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위키:위키독/아름드리/바스티유 감옥 습격

최근 편집: 2023년 1월 6일 (금) 19:35
La Prise de la Bastille. 프랑스 혁명의 하위 항목. 1789년 7월 14일에 파리 민중들이 봉기해 바스티유 감옥을 함락한 사건이다. 흔히 프랑스 혁명의 시작으로 여겨지며, 지금도 이 날을 프랑스 혁명 기념일로 정하고 있다.

1. 배경

1789년의 삼부회 문서에서 상술. 프랑스의 누적된 재정 적자를 해결하기 위한 개혁안이 귀족들의 반발로 좌초된 뒤 1789년 5월 5일 성직자(제1신분), 귀족(제2신분), 평민(제3신분) 세 신분 대표들의 합의체인 삼부회가 열렸다. 하지만 특권층인 성직자와 귀족들이 할 수밖에 없던 조세 개혁을 양보하는 대신 자신들의 특권을 공고히 하고자 했던 반면 평민들은 전반적인 개혁으로까지 나아가고자 했기에 갈등을 피할 수 없었다. 특권층 대표들과 평민 대표들의 대립으로 삼부회가 파행을 겪자 평민 대표들은 6월 17일에 독자적인 의회로서 '국민의회'를 선언했다. 그러자 국왕 루이 16세는 6월 23일에는 해산을 명령했다가, 6월 27일에는 제1, 2신분 대표들에게 국민의회에 합류하라는 명을 내리며 국민의회를 인정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파리 주변에 군대를 집결시켜서, 파리 민중들은 특권 계급이 겉으로 타협하는 척하며 무장 진압을 가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생각에 두려워하고 있었다.


2. 파리의 봉기

삼부회 제3신분 파리 대표를 선출한 선거인단이 선거 후에도 해산하지 않고 6월 25일부터 비공식적 시자치기구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 선거인단은 1789년 7월 10일 파리 시청에서 새로운 집회를 갖고 "하루 빨리 파리에 부르주아 방위대를 창설할 것"을 결의했다. 7월 11일, 루이 16세는 군대의 철수를 요구하는 국민의회의 서한에 거절의 답신을 보낸 데다, 네케르 재무총감과 자유주의적 대신들을 해임하고 공공연한 반혁명파인 브르퇴유(Breteuil) 남작과 브로이(Broglie) 원수를 각각 재무총감과 육군대신에 임명했다. 네케르의 해임 소식이 다음 날인 12일 정오에 파리에 전해지자 파리 시민들은 무장 진압의 전조로 받아들이고 즉각 행동에 나섰다. 항의의 의미로 증권거래소가 폐쇄됐고, 여기저기서 집회와 시위가 급조됐다. 오후에 데물랭(Camille Desmoulins)의 연설을 듣고 팔레 루아얄(Palais-Royal)에서 출발한 무리가 시위군중의 주력이었다. 이들은 파리를 행진하다 루이 15세 광장에서 왕궁을 수비하는 독일인 용병대와 잠시 충돌했고, 이에 경각심을 가진 파리 시민들은 무기 상점을 약탈해 무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파리의 주력 군대는 샹 드 마르스 광장에서 대기하고 본격적 무장 진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 날 프랑스 수비대가 혁명 세력에 가담했다.


7월 13일 국민의회는 파면당한 대신들에게 "존경과 유감의 뜻"을 표하고 내각책임제를 선포했다. 하지만 더 실효성 있는 조치는 파리 선거인단의 포고문 공포였다. 제3항은 상설위원회(comité permanent)의 설치를 규정했고, 제5항은 "각 지구(district)는 무기를 소지하고 저명한 200인의 시민 명부를 작성하고 그들을 규합하여 공공안전을 위한 파리민병대(Le milice parisienne)를 조직할 것"을 규정했다. 상설위원회는 앙시앵 레짐의 시 행정을 대체한다고 해서 봉기 시청(municipalité insurrectionnelle)이라고 불렸다. 파리민병대의 병사는 각 지구마다 800명으로 구성하되 실업자 및 부랑자는 받지 않았다. 이 날 하루 종일 소요가 파리를 휩쓸었다. 세금 문서를 파괴하고 징세청부업 고용인들을 쫓아내는 전통적인 세금 반대 운동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무기를 찾고 전투를 준비했다. 무기를 뒤지고 귀족의 저택을 수색했으며 참호를 파고 바리케이드를 쌓았다. 새벽부터 철공노동자들이 창을 만들었다. 그러나 진짜 필요한 것은 화기(火器)라서 군중은 파리 시장 플레셀(Flesselles)에게 무기의 공급을 요구했는데 플레셀은 무기고를 거짓으로 알렸다. 오후에는 파리에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프랑스 위병대가 불복하고 시청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나섰다.


3. 7월 14일의 사건 경과

7월 14일 새벽, 시위 군중은 상설위원회 대표와 함께 앵발리드(Invalides, 폐병원, 군원호원: 루이 14세가 상이군인을 국가비용으로 수용하던 곳)로 가 소총을 탈취했으나 여전히 무기가, 특히 화약이 부족했다. 그러자 시위자들에게 자연스럽게 바스티유 감옥으로 가자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화약을 찾으려는 실용적 목적과 더불어, 과거 정치범 수용소로 사용되던(혁명 당시에는 그 기능을 잃고 잡범 수 명만 수용하고 있었지만) 앙시앵 레짐의 상징으로서 빈민 거주지인 생탕투안 포부르(Faubourg Saint-Antoine)의 주민들에게 위압감을 주고 있었다는 심리적 요인이 작용했을 것이다. 바스티유 감옥의 사령관 로네(Launay)는 80명의 상이군인과 30명의 스위스 용병으로 구성된 소규모 수비대밖에 갖지 못했기 때문에 성 앞뜰에 있던 군대를 성벽 둘레의 참호 뒤로 숨겼다.


