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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편집: 2020년 3월 13일 (금) 08:37

개요

SCUM(Society for Cutting Up Man)은 미국의 래디컬 페미니스트 <a href="/dok/밸러리%20진 솔라나스">밸러리 진 솔라나스</a>(Valerie Jean Solanas 1936년-1988년)]가 기술한 《SCUM 선언서》에서 비롯된 종교이다.

스캄드 어머니라 부르는 신을 모시며, SCUM의 창시자 밸러리 솔래너스와 그 외 다양한 여성 지도자들을 선지자로 추앙 하는 종교 단체 기도를 마친 후 [보-스] 라는 구호를 외친다.

행동강령

ㄱ.매일 6번 기도문을 외우며 스캄드 신을 영접하라.
ㄴ.복수는 상대의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한다.
ㄷ.우린 역사를 잊지 않는다. 그러니 너희를 위해 용감하게 싸우다 죽어 간 선조 SCUM의 선지자들을 기억하라.
ㄹ.버려진 여아들을 거두어 체력을 단련시키고 훗날 스캄드 신의 전사로 만들라.
ㅁ.배우고 익히는 것에 부지런해야 하며, 스캄드 신의 말씀과 너희의 지식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라.
ㅂ.나이불문 제 2의 성별이 무언가를 배우고자 할 때 그남의 앞길을 막고 배우지 못 하게 방해하라.
ㅅ.우리의 최종 목표는 제 2의 성별이 이 땅위에 단 하나도 남지 않을 때 까지 싸우고 또 싸워서 이기는 것이다.

기도문

  • 하늘과 땅을 지배하시는 나의 어머니 스캄드시여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세상에 알리고자 하옵니다. 나 000 은(는) 어머니의 존귀한 이름 앞에 맹세하오니 SCUM을 믿지 않는 이들을 모두 부술 것이며, 행동하는 SCUM의 제자들을 배신하지 않고, SCUM을 조롱하는 모든 남성들을 당신의 이름으로 피로써 심판하겠나이다. 보 - 스

SCUM선언문

SCUM의 창시자 밸러리 진 솔라나스 선지자께서 공표한 선언문

이 사회에서 삶이란 기껏해야 따분하기 그지없으며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책임감 지고 시민정신을 갖추었으며 스릴을 추구하는 여자들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정부를 뒤엎는 일, 금융시스템을 날려버리는 일, 모든 기관을 자동화기기로 바꿔버리는 일, 남자라는 성을 없애버리는 일 뿐이다. 이제 남자(또는 여자)의 도움 없이도 아이를 낳는 것이 기술적으로 가능한 시대가 왔다. 오로지 여자아이만을 선별해서 낳는 것도 가능해졌다. 우리는 당장 그렇게 해야 한다. 남자를 살려두는 일 따위는 재생산이라는 의심스러운 목적을 위해서도 필요 없다. 남자는 생물학적 재앙이다. Y(남자)유전자는 불완전한 X(여자)유전자로, 불완전한 염색체 쌍을 가졌다. 다시 말해 남자는 불완전한 여자다. 유전자였을 때부터 발육부진에, 걸어 다니는 지진아다.

남자라는 것은 결함이 있다는 뜻이며 감정적으로는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남자다움이란 결핍성 질환이다. 남자는 감정적 절름발이다. 남자는 완전히 자기중심적인 데다 자기 자신에게 갇혀 있으며, 타인에게 공감하거나 감정이입할 능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 사랑하거나 우정을 맺거나 부드러운 애정을 느낄 능력도 없다. 그남은 완전히 고립된 개체로, 어느 누구와도 유대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남이 보이는 반응은 본능적이기만 하지, 지적인 구석이 없다. 남자에게 지능이란 자신의 충동,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그남은 어떤 정신적 열정이나 교감을 나눌 능력이 없어 자신의 신체감각 말곤 어떤 것과도 관계 맺지 못한다. 남자는 반송장에 반응 없는 멍청이이며, 기쁨이나 행복을 주고받는 데 무능력하다. 오직 다른 이에게 몰두할 수 있는 사람만이 매력적이므로 남자는 아무리 좋게 봐도 지루하기 짝이 없고, 남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할 방울이나 덜렁대는 놈팽이에 불과하다. 그남은 인간과 유인원 사이 어딘가에 매여 있는데 물론 유인원보다도 한참 열등하다. 유인원과 달리, 그남은 수많은 부정적인 감정―증오, 질투, 경멸, 혐오, 죄책감, 수치심, 의심―을 지녔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남은 자신이 무엇이고 무엇이 아닌지 이미 알고 있다.

