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최근 편집: 2023년 7월 20일 (목)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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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제국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이후부터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1945년까지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설치한 ‘위안소’에 강제동원되어 일본군의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한 여성을 지칭한다.[1] 일본군 '위안부'는 일본 제국이 점령한 한국,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각국에서 징집되었다.

일본군 '위안부'('Mi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는 1930년대부터 1945년 일본의 패전에 이르기까지 일본군이 제도적으로 조직한 '군 위안소'에 강제연행되어 일제에 의해 조직적, 강제적, 반복적으로 성폭행당한 여성들을 말한다.


사실상 '위안부'라는 단어는 가해자 관점의 단어로 그대로 사용하기에는 적절치 않지만, 당시 일본군 문서에서 '위안부'로 표기되어 있어 일본정부와 군의 관여사실을 보여주는 의미에서 일본군이라는 가해주체를 붙여 사용하고있다.

일본군'위안부' 설립 목적

일본군 문서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이유로 위안소를 설립했고, 이에 따라 여성들을 동원했다.

  • 일본 군인에 의한 점령지 여성의 강간 방지
  • 성병 만연 방지
  • 군인들에게 '위안' 제공
  • 군의 기밀 유지와 간첩행위 방지

위와 같은 이유는 남성의 성욕은 참을 수 없는 것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1939년 군의관 하야오 도라오 중위의 논문 중 "군 당국은 군인의 성욕은 억제 불가능이라 하여 중국 부인을 강간하지 않도록 위안소를 설치했다...")

일본군'위안부' 동원 방법과 대상 그리고 규모

동원규모

일본군 '위안부'의 규모는 17만 - 20만으로 추정된다. 그중 8~90%가 일본에 의한 강제점령되었던 조선의 여성들이며, 그 외 중국, 필리핀, 말레이지아, 인도네시아, 영국, 네덜란드 여성 등 다양한 국적의 여성을 마구잡이로 강제동원했다. 어떤 형식으로 끌려갔든 당사자가 사실을 알고 동의한 사실이 없기 때문에 강제연행, 강제동원 된 것이다.

  • '모집'의 경우 : 광고와 유인을 통한 취업사기로 조선총독부가 직접 관여하는 관알선과 민간업자에게 위탁여자 모집하는 경우가 있었다. 민간업자가 모집했을 경우에도 곧바로 관동군, 조선군사령부 등의 관리 감독, 통제로 넘어갔다.
  • 약취와 유괴 : 민간업자나 모집인들에 의해 유괴당해 인신매매되거나 관리, 경찰, 군에 의해 강제납치되었다.

주 동원대상

과거 매춘경험이 있는 여성 대신, 성경험이 없고 나이가 어린 조선인 여성이 주 대상이었다.

동원방식

관 알선, 모집과 취업사기, 약취.유괴 등의 강제연행.


※ 참고자료: 이화여대 <동아시아의 역사분쟁과 한국사> (안유림 교수님) 강의록.

피해자들의 목소리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있는 증언을 시작으로 피해자들의 증언이 시작되었다. 일본군'위안부' 사건이 벌어진지 40~50년 만에 첫 증언이 나온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 당시 가부장적이고 여성의 정조를 중요시 하던 대한민국에서 자신이 '위안부'로 끌려갔던 것을 이야기하기 어려웠음을 알 수 있다.

  • 애니메이션 <소녀이야기>: 일본군 위안부로 인도네시아 자바섬으로 끌려가 몇 년 간 위안부 생활을 하신 정서운(1924-2004) 할머니의 생전 인터뷰 육성을 그대로 사용해서 제작된 애니메이션. 네이버 인디극장에서 2016년 8월 9일까지 무료상영됐다. (트레일러 - 유튜브)
  • “난 평생 정이라곤 줘본 적이 없어”, 한겨레(이진순의 열림), 2014.02.21.: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의 인터뷰
  • 슬픈 귀향 1부 ‘북녘 할머니의 증언’, 뉴스타파, 2016.03.04.
  • 슬픈 귀향 2부 ‘북녘 할머니의 증언’, 뉴스타파, 2016.03.11.

