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전쟁

최근 편집: 2023년 1월 3일 (화) 09:09

동기

자원 확보

일본만주를 점령한 몇 년 뒤인 1937년부터 중국과 전쟁을 하고 있었다(중일전쟁). 그러나 1940년이 되어도 중국과의 전쟁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일본은 야심을 서방의 식민 강대국들로 넓혔다. 프랑스와 네덜란드는 얼마전 동맹국인 독일에게 패했고, 영국은 독일과 전쟁 중이었다.

1941년에는 일본과 미국과의 오래된 긴장이 더 고조되었다. 미국영국은 일본에 무기 제조에 필요한 고철 수출을 금지했으며, 석유 수출 금지, 미국 내 일본 재산 동결, 일본 선박의 파나마 운하 통과 거부로 중국 내에서의 군사행동을 위축시키고자 했다. 1941년 11월 26일헐 노트를 마지막으로 외교적 노력은 절정에 다다랐고, 도조 히데키 수상은 자신의 각료들에게 이것이 최후통첩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석유 봉쇄는 유전이 없어서 대부분의 석유를 미국인도네시아에서 수입하던 일본에게 치명적인 위협이었다. 일본은 다른 원료 자원과 시장을 확보함으로써 점차 관계가 악화되고 있던 미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에서 벗어나려 했다. 일본은 석유를 얻기 위해 네덜란드령인 인도네시아도 노리게 되었다.

아시아에 대한 서방국가의 인종차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독일 제국군이 중국으로 이동할 당시 일본은 영국과 협력했다. 일본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도움을 준 것에 대해 인정받기를 원했다. 일본은 파리평화회의에 초청된 5개국 중 하나였지만 주요 발언권은 없었다. 일본인들은 인종 평등 조항을 도입했다. 전후 조약의 일환으로, 일본은 연합군에게 그들의 시민들이 호주나 미국 같은 서구 국가에 더 자유롭게 이민을 할 수 있도록 요청한다. 그러나 일본의 요청은 거부되었다.

당시 서방국가들은 많은 수의 아시아 국가들을 식민지로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시아국인 일본이 다른 국가를 지배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영향력 있는 국가를 표방했던 일본은 1931년 이후 경제적 자급, 군사적 안보, 동아시아에 대한 리더십의 욕구를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