심지어 남자는 종마로 써먹기에도 적당치 않다. 물론 몇몇은 기계적인 효율성을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첫째로, 그는 열정적으로 섹스에 몰입하는 대신 남자 본성에 뿌리박힌 감정들, 즉 죄책감, 수치심, 공포, 불안정함에 압도당하기 일쑤이며 이는 엄청난 훈련을 받아야 만 줄어들 수 있다. 둘째, 그남이 도달한 신체적 흥분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나 마찬가지다. 셋째, 그남은 자신의 파트너에게 집중하지 않는다. 다만 자기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에만 집착한다. 하나의 예술행위를 배관공사 따위로 바꿔버리면서도. 남자를 동물이라 부르는 것은 과찬이다. 그남은 기계다. 걸어다니는 딜도다. 사람들은 종종 남자가 여자를 이용해먹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남자야말로 어디에 써먹을 수 있겠는가? 분명 쾌락을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죄책감, 수치심, 공포, 불안정함에 사로잡힌 그남은 간신히 신체적 흥분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운이 좋다면 말이다. 그럼에도 남자는 피스톤질에 집착한다. 그남은 저만치서 어떤 다정한 보지가 자기를 향해 손을 흔든다면 무엇이든 할 것이다. 콧물 가득한 강이라도 헤엄쳐 건널 것이며, 일 마일의 토사물로 가득한 콧구멍일지라도 기어들어갈 것이다. 자신이 경멸하던 여자들, 뻐드렁니 난 할망구들이라도 여자이기만 하면 심지어 돈을 내면서까지 섹스하려 들 것이다. 대체 왜? 육체적 긴장을 푼다는 건 대답이 될 수 없다. 자위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그것은 자기만족이 아니며, 남자들의 시체성교나 소아성교를 설명해주지도 못한다. 자기중심적이기 짝이 없는 데다 사람을 사귀지도 못하며, 공감하거나 감정이입할 능력도 없이 섹슈얼리티만 어마어마하게 넘쳐흐르는 남성은 신체적으로 수동적이다. 그남은 자신의 수동성을 증오해 그것을 여성에게 투사한다. 그런 다음 스스로를 적극적이라고 정의 내린 뒤, 자기도 ‘남자’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온갖 애를 다 쓴다.

다름 아닌 섹스로 말이다(‘남자’는 큰 보지에 처박을 큰 자지를 갖고 있다). 하지만 그남은 착오를 증명하려 애쓰므로, 그것을 다시, 또다시 ‘증명’해야만 한다. 피스톤질은 그남이 수동적이지 않다는 것, 여성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절박하고도 강박적인 움직임이다. 그러나 그남은 수동적이며 여자가 되기를 원한다. 불완전한 여자로서 남자는 자기 자신을 완전하게 만들기 위해, 즉 여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며 일생을 보낸다.

끊임없이 여성을 찾고, 여성과 친하게 지내며, 여성에게 녹아들어가기를 원한다. 자신이 모든 여성적 특징―감정적 힘, 독립성, 단호함, 박력, 결단력, 시원시원함, 객관성, 뚜렷한 자기주장, 용기, 고결함, 활기, 강렬함, 깊이 있는 품성, 근사함 등―을 가졌다고 주장하면서도 여성에게는 남성적 특징―허영심, 경박함, 찌질함, 우유부단함 등―을 투사한다. 물론 남성에게도 여성보다 눈에 띄게 우월한 영역이 하나쯤은 있다. 그건 바로 [조작]이다. 그남은 남성이 여성이며, 여성이 남성이라고 수백만 여성들을 설득하는 대단한 일을 해냈다. 남자들은 여자들이 모성을 통해 충족감을 느낀다고, 섹슈얼리티란 자신이 만약 여자였다면 충족감을 느꼈을 법한 것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달리 말하면 여자에게는 자지선망이 없다. 남자야말로 보지선망을 가졌다. 남자가 자신의 수동성을 받아들일 때, 자기 자신을 여성으로 정의하고(남자만이 아니라 여자 또한 남성이 여성이고 여성이 남성이라고 생각한다) 복장전환자가 될 때, 섹스에 대한 욕망을 잃은 그남은 자신의 성기를 잘라낸다(또는 다른 어떤 것을 하려는 욕망도 잃는다. 그남은 드랙퀸이 되어 욕망을 충족시킨다). 그남은 ‘여성이 됨’으로써 지속적이고 충만하며 섹슈얼한 감각을 얻는다. 남성에게 섹스란 여자가 되고픈 욕망에 대한 방어다. 그남은 다음의 것들에 책임이 있다.