저는 깨끗한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고 갔습니다. 이때가 싱가포르가 함락되던 1942년 4월이었습니다. 함흥역까지는 조선인이 인솔했어요. 많은 여자들이 기차를 탔습니다. 그런데 그 열차는 군용열차였고, 입구에는 헌병들이 지키고 있더군요. 게다가 밖을 내다볼 수 없도록 기차 창문은 모두 검정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습니다.  

… 우리를 실은 트럭은 캄캄한 밤중이 돼서야 어느 육군부대에 도착했습니다. 나중에 그곳이 '히노마루' 부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처음에 들어간 곳은 양옥 안의 조그마한 방이었는데, 안에는 좁게 칸막이를 해놨고, 모포 몇 장이 놓인 나무침대가 있었습니다. 헌병이 눈을 부라리고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망치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저는 화장실로 용변을 보러 갈 때마다 하늘을 보면서 '엄마도 이 하늘을 보고 계시겠지' 생각하고 눈물만 자꾸 흘렀습니다. 그렇지만 이럴 때에도 "도망칠 생각하는 거야!"라는 고함이 어김없이 들렸고, 심한 기합(얼차려)을 받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도착한 날은 불안과 피로 속에서 그냥 지나갔지만 다음날부터 우리는 군인들을 상대할 것을 강요당했습니다. 저는 결혼 전에 순결을 잃게 되면 죽어야 된다는 생각으로 자란 사람입니다. 그래서 너무나 겁에 질려 있었으므로 처음 들어선 병사한테 무조건 용서해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군인은 대검으로 제 속옷을 찢어 버렸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하루에 20여 명 정도의 군인을 상대해야만 했습니다. 저는 그때까지만 해도 남자의 성기조차 본 적이 없었습니다. 병사들을 상대할 때마다 '똥이라도 먹는 게 낫겠다'라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병사들을 상대하는 것만은 피하고 싶어서 세탁과 청소하는 일을 도맡아 하곤 했습니다. 생리 때에는 생리대가 있는 데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천을 훔쳐다 썼는데, 들키면 매를 맞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병이라도 걸리면 밥도 주지 않았습니다.

저보다 나이가 많았던 어떤 여자는 장교와 심한 싸움을 했는데, 매를 맞으면서도 반항하다가 실신하고 말았습니다. 정신을 차린 다음에도 계속 반항하니까 그 장교는 벌거벗은 그 여자의 음부를 권총으로 쏘아 죽였습니다. 이런 끔찍하고 잔혹한 일들을 일본인들이 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습니까?

출처: 박도 엮음, 『일제강점기』, 눈빛출판사, 630~634쪽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들

이름에 대한 논의

“나는 우리 어무니, 아부지가 붙여 준 엄연한 이용수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그런데, ‘위안부’. 어떻게 내가 그 더러운 일본군의 ‘위안부’입니까? 나는 밤에 자다가 강제로 일본 군인들에게 끌려갔습니다. 나는 위안부가 아닌 이용수입니다.” - 이용수 할머니

해당 사건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께서는 자신이 ‘더러운 위안부’가 아니었다고 항변한다. 우리 사회가 ‘위안부’의 이미지에 대해 ‘창녀’, ‘매춘부’, ‘더러운 여자’, ‘순결을 잃은 여자’ 등, 그동안 일본 우익들이 해 왔던 것과 똑같이 피해자들을 비하시켜서('창녀-성녀 이데올로기')  ‘그렇지 않은’ 일반인들과 구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용수 할머니께서는 자신은 그렇게 비하되어도 되는 존재가 아니라 응당 인권이 있는 평범한 인간임을 스스로 항변하고 계신 것이다. 이용수 할머니께서 강력하게 거부한 것은 바로 우리의 비뚤어진 인식이다.

‘위안부’라는 이름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이름이다. ‘위안부’라는 이름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본 용어가 아니라 가해자, 일본군의 관점에서는 이들이 '본인을 위안하는 여성'이라는 뜻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일본군 ‘위안부’문제가 알려지기 시작하던 1980년대 초기에 일본 정부와 학자, 언론 등 일본사회에서는 ‘종군 위안부’(링크)라는 말을 사용했다. ‘종군(從軍)’은 ‘군을 따른다’라는 의미로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따라다니며 위안을 주었다'는 주장이 담겨있는 책임 회피성 단어이다.