주로 생탕투안 포부르의 장인들로 이루어진 봉기자들이 오전 10시 쯤 바스티유 정문에 도착해 화약을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로네는 자신들이 공격당하지 않는 한 사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상설위원회 대표들을 반갑게 맞이해 식사 대접까지 했으나, 대표들이 나오지 않는 데에 불안해진 군중 사이에서 헛소문이 돌았다. 오후 1시경 봉기자들이 전진해 해자를 포위했다. 다리가 올라가 있어 해자를 건널 수는 없었다. 이 전진을 공격으로 오해했는지 로네가 사격 명령을 내렸고 백여 명의 봉기자들이 죽거나 다쳤다. 오후에 시청에서 이 소식을 접한 사람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었고, 선거인단이 중재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하사관 위랭(Hulin)과 여왕 보병대 소속 엘리(Elie) 중위의 지휘 하에 시민들과 3백 명의 프랑스인 수비대는 아침에 앵발리드에서 탈취했던 4대의 대포를 해자 다리 앞에 세워놓았다. 전날 결성된 파리민병대도 합세했다. 결국 로네는 바스티유 사령관과 부하들이 밖으로 나갈 테니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엘리는 항복을 받아들였고 오후 5시에 도개교가 내려갔다. 그러나 로네의 배신으로 동료시민들이 죽는 것을 본 봉기자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바스티유 안으로 들어간 봉기자들은 세 명의 장교와 세 명의 사병을 살해했다. 로네는 시청까지 끌려가며 군중에게 구타당하고 모욕당한 후 시청 앞 그레브 광장(place de Grève)에서 살해됐고, 무기고를 거짓으로 알렸던 파리 시장 플레셀도 살해당했다. 군중은 그들의 머리를 창 끝에 꽂고 팔레 루아얄까지 개선행진을 벌였다.


일주일 후 7월 22일에는 브르퇴유 내각의 일원인 풀롱(Foulon)과 파리 지사인 그의 사위 베르티에(Berthier)가 살해당했다. 군중은 풀롱이 민중에게 풀을 먹이겠다고 말했으며 베르티에가 익지 않은 밀을 자르게 했다고 주장했다. 이 일은 중첩된 정치적·경제적 비난이 '각료적 독재주의'를 어떻게 증오심으로 포장했는지를 보여준다.[1]  한편 바스티유 정복자들은 그 감옥에서 수많은 정치범을 구출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거기 갇힌 죄수는 겨우 일곱 명이었고, 잡범과 정신이상자와 기타 범죄자로서 '전제주의의 희생자'라 할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4. 결과 및 영향

루이 16세는 패배를 인정했다. 그는 7월 15일에는 파리를 포위 중이던 군대를 철수시키고, 16일에는 네케르를 재임명했다. 17일에는 파리를 방문해 혁명 세력이 임명한 파리의 새 시장 바이이(Bailly)와 파리민병대 사령관 라파예트(Lafayette)를 인정하고 바이이로부터 파리의 청홍색과 부르봉 왕가의 백색을 합친 삼색 모표를 받았다. 라파예트는 민병대를 국민방위대(Gardes nationale)라고 부르자고 제안했고 파리 시민들은 라파예트와 합의해 전국 규모의 국민방위대를 조직하기로 했다. 파리 선거인단의 상설위원회는 공식적 시자치기구로서 파리 코뮌이라고 불렸다. 주요 반혁명파로 여겨지던 아르투아 백작, 브로이, 바랑탱, 브르퇴유, 폴리냑 가 사람들 등이 15, 16일 밤에 망명을 떠났다. 무장진압의 위협이 일단 사라지고, 새로운 입법부이자 주권 기관으로서 국민의회, 새로운 도시 자치 체제를 이루는 파리코뮌과 국민방위대가 인정받으며 새로운 정치 체제가 시작되었다.


지방의 도시들도 파리의 예를 따라 비교적 평화롭게 민중 소요를 정리하고 부르주아적 지방 자치 질서를 이루었다.(프랑스 혁명 문서 2.1.3. 혁명의 시작에서 상술) 지방 농촌들은 그 전부터의 경제적 위기에다, 정치적 위기에 따른 특권 계급의 음모 관념―바스티유 감옥 습격을 일으킨―에 자극받아 연쇄적인 공황 사태를 일으켰으니 이를 대공포라고 부른다.(대공포 문서에서 상술) 이 대공포는 다시 1789년 8월 4일 국민의회의 봉건제 폐지 선언을 유발했다. 이렇게 혁명이 전국적으로 퍼지고 다시 중앙의 입법에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1790년 7월 14일에는 바스티유 감옥 습격을 기리며 전국의 국민방위대 부대들이 파리에 모여 프랑스 국민의 단결을 선언한 축제인 '연맹제'가 열렸다. 오늘날에도 7월 14일은 프랑스 혁명 기념일로서 프랑스 최대의 국경일이고 매해 기념 축제가 열린다.

  1. F. 퓌레 & D. 리셰, 프랑스 혁명사(일월서각,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