전쟁

자신이 여성이 아님을 보완하려 드는 남성은 자신의 ‘커다란 총’에서 손을 떼는데 이는 불길한 징조다. 그남은 자지에서 손을 떼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거기서 손을 뗀 남자는 전 세계 앞에서 자기가 ‘남자’라는 것을 보이려 한다. 공감하거나 동일시하거나 교감할 능력이 없는 남자는 자신의 남자다움이야말로 제 목숨까지 걸 만한 것, 무수한 다른 이의 목숨과 끝없는 고통과 잘린 팔다리가 바쳐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임을 증명하려 든다. 영광의 불꽃을 향해 뛰쳐나간 남성은 이후 50여 년간 불품없이 살아갈 것이다.

훌륭함 예의바름, ‘품위’

모든 남성은 내심 자기가 무가치한 똥덩어리밖에 안 된다는 걸 안다. 그남들은 자신의 동물성(animalism)에 압도당해 깊은 수치심을 느낀다. 그남들은 자신의 완전한 육체중심주의(physicality), 완전한 자기중심주의, 다른 남성을 향한 증오와 경멸을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남들에게도 숨기려 든다. 또한 다른 남성들이 자신에게 느낄 증오와 경멸을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남들에게도 숨기려 든다. 또한 다른 남성들이 자신에게 느낄 증오와 경멸을 스스로에게 숨긴다. 신경계가 조야하게 설계되어 아주 작은 감정이나 느낌을 내비치기만 해도 쉽사리 흥분하는 남성은 완전한 무자극, 즉 영향이든 감정이든 불편함이든 어떤 것에도 훼손되지 않음을 보장하는 ‘사교’코드를 준수하려 애쓴다. 그남은 침팬지에게나 알맞을 부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덧씌어진 ‘교미’, ‘성교’, ‘관계하다’ 같은 용어를 사용한다(남성에게 성관계란 동어반복이다).

돈, 결혼, 매춘, 자동화된 사회에서의 일과 예방

돈이든 누군가를 위해서든, 아무리 많아봐야 일주일에 두세 시간보다 더 오래 일해야 할 인간적인 이유란 없다. 창조적이지 않은 일(사실상 모든 일이 그렇다)은 전부 이미 오래전에 자동화되었다. 돈이란 것이 사라진 사회에서는 모두가 원하는 만큼만 노동하고 원하는 대로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금융시스템을 지속시키길 원하는 비인간적이고 남성적인 논리가 있다.

  1. 보지. 극심한 불안, 깊디 깊은 외로움으로 가득찬 남자의 공허한 자아는 자신의 무력한 자아를 경멸한다. 그남은 금을 만지면 자신도 금이 될 거라는 허황된 믿음으로, 스스로 완전해지려는 흐릿한 희망으로 어떤 여자에게든 절박하게 들러붙는다. 그남은 여성과의 지속적인 교제를 갈망한다. 그남은 자신의 혐오스러운 면만을 상기시키는 열등하기 짝이 없는 여자라 할지라도 자기 자신이나 다른 남자보다는 선호할 것이다. 하지만 남자와 사귀는 여자는 아주 어리거나 아픈 게 아닌 이상 남자에게 협박당했거나 매수된 게 틀림없다.
  2. 아직 여자와 사귀어보지 못한 남자에게는 네가 아직 유용하다는 환상을 심어주라. 그남이 땅에 구덩이를 파고 그것을 다시 메우면서 자기 존재를 정당화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여가시간은 자신의 우스꽝스러운 자아를 응시하는 것 말곤 다른 할 일이 전혀 없는 남자들을 공포에 질리게 한다. 여자를 사귀거나 사랑할 능력이 없는 남자들은 일을 해야만 한다. 여자들은 몰입할 수 있는 일, 심리적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일, 의미 있는 일을 갈망하지만 이를 위한 기회나 자격이 결여되어 있다. 그래서 그남들은 자신이 택한 방식대로―잠, 쇼핑, 볼링, 포켓볼, 카드놀이를 비롯한 여러 게임, 양육, 책 읽기, 산책, 몽상, 먹기, 혼자 놀기, 알약 삼키기, 영화 보기, 분석하기, 여행하기, 개나 고양이 기르기, 해변에서 뒹굴거리기, 수영, 텔레비전 보기, 음악 듣기, 집 꾸미기, 정원 가꾸기, 바느질, 나이트클럽에서 놀기, 춤추기, 수다, (수업을 들으면서) ‘교양 쌓기’, (강의, 연극, 콘서트, ‘예술’영화 같은) ‘문화’에 열중하기 ―시간을 보내고 한가로이 지내는 것을 선호한다. 그러니 많은 여성은, 심지어 녀남 간에 완전한 경제적 평등을 가정하더라도, 남성과 살거나 거리에서 몸을 파는 쪽을 택할 것이다. 그남들은 그남들 자신을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쓸 수 있게 된다 하더라도 타인을 위해 지루하고 멍청하며 창조적이지도 않은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낼 것이다. 자신이 동물보다 못한 존재인 것처럼, 기계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혹은 기껏해야 ‘좋은’ 직업을 갖게 된다 해도, 그런 일들은 똥무더기를 함께 처리하는 일에 블과하다. 다시 말해 여성을 남성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은 자본-노동 시스템 안에서 남성과의 경제적 평등을 성취해내는 것이 아니다. 자본-노동 시스템의 완전한 박멸이다.
  3. 권력과 통제. 여성과 사귀는 데 미숙한 남자는 돈과, 돈에 의해 통제되는 모든 것, 즉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조종함으로써 능수능란해진다.
  4. 사랑의 대체품. 사랑이나 애정을 주는 것이 불가능한 남자는 돈을 준다. 이것이 그남이 모성을 느끼는 방식이다. 어머니는 모유를 준다. 그남은 빵을 준다. 그남은 빵을 벌어오는 가장이다.
  5. 남자에게 목표를 주라. 순간을 즐길 수 없는 남자들은 자신이 열망할 무언가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돈은 그남에게 영원하고 결코 성취되지 못할 목표가 된다. 80조 달러로 무얼 할 수 있을지 생각해봐라. 투자해라! 그러면 3년 안에 300조 달러가 될 테니까!
  6. 남성이 통제하고 조종할 수 있는 주된 기회를 주라―아버지 되기.