그런데 이렇게 부적절한 '위안부'라는 단어를 어째서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 것인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부르는 명칭의 변화를 자세히 살펴보자. ‘처녀공출 때문에 시집을 일찍 갔다.’는 할머니의 말씀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처녀 공출은 미혼 여성을 동원하는 일제의 정책을 의미하는 말이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많은 소녀들이 처녀 공출을 피하기 위해 일찍 결혼을 했다. 일제의 강제 동원 정책은 사람들 사이에서 다양한 이름으로 존재했고, 그것을 가장 크게 포괄하고 있는 이름이 ‘정신대’이다. 일본군 ‘위안부’문제에 있어서는 단어 자체로도 또 실제로 정신대로 동원되어 일본 공장에서 노동을 강요당했던 여성들과 혼동되기 때문에, 실상을 제대로 알리는데 한계가 있어 사용을 지양한다.


이름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것은 1992년 8월 정대협이 아시아 피해국 여성들을 서울로 초청하여 개최한 ‘제1차 정신대 문제 아시아 연대 회의’부터였다. 각국의 피해자들의 의견을 존중하여 당시 일본사회가 사용하던 ‘종군 위안부’ 앞에 ‘강제’라는 말을 붙여 ‘강제 종군 위안부’라고 부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서로 상반되는 의미의 두 단어가 붙어있으며, 무엇보다 ‘종군 위안부’라는 명칭 자체가 진실을 심하게 왜곡하는 말이기 때문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 이에 그 다음해 도쿄에서 열린 ‘제 2차 아시아 연대 회의’에서 다시 논의되었다. ‘강제 종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 연대 회의’라는 이름으로 개최된 회의에서 결정한 것은 이미 통용되고 있던 ‘위안부’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되, 실제로 그 여성들이 위안부 였던 것이 아니라. 일본군에 의해, 일본군 문서에 의해 위안부라 불렸던 것이므로 작은따옴표(‘ ’)를 반드시 붙여서 사용하며, 범죄 주체인 일본군을 붙여 일본군 ‘위안부’로 사용하기로 했다. 일본군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 자체가 강제성과 국가 차원에서 저질러진 범죄임을 표현해 주기 때문이다. 영어로는 ‘Mi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 즉, ’일본군 성 노예‘라는 이름으로 사용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때부터 일본군 ’위안부‘라는 말로 통일하여 사용하게 되었고, 유엔 인권 위원회 등 국제 기구에서도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일본군 성노예(Mi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으로 표기하게 되었다.

현재 주로 쓰이는 정식 명칭은 일본군 '위안부'이며, 위안부에 따옴표를 붙이는 이유는 '위안부'라는 말에 '군에게 위안을 주는 사람'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2차가해적인 단어이지만 실제로 제일 자주 쓰인 단어이기 때문이다. 이 따옴표에는 '실정상 위안부라고 칭하긴 하지만 위안부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명칭에 대한 논란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고, 2004년 5월 서울에서 남.북한, 일본, 필리핀, 인도네시아, 중국, 대만, 미국 등의 관련 시민 단체들과 생존자들이 참석하여 개최된 ‘일본의 과거 청산을 요구하는 국제 연대 협의회’에서 다시 제기되었다. 일본 매스컴과 일본 정부가 계속해서 ‘종군 위안부’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우리나라 언론 매체들도 여러 가지 이름을 제각각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날 회의에서 ‘위안부’라는 용어를 빼고 일본군 성 노예로 통일하자는 제안도 있었으나, 일본군 ‘위안부’제도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하되, ‘일본군 성 노예 제도’라는 말도 함께 사용하기로 했다. 또한 피해자를 지칭할 때는 ‘일본군 성 노예제 피해자’, ‘일본군 ’위안부‘제도 피해자’로 부르기로 했다.일본군 ‘위안부’라는 이름은 지금도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몇몇 생존자들은 여전히 이 이름을 거부하기도 한다. 일본군 성 노예라는 말조차도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피해자들이 겪은 고통을 다 표현할 수 없다는 지적들이 계속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위안부’라는 이름을 바꾸지 못하고 있다. 피해자들의 삶을 적절히 표현해 낼 수 있는 다른 이름을 찾기도 힘들뿐더러 갑자기 이름을 바꾸게 되면 많은 혼란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일본군의 만행을 잘 드러내면서 피해자들의 상처를 보듬어 줄 수 있는 이름은 계속 찾아봐야 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몫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많은 사람들이 노력해 만든 이름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정확하게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피해자들의 인권과 명예 회복을 위한 의미있는 이름을 찾아야 할 것이다.

