)구조로 되어 있어서 감각적인 욕정의 원리인 탐욕혼이 복부에 자리 잡고 있고, 용기와 정기의 원리인 기혼(氣魂)이 마음에 자리 잡고 있으며, 생각의 원리인 지혼(知魂)이 머리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이 지혼은 불멸의 신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보았다.

기독교

기독교에서 인간의 육신은 마치 사람이 육체에 옷을 입는 것 같이 영혼에게 입혀진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영혼의 존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영혼의 존재는 불멸이며, 모든 인간의 영혼은 사후 야훼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여부에 따라서 대해서 심판을 받고 천국 혹은 지옥으로 나뉘어 가게 된다고 믿는다. 즉 인간의 육체는 영혼이 존재하는 동안 거하는 임시 거처일 뿐이며, 인간의 모든 지식과 기억을 포함한 자아는 영혼에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에 육신보다 영혼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며 육신이 살아있는 동안 각 개인의 사후세계를 위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켜 행할 것을 가르친다.

영혼에 대한 이해

“하나님은 육체와 영혼으로 된 사람을 창조하셨다”

“영혼은 죽지도 없어지지도 않는다”

이와 같은 이부(二部)구조적인 인간관은 창세기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론에 근거를 두는 것이지만 이 교리가 형성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을 자연철학적인 원리인 질료형상론(質料形相論, Hylemorphism)으로 설명한다. 모든 사물의 구조원리가 그렇듯이 모든 생물의 구성원리는 원질(原質) 혹은 질료와 체형(體形) 혹은 형상으로 되어있다. 여기서 모든 생명체의 체형 또는 형상이 혼이다. 따라서 식물에게는 생혼(生魂)이 있고, 동물에게는 각혼(覺魂)이 있으며 이 각혼은 생혼의 기능을 동시에 한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지혼(知魂)이 있는데, 지혼은 생혼, 각혼의 기능을 동시에 하고 있다.

교부들과 스콜라 철학자들의 이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은 중세기를 거치는 동안 토마스 아퀴나스를 위시로 그리스도교적 인간관을 정립하는 데 초석이 되었다. 니사의 그레고리오와 성 아우고, 네메시우스(Nemesius, 4세기)와 증거자 성 막시모(St. Maximus Confessor, 6세기)에 이르러 이미 중세 스콜라 철학적인 영육의 이부구조적인 인간관이 형성되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의 자연철학을 따르면서 인간혼은 개성을 가진 영체로서 육신의 체형 또는 형상이 된다고 정의하였다. 영혼은 죽은 뒤에라도 육신과 떨어져 단독으로 존재하나 살아있는 동안은 육신과 합하여 완전 일체를 이루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영혼은 그 자체를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육체와 합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이 점에서 영혼 자체는 순수 영체로서 불사불멸하지만 천사와는 다르다. 영혼이 어떻게 생겨서 육체와 결합하느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었으나 토마스 아퀴나스의 창조설로 결론이 내려졌다.

창조설

창조설(creationism)은 교회의 정통사상으로 받아들여지는 설로서 인간의 육신과 영혼이 하느님의 창조물이라는 것은 창세기를 기반으로 한 교리이지만 각 사람이 태어날 때 그 영혼이 어떻게 생겨나느냐 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문제가 되어 왔다. 이에 대하여 락탄시오(Lactantius), 암브로시오(Ambrosius), 예로니모(Hieronymus) 등 교부들의 주장을 종합하여 롬바르도(Petrus Lombardus, 1100?∼1160)는 이렇게 주장하였다.“각 사람의 영혼은 육체에 부여되어 창조된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이 설을 지지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으로 철학적인 설명을 하였다. 즉 영혼은 육체의 체형이며 육체와 함께 인간개성의 실체를 이룬다. 육신과 영혼은 일체를 이루는 공동구성 원리이기는 하지만, 영혼은 영체이기 때문에 육체를 떠나서 단독으로 존재할 수 있다[죽음]. 그러나 영혼은 어디까지나 자기 육체를 위하여 창조된 것이다. 이것이 천사와 다르다. 아퀴나스의 인간관은 스콜라 학파의 일관된 주장이며 교회는 이 설을 정설로서 받아들이고 있다.(白敏寬)

동양

유교

유교에서는 천지만물이 음양, 오행, 기의 집합으로 생겨나고, 또한 그 기의 흩어짐으로 없어진다고 한다. 사람도 예외가 아니어서 기의 모임으로 태어났다가 그 기의 흩어지는 현상이 바로 죽음이다. 죽음 뒤에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믿는 혼백(魂魄) 역시 음양의 기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시일이 지나면 마침내 흩어지고 자연으로 돌아간 기는 다시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유교에서는 내세를 믿지 않는다.

따라서 한번 죽으면 그만이기 때문에 자손을 통해 대를 이어감으로써 그 허무함을 달래고 영생의 욕구를 대신한다. 대가 끊어지는 것을 영생이 단절된다고 생각한다[1]

불교

불교에서는 내세관이 뚜렷하였다. 죽음은 곧 다른 삶의 시작으로 종말이 아니며 전생의 업보에 따라 금생(今生)에 태어나서 다시 업을 짓고 죽으면 그 업과(業果)에 따라 내세가 열리지만 반드시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지은 업이 아뢰야식에 저장되며 이 저장된 업식에 따라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사람, 천상으로 윤회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업을 닦고 내세를 예비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삶의 형태라 본다. 그러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도 사바세계에서 생로병사의 사고(四苦)를 면할 수 없기 때문에 윤회의 고리를 끊은 해탈을 하여야 된다. [1]

도교

도교는 현세에 중심을 둔 종교로서 내세를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죽음이란 너무 허무한 것이기에 죽지 않는 장생불사(長生不死)와 신선이 되는 성선(城仙)의 길을 택했다.

도교의 대표적인 서적인 ‘포박자’를 쓴 진나라의 갈홍은 거북과 학은 오래도록 산다고 하면서 어찌 사람은 오래 살지 못하겠냐고 갈파한다. 오래 사는 것에 대해 초기에는 불로초나 불사약 같은 것을 추구했지만 후에는 방향을 바꾸어 정신적 수양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하지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기에 도교에서는 죽음에 대한 해석을 신체는 관에 들어가지만 영혼은 신선세계에 간다고 했다. 이것이 도교에서 말하는 시해(尸解)이다[1]

이슬람교

기독교와 그 뿌리를 같이 하면서도 크게 갈등한다. 기독교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죄가 있다고 하는 원죄설을 주장하지만 이슬람교에서는 죄란 현세의 일상생활 속에서 가정환경이나 사회환경에 의하여 오염되거나 인간의 자유의지로 만들어내는 범죄일뿐 원죄는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원죄가 없더라도 있는 죄가 씻김을 받지 않고서는 순결무구한 천국에 들어 갈 수 없으므로 천국으로 가는 길목에서 ‘바르자크(연옥)’을 거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씻김이란 변태하는 과정이고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죽음이다. [1]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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