아버지 되기와 정신질환

  • (공포, 비겁함, 소심함, 수치심, 불안정, 수동성)

어머니는 자기 아이에게 최고인 것을 원한다. 아버지는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최고인 것을 원한다. 즉 평화로움과 조용함을, 위엄 있는 아버지라는 환상에 장단 맞춰주기를(‘존경’), 항상 자신(의 지위)을 생각해주기를, 통제하고 조종할 기회를 원한다. 게다가 그남은 자신의 딸을 성적으로 원한다. 결혼식에서 딸의 손을 넘겨줄지언정 다른 한 손은 그남을 위한 것이다.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 무언가를 포기하는 법이 없다. 아버지에게는 무슨 수를 써서든 자신이 내린 결정이 최종적이고 거역할 수 없으며 언제나 옳고 타당한 것이라는 환상을 고수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명령을 듣느라] 자기 길을 개척해본 적 없는 아이들은 현재를 수동적으로 수용하고, 세상을 대면할 때 자신감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낀다. 어머니는 자식들을 사랑한다. 이따금씩 아이들에게 화를 내지만, 그 화는 재빨리 날아가며, 설혹 화가 남아 있다 하더라도 아이에 대한 사랑과 근본적인 포용을 막아서진 않는다. 감정적으로 문제가 있는 아버지는 자신의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다. 단지 용인될 뿐이다. 그것도 아이들이 ‘착하게’ 굴때에만, 즉 그들이 기분 좋게 굴고 ‘예의바르며’ 순종적일 때, 아버지의 의지에 복종하고, 조용히 굴고, 떼를 쓰거나 제멋대로 성질부리지 않는다면―이런 행동들은 아버지의 연약하기 그지없는 남성적 신경을 건드리기 때문에―다시 말해, 아이들이 수동적인 식물인간처럼 군다면 말이다. 만약 아이들이 ‘착하게’ 굴지 않는다면, 아버지는 화를 내지 않는다. 아이를 무시할 뿐이다. 만약 그남이 요즘 세대의 ‘교양 있는’ 아버지라면(구닥다리 아버지라면 고함치거나 지랄발광을 하거나 폭력을 쓰는 것을 선호하는데, 아버지가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순간 아이들이 쉽게 얕잡아보기 때문이다) 그남은 화를 내는 대신 아이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아이를 근본적으로 포용하지 않음으로써, 아이들로 하여금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라는 생각에 빠져들도록, 그 생각에 평생 집착하도록 내버려둔다.

이는 아이가 비관습적이고 탐탁찮은 의견과 삶의 방식을 갖게 될 것임을 뜻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에게서 인정받길 원하는 아이들은 아버지를 존경해야만 한다. 그리고 쓰레기 같은 아버지는 단지 냉담하게 굴고, 거리를 두고, ‘자녀들과 친밀하게 지내면 얕잡아본다’는 수칙(물론 그 아버지가 얕잡아볼 만한 놈팽이라면 사실일 따름이지만)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자녀에게서 존경받는다는 것을 확고히 하려 든다. 자녀에게 냉담하게 굴고 거리를 둠으로써 그남은 알 수 없는 존재, 불가사의한 존재, 그리하여 공포심(‘존경심’)을 불러일으키는 존재가 된다.