※ 윤미향의  『20년간의 수요일』 (39-44쪽 「아름다운 이름과 더러운 이름」)를 요약·재정리한 내용

일본군 '위안부'의 여러 명칭들

  • 일본군 ‘위안부’
  • 종군 ‘위안부’ : 군을 주체적으로 따라다녔다는 뜻을 무심코 함의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쓰지 않는 것이 좋다.
  • 국제사회에서 성노예(military sex slavery)와 군대성노예제도(military sexual slavery)
  • Comfort women
  • ‘군대성노예제’, 일본군 ‘성노예’
  • '정신대'는 ‘일본 국가(천황)’를 위해 솔선해서 몸을 바치는 부대로 위안부와는 성격이 조금 다르지만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 근로정신대: 강제 징집된 전시근로역을 뜻하는 말로, 마찬가지로 위안부와는 성격이 다르지만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본 정부의 태도

일본은 국가가 주도해서 ‘일본군 성노예’제도를 설립하고, ‘성노예 피해자’들을 강제모집하고, 이를 ‘위안소’라는 이름으로 운영했지만, 일본정부는 계속해서 전쟁 중 ‘국가’가 ‘군대 성노예’제도를 설립하고 운영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회피하고 있다.


1992년과 1993년 두 차례에 걸쳐 군의 관여와 강제성을 인정하고, 중대한 인권 침해가 자행되었던 점을 인정했다. 하지만 ‘누가 강제했고’, ‘누가 피해자들의 인권 침해를 자행했는지’ 애매한 표현으로 일본 정부의 책임은 회피했다. 1993년 일본 관방 장관이 발표한 담화에서 주요 책임을 민간 업자들에게 돌리고, 군은 약간 관여했을 뿐이라는 식으로 일본군 ‘위안부’제도에 대한 책임을 회피했다.


물론 위안소 건립과 관련된 일은 대부분 군이 결정했으며, 간혹 군이 민간 업자를 이용한 경우도 있었던게 진실이다. ‘위안부’강제 모집 지시, 위안소 규칙 및 요금 결정, 각 부대 이용일 지정, 경영 및 감독, 성병 검사 등은 모두 군이 행했다.  

  • [1] 조선시대 종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벼슬아치나 양반의 부인들을 포함한 우리나라 여성들이 청나라에 많이 끌려갔었는데, 병자호란이 끝난 후 고향에 돌아온 여성들을 ‘화냥년’이라고 부르며 ‘절개,순결을 잃은 여인’으로 낙인찍고 구별하는 말로 사용했다.

각국 현황

  • 필리핀
  • 중국
  • 인도네시아 : 자바에서는 인도네시아인 뿐만 아니라 약 1백명의 네덜란드인까지 징집되었다. [2] 네덜란드계 호주인 포함[3]
  • 대만
  • 태국
  • 베트남
  • 말레이시아
  • 3개국 위안부 할머니들, 日사죄.배상 국제연대 호소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1814044
  • 서울중앙지법은 '위안부' 피해자 12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대해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려고 "피고는 원고들에게 각 1억원을 지급하라"고 명령했다.[4] 하지만 일본 정부는 배상 대신 판결 직후 남관표 주일 한국대사를 외무성 청사로 초치해 항의의 뜻을 전달하는 등 즉각적인 반박 의사를 보였다.[4]

논란과 문제

  •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
  • 2015년 12월 28일 한일 위안부 협상

각 정부 입장

1965년 한일협정

한국

  • 2015년 합의를 당시 외교부가 F&Q 사이트[5]까지 만들어 쓰다가 [문재인]] 정권 들어서 2015년의 한일 위안부 협상은 국민 정서로 인해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일본

  • 3대 담화 : 일본의 과거사 반성 3대 담화; 미아자와 담화, 고노 담화, 무라야마 담화

국제 사회의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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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