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영

최근 편집: 2022년 12월 29일 (목) 15:08
이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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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대한민국
출생1914년 8월 10일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면 [1]
사망1998년 12월 17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북진면
본관광주 이씨 [2]
학력정의여자고등학교 이화여자대학교 가사과 [3]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졸업)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 (박사)
직업사회운동가, 변호사
경력이화여자대학교 초빙교수
이화여자대학교 법정대학 교수·대학장 (1963년 ~ 1977년)
YWCA 전국연맹 이사장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소장
국제법률가위원회 위원장
한국가정법률상담소 명예 이사장
종교개신교
상훈막사이사이상 (1975년)
국제법률봉사상 (1984년)
브레넌 인권상 (1989년)

이태영은 대한민국 사회운동가, 변호사이다. 호(號)는 백인당(百人堂). 한국 최초 여성 변호사[주 1]이며, 한국가정법률상담소를 세워 여성 불평등·가정폭력 상담 해결, 유교적 인습에 저항하였다.

가족법이 개정되었습니다.

오백 년 묵은 인간 차별의 벽이 무너졌습니다. 주위의 많은 분들이 여성의 지위가 높아졌으니 … 축하한다고 말해옵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성이 새로운 것을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제 자리’를 찾았을 따름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났기에 사람 노릇하게

되었을 뿐입니다.

생애

이태영은 1914년 평안북도 운산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여자도 공부해야 한다”고 외치던 선진적인 어른이었으며, 그의 아버지는 금광일을 하며 독립 운동 자금을 후원하는 애국자였다. 그의 큰오빠 역시 이태영이 변호사나 국회의원이 되면 좋겠다고 그를 격려하곤 했다.[4]

정의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32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가사과에 입학하여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7살때부터 법관이 꿈이었지만, 당시 이화여전엔 법학과가 없었고, 남녀 공학대학 법학과엔 여성이 입학할 수 없었다.

졸업 후 그는 교사 생활을 하다가 정일형 박사와 결혼하였다. 약 10년간 남편을 뒷바라지하고 삼남매를 키우다 32세 되던 해, 대학 졸업 10년만인 1946년 32세의 나이로 서울대 법대에 처음이자 유일한 여학생으로 입학하였다.[주 2][주 3] 1949년에 법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1952년 제 2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여성으로서 최초로 합격했다. 그러나 남편이 야당인사이고 아직 여성 판사는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이승만 대통령이 반대하여 판사에 임용되지 못했다. 1954년, 가정법률사무소를 열어 법률구조변호사로 나섰다.[5]

그가 평생의 과제로 생각한 것은 ‘여권운동은 인권운동과 맥락을 같이한다’는 신념하에 이루어야 할 여성권익 향상을 위한 여성운동이었다. 그의 운동은 호주제 폐지, 이혼 때 재산분할청구권과 부모친권, 동성동본불혼제 등의 ‘가족법개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노력은 1989년 가족법개정으로 결실을 맺었다.[6]

1995년 3월 가정법률사무소 소장직에서 물러나면서 현역생활을 마감했다. 세 자녀가 함께 살자고 제의했지만 "분명한 것은 내 인생이고 다른 이들의 인생에 부담이 되기 싫다"며 거절했다.

1996년부터 치매를 앓아 전문 간병인 2명, 세 딸, 며느리가 당번을 정하여 간호하였다.

1998년 12월 10일 간병인에게 다음과 같은 회상의 말을 했다. "내가 누군고 하면 나는 이태영이야. 공부도 많이 했고, 안 가본 나라가 드물어. 상도 많이 받았지..." 11일 상태가 안 좋아져 서울대병원에 입원, 17일 새벽 1시경 자택으로 돌아와 8시간 후인 오전 11시 세상을 떠나갔다. 상주인 정대철과 맏사위 김흥한이 맞은 빈소에는 정치권과 여성, 종교, 법조, 재야 등 각계 인사들의 추모가 이어졌다.

그의 유해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MBC의 기억록 중 이태영.

연보

1963년 가정법원이 설치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1963년부터 1977년까지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을 지냈다.