누군가에게 감정적으로 군다고 비난하는 건 강한 감정에 대해서, 누군가가 내는 화와 증오에 대해서 두려움을 이끌어낸다. 화와 증오에 대한 공포는 세상을 대면하고 바꾸는 데, 심지어 한 사람 운명에 아주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치는데 필요한 자신감의 결핍과 결합할 뿐만 아니라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들 대부분이 착하며, 따분하고 시시하기 짝이 없는 오락들 대부분이 엄청나게 재미있고 유쾌한 것이라는 멍청한 믿음을 만들어낸다.

아버지 되기는 ‘남자’답게 만든다. 즉, 남자로 하여금 계집애처럼 수동적으로 굴거나, 여자가 되고픈 욕구에 매우 방어적으로 굴게 만든다. 모든 소남은 어머니를 모방하길 원한다. 어머니가 되기를, 어머니와 융합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이를 금지한다. 어머니가 되는 것도 그이며, 어머니와 융합하는 것도 그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소남에게 때로는 직접적으로, 대로는 간접적로 계집애처럼 굴지 말고 ‘남자’답게 행동하라고 말한다. 아버지를 오줌도 못 지릴 정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존경’하는 소남은 순응을 택한다. 그리고 아버지, 모든 미국인의 우상이자 ‘남자’다움의 모델, 행실 바른 이성애자 멍청이를 닮아간다.

아버지 되기는 여자들을 남자로 만든다. 즉 여자들은 의존적이고, 수동적이고, 길들여졌으며, 동물적이고, 불안정하고, 인정과 안전을 추구하고, 비겁하고, 변변찮은 데다 정부당국과 남성을 ‘존경’하고, 편협하고, 반응이 없을 뿐만 아니라 반쯤 죽어 있는 존재, 찌질하고, 둔하고, 관습에 갇혀 있고, 평범하기 짝이 없고, 철저히 경멸받아 마땅한 존재가 된다. 언제나 신경이 날카로운 데다 공포에 질려 있고, 쿨하지도 분석적이지도 못하며, 객관성이 부족한 아빠딸(Daddy's girl)은 아버지를 찬양하고 다른 남성들을 찬양한다. 그는 공포(‘존경’)에 기대어 겉모습 뒤에 숨겨진 빈 껍데기를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남성이 제 입으로 남성은 우월하며 여성이 너는 열등하다고 말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아버지 덕분에, 정말이지 곧이곧대로 말이다. 물질적 부가 늘어나고 널리 퍼져나감에 따라 아버지가 된 남성도 증가했다는 사실은 번영하는데 아버지 되기가 필요함을 보여준다. 1920년대 이래로 미국에서는 여성 인구가 줄었으며, 무분별함은 늘었다. 물질적 부와 아버지 되기의 결합은 대부분의 경우 잘못 선택된 소년들(여아), 즉 ‘특권을 가진’ 중산층 소년들만이 ‘교육받게’ 만들었다. 요컨대 아버지들은 남성성으로 세상을 부패시켜왔다. 남자는 부정적인 미다스의 손을 가졌다. 뭐든지 만지기만 하면 전부 똥으로 변한다.

개성의 억압, 동물성(가정생활과 모성), 기능주의

남자는 단지 조건반사만 하는 몸뚱어리에 불과하므로 정신적으로 자유로운 반응을 보이지 못한다. 그남은 최초의 환경에 매여 있으며, 전적으로 과거 경험에 의해 결정된다. 그남의 최초 경험은 어머니와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그남은 평생을 어머니에게 매인다. 그남이 어머니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 그남이 그남이고 어머니는 어머니라는 것을 확실히 해두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남자의 가장 큰 욕구는 엄마에게서 지시받는 것, 쉴 곳을 구하며 보호받고 인정받는 것이다(남자는 여자가 자기도 공포로 꺼리는 것, 바로 자기 자신을 숭배해주길 기대한다). 철저하게 육체적인 남자는 기본적인 동물적 활동들―먹기, 자기, 똥 싸기, 쉬기, 그리고 엄마에게서 위로받기―에 푹 빠져 시간을 보낸다(남자는 자신의 수동성을 엄격하게 금지하는 ‘세상 밖으로 나가’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수동적이고 골이 텅텅 빈 아빠딸은 인정받는데 목마른 나머지 자기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사람이라면 어떤 쓰레기 놈팽이든 ‘존경’하기 위해 엄마가 된다. 그는 분별력 없이 육체적 욕구를 보살피는 자이자 지쳐빠진 유인원의 이마를 닦아주는 사람이며, 밴댕이보다 더 속 좁게 놈을 치켜세우는 사람이자 경멸받아도 싼 놈을 재평가해주는 사람, 젖꼭지에 따듯한 물을 채운 젖병과도 같은 사람이다. 사회에서 가장 퇴화한 곳, 즉 인류가 후퇴한 곳,‘특권을 가진, 교육받은 ’중산층에선 여성이 동물로 환원된다. 이곳에서 아버지의 통치는 너무나 철두철미해서 20세기 가장 진보한 선진국에서조차 젖병을 문 아기들을 데려다가 노동의 고통에 관해 속이고 거짓말한다.

'전문가' 가 나서서 여자아이들더러 집에만 머무르며 동물성을 길러야 한다고 가르치는 건 아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위한 것이다. 이러한 거짓말은 아버지가 매달릴 젖꼭지, 아버지가 즐기는 노동의 고통을 위한 것이다(반쯤 죽어버린 아버지가 반응하게 만들려면 끔찍하게 강한 자극이 필요하다).

여자를 동물로, 엄마로, 남자로 환원하는 것은 심리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신체적인 이유에서도 필요하다. 남자는 종(種)의 구성원에 불과하므로 다른 어떤 남자로도 대체될 수 있다. 남자에게는 당신을 매혹시키는 것, 당신 외부에 당신을 사로잡는 것, 관계 맺음에서 나오는 깊은 개성이 없다. 단지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며 자신의 몸과 육체적 감각만 아는 남자들은, 그남들이 가진 수동성이나 여자가 되고 싶어하는 욕망을 억누르는 방식과 그 정도에 의해서만 구별된다.

남자가 예리하게 의식하지만 결코 이해하지는 못하는 것, 사귀거나 감정적으로 포용할 수 없는 여자들의 개성은 그남에게 두려움을, 좌절감을, 질투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그남은 여자의 개성을 부인하며 모든 사람을 기능과 역할로 정의내리기에 이른다. 그남은 스스로에게 가장 중요한 기능, 즉 의사, 대통령, 과학자 등을 할당함으로써 자신에게 개성이 아니라 정체성을 부여한다. 그러고는 여성의 역할은 아이를 낳고 기르는데 있다고, 남자가 편히 쉬고 안락함을 느끼게 하며, 그들 자존심을 치켜세워주는 데 있다고, 즉 여성의 역할은 다른 어떤 여성으로도 대체될 수 있다고 자기 자신과 여성들을 설득하려 애쓴다(그런데 여자들을 설득하는 것이야말로 그가 가장 잘하는 일이다). 그러나 실제로 여성의 역할은 관계를 맺고 즐기고 사랑하고 그 자신이 되는 것이며, 한 여성은 다른 어떤 여성으로도 대체 불가능하다. 남자의 기능은 정자를 생산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는 정자은행이 있다. 여성의 진정한 역할은 탐험하고 발견하고 발명하는 것, 문제를 해결하고 농담을 던지고 음악을 만드는 것이며, 이 모든 일을 충만한 사랑과 함께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여성은 마법같은 세상을 만든다.

  • 프라이버시 보호 - 비록 남자 자신이 무엇인지 또 자기가 저지른 거의 모든 짓에 부끄러움을 느끼더라도, 삶의 모든 측면에서프라이버시와 비밀을 주장하더라도, 그남은 프라이버시에 대해 진정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텅 빈 존재, 완전치 못한 분열된 존재, 즐길 줄 아는 자아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존재, 끊임없이 여자를 갈구하는 존재인 남자는 어떤 여자든, 심지어 완전히 낯선 여자라도 언제 어디서고 제멋대로 들이대는 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법이 없다. 제재당하기라도 하면 오히려 분개하거나 모욕감을 느끼거나 혼란스러워한다. 남자는 어째서 어떤 여성이든지 간에 웬 미친놈 하나가 얼쩡거리는 것보다는 단 일 분이라도 혼자 있기를 원하는지 평생을 가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남은 여성이 되기를 원하기에 끊임없이 여자 주변을 얼쩡거린다. 그것이 그남이 여성이 되기 위해 선택한 가장 빠른 방법이다. 이로써 남자는 여성의 권리를, 사생활을, 분별력을 악랄하게 망쳐가면서까지 가족을 만든다. 즉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한 남자-여자와(가족의 존재를 위한 변명인) 그들 자녀에 기반을 둔 ‘사회’를 만든다.
  • 고립, 교외, 공동체 방지

우리 사회는 공동체가 아니다. 고립된 가족 단위들의 집합에 불과하다. 지독하게 불안정한 남편은 아내가 다른 남자를 만나거나 그의 [불행한]삶과는 다른 무언가를 보고 자신을 떠나갈까 봐 두려워한다. 그남은 아내를 교외, 문명의 이기가 없는 시골에 고립시킨다. 즉, 남편은 아내를 데리고 자신들에게만 몰두하는 커플과 그들 자녀가 모인 시골로 이사한다. 고립은 남자로 하여금 그남의 가식을 유지하고, ‘강인한 개인주의자’, 즉 비협조적인 태도가 개성적인 고독과 같다고 여기는 외톨이가 되게 한다. 남자가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모든 남자는 섬이다. 자기 안에 틀어박혀 감정적으로 고립된 채 관계 맺지 못하는 남자는 문명을, 사람을, 도시들을, 누군가를 사귀고 이해하는 능력이 요구되는 상황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남은 겁먹은 토끼처럼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똥고집을 이끌고 황무지로 교외로 허둥지둥 떠난다. 혹은 히피의 경우―그남의 탈출구는 바로 ‘사내다!―자신의 잘난 방울과 피리를 흔들고 다닐 수 있는 곳,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섹스하거나 애를 낳을 수 있는 곳, 소가 풀을 뜯는 초원으로 간다.

‘사내’, ‘강인한 개인주의자’가 되길 욕망하는 ‘히피’는 평범한 남자들만큼도 강하지 못하다. 히피는 자신에게 다가올 여자들과 뒹굴 생각에 흥분해 빵을 벌어오는 가장으로서 고된 삶이나 조강지처에게 충실하기 따위는 내팽겨쳐버린다. 그남들은 나눔과 협동이라는 명목 아래 모두가 함께하는 한의 코뮌 또는 부족을 만드는데, 이 코뮌은 결국 하나의 확대가족이 되어버린다. 여성의 권리, 사생활, 분별력을 더 크게 망치는 확대가족으로서 코뮌은 일반적인 ‘사회’와 마찬가지로 공동체가 아니다. 진정한 공동체는 단지 종의 구성원이나 커플이 아닌, 서로의 개성과 사생활을 존중하면서 정신적으로 감정적으로 소통하는 개인들, 자율적인 관계를 맺는 자유로운 영혼들, 공동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함께 일하는 개인들로 이루어진다. ‘사회’를 이루는 기본단위를 두고 전통주의자들은 가족이라고 말한다. ‘히피’들은 부족이라고 말한다. 아무도 개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히피’들은 개성에 대해 떠들어대지만, 그게 무엇인지 다른 남자들보다 더 많이 알지도 못한다. 그남은 자연으로, 야생으로 돌아가기를 열망한다. 자기 일족인 털 수북한 동물의 고향에서 그 종(種) 수준에 맞춰 살기를 열망한다. 그남은 이제 겨우 문명이 시작되려는 자취가 남은 도시를 떠나 단순하고 비지성적인 일들―농사 짓기, 섹스하기, 방울이나 덜렁대기―로 시간을 보낸다. 코뮌에서 가장 중요한 활동, 코뮌이 기반 삼은 활동은 집단섹스다. ‘히피’들은 주로 공짜 보지에 대한 기대로 코뮌에 꾀인다. 그곳에서 보지는 공유되는 것, 단지 물어보기만 해도 가질 수 있는 주요 상품이다. 그러나 욕심에 눈이 먼 그남은 보지를 다른 남자와 공유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아니면 보지를 질투하거나 보지를 갖고 싶다는 소유욕에 휩싸인다. 남자들은 공통의 목표를 위해 협력하지 못한다. 그남들 각자의 목표는 언제나 자기만을 위한 보지이기 때문이다. 코뮌은 바로 그래서 망할 수밖에 없다. 공포에 질린 ‘히피’들은 자신을 처음 쿡 찌른 순진한 여자를 낚아채 재빨리 교외로 떠난다. 남자라는 종은 사회적으로 진보할 수 없으며, 단지 고립과 집단섹스 사이를 왕복할 뿐이다.