1969년 55세에 '한국이혼제도 연구'로 서울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0년 국제법률구조연합회 이사 및 부회장

1973년 세계여자변호사회 부회장

1976년 명동3·1사건으로 3년 자격정지를 받았지만 80년 복권되었다. 국내외 여자 정치인, 여자 지식인 100명의 서명, 동의 지원을 얻어 여성운동가들의 회관인 여성백인회관 건물 부지를 매입, 마련하였다.

1980년 3월 24일 김이김사무소를 재개업했다.

1981년 국제법률가위원회 위원, 미국 뉴저지 드류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 취득

1986년에서 1996년까지 국제법률가위원회 부회장

1989년 상속 때 여남차별을 없애도록 가족법을 고치는 개가를 올렸다.[7]

여담

1935년 조선중앙일보사 주최 전국여자 전문학생 웅변대회에서 “인형의 집을 뛰쳐나온 ‘노라’가 제1의 인형이라면 제2의 인형은 한국 여성”이라고 연설하여 1등을 수상했다.[4]

영화 <어느 여대생의 고백>에 출연한 배우 최은희는 변호사 연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이태영을 찾아가 조언을 받았는데, 이태영이 시사회 때 작품을 보고 "법정에 와서 나를 본 일도 없는데, 나랑 똑같이 하였어? 나도 만년필 들고 변론 하는데" 라며 놀랐다고 한다. [8] 이후 이태영이 최은희를 집에 불러 먹을 것을 대접하고 예뻐해 주셨다고 하며, 이 때문에 최은희는 계절마다 국립현충원을 참배한다고 2015년 말했다.[9]

이태영은 이희호·김대중의 결혼을 주선하였다.

1999년 한국가정법률상담소가 이태영 1주기를 맞아, 고인 유고변론집 <정의의 변호사>를 발간하였다. [10] 2014년 이화여자대학교 젠더법학연구소는 이태영박사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행사를 개최했다.[11]

저서

상훈

  • 인권옹호상[12]
  • 막사이사이상[12]
  • 장한 어머니상[12]
  • 법을통한 세계평화 봉사상[12]
  • 법률문학상[12]
  • 유네스코 인권교육상[12]
  • 국제법률봉사상[12]
  • 국민훈장 무궁화상[12]

부연 설명

  1.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로 기네스북 등재
  2. 남편인 정일형 박사가 두 시간마다 젖먹이를 학교에 데려와 젖을 먹이며 공부했던 일화는 유명하게 남아 있다.
  3. 해방 후 남편이 이태영 변호사에게 소원을 물었을 때, 그는 잘 드는 가위와 재봉틀, 그리고 법학 공부 세 가지를 꼽았다고 한다.

출처

  1. http://www.mediaic.co.kr/news/articleView.html?idxno=48814
  2. “이태영(李兌榮)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1년 10월 19일에 확인함. 
  3. “3대 이상 이화가족 기념패 전달”. 2022년 1월 6일에 확인함. 
  4. 4.0 4.1 “최초의 여성 변호사 이태영, 여성 해방을 외치다”. 2020년 6월 5일. 2021년 11월 14일에 확인함. 
  5. “변호사 재개업한 이태영씨”. 1980년 3월 25일. 2021년 11월 12일에 확인함. 
  6. “이태영(李兌榮)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1년 11월 14일에 확인함. 
  7. “한국 최초 여성 변호사 이태영 사망. 84세[김대경]”. 1998년 12월 17일. 2021년 11월 12일에 확인함. 
  8.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신상옥 감독의 | YES24 채널예스》. 
  9. 기자, 박정호 (2015년 6월 13일). “[박정호의 사람 풍경] 올해 구순 ‘분단의 여배우’ 최은희”. 2021년 11월 12일에 확인함. 
  10. 경남신문 (1999년 12월 23일). “이태영여사 유고변론집 `정의의 변호사...` 펴내”. 2021년 11월 12일에 확인함. 
  11. “이화여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2021년 11월 14일에 확인함. 
  12. 12.0 12.1 12.2 12.3 12.4 12.5 12.6 12.7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1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텍스트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