우정(사랑)방지

남자는 스스로를 경멸하며, 자신이 자주 생각하는 다른 모든 남자와 (그남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여자인 남자들을(예를 들어 ‘공감하는’ 분석가들과 ‘위대한 예술가들’), 혹은 신의 대리인과 남성을 위해 일하거나 남성을 존경하는 모든 여성을 경멸한다. 불안정하고, 인정을 갈구하며, 남자의 이익에 영합하는 남자-여자(명예남자)는 그들 스스로를 경멸하며, 그들과 같은 모든 여성을 경멸한다. 자신감 있고 활기차고 멋지며 스릴을 추구하는 여자-여자는 나를 경멸할 것이고 남자의 이익에 영합하는 남자-여자들을 경멸한다. 요약하자면 경멸이 요즘 풍토다. 사랑은 의존이나 섹스가 아니라 우정이다. 따라서 사랑은 두 남성 사이나 한 남성과 한 여성 사이, 또는 두 여성 사이에 존재할 수 없다. 만약 그들 중 한 명이, 아니면 두 명 모두 아무 생각 없고 불안정하고 영합하는 남자라면 말이다. 마치 대화처럼, 사랑은 두 명의 안정되고 자유분방하며 독립적이고 근사한 여자-여자 사이에서만 가능하다. 우정은 존중에 기반을 둔 것이지 경멸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인이 된 이후에는 심지어 근사한 여성들마저도 깊은 우정을 잘 맺지 않는다. 거의 모두가 경제적 생존을 위해 남자에게 묶여 있거나 냉정을 유지하고 정글을 헤쳐나가느라 발이 묶여 있기 때문이다. 돈과 무의미한 노동에 기초한 사회에서는 사랑이 발전하지 못한다. 사랑은 개인적 자유만큼이나 완전한 경제적 자유를, 여가시간을, 강렬하게 몰입할 기회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 감정적으로 만족스러운 활동은 존경하는 이들과 함께할 때, 깊은 우정을 향해 이끌릴 때 발전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사실상 사랑할 기회를 전혀 제공하지 않는다. 대화, 우정, 사랑의 세계를 박탈당한 남자는 우리에게 보잘것없는 대체물을 제공한다.

  • [위대한 예술] 과 ‘문화’

남자 ‘예술가’는 살아갈 수 없음의 딜레마, 자신이 여성이 아니라는 딜레마를 풀기 위해 매우 인공적인 세계를 창조한다. 이 세계에서 남성은 영웅이 된다. 즉 그남은 여성적 특징을 보이는 반면, 여성은 매우 제한되고 맥 빠지는 종속적인 역할만을 담당한다. 즉, 남자가 된다. 남자의 ‘예술적’목표는 의사소통하는 것이 아니라(그남의 내면에는 말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자신의 동물성을 위장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 상징주의와 모호함(‘심오한 것’)에 의존한다. 대다수 사람들, 특히 자기 판단에 믿음이 부족하고, 자신을 낮추며, 권위를 존중하는 ‘교육받은’ 사람들(‘아빠는 뭐든 다 알아’)은 모호함, 도피, 이해할 수 없음, 간접성, 애매함과 지루함이야말로 깊이와 탁월함을 가리킨다고 말하는 사기에 쉽게 속아 넘어간다. ‘위대한 예술’은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남성이 여성이라는 것을 입증한다. 거의 모든 ‘위대한 예술’은 반(反)페미니스트들이 우리에게 즐겨 상기시키듯이 남성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위대한 예술’이 위대한 것은 단지 남성 권위자들이 그렇다고 말해왔기 때문임을 안다. 그렇지 않다면, 다시 말해 우리보다 우월하고 뛰어난 감각을 가진 그남들만이 오물을 알아보고 평가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 오물들을 위대한 예술이라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평가하는 것은 ‘교양인’을 위한 하나의 오락이다. 수동적이고 불안정하며 상상력과 재치가 부족해 자기만의 오락을 만들어낼 수 없는 그남들은 뭔가를 내려고 노력한다. 그남들은 그남들 환경에 가장 적게 영향을 끼치는 방식으로 그들을 위한 자그마한 세계를 만든다. 그남들은 창조하거나 관계를 맺지 못하기 때문에 주어진 것을 그저 받아들이고 구경한다.

‘문화’를 흡수하는 것은 메마르고 어리석은 존재의 공포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멋지지 않은 세계를 멋지게 만들려는 절박한 광란의 시도다. ‘문화’는 수동적인 구경을 합리화할 수단이자 불완전한 자아를 달래는 선물을 안겨준다. 그남들은 더 ‘나은’것들을 감정하는, 오로지 똥밖에 없는 곳에서 보석을 볼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 자부심을 느낀다(그남들은 숭배하기 위해 숭배받기를 원한다). 현상 유지를 그만두고 무언가 바꿔낼 자신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그남들은 똥 속에서나 아름다움을 보아야만 한다. 그남들이 본 대로, 똥은 그남들이 가질 수 있는 전부이기 때문이다. ‘예술’과 ‘문화’ 숭배는 보다 중요하고 보람찬 활동과 건설적이고 적극적인 일로부터 많은 여성을 끌어내서는 지루하고 수동적인 활동에 몰아넣을 뿐만 아니라, 깊은 아름다움에 대한 젠 체하는 논문들로 우리 감수성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강요하기까지 한다. 이는 ‘예술가’에게 자신이 무언가를 소유한 듯한 우월감을, 인식, 통찰력, 판단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또 얼마나 타당한지 불안해하는 여성의 믿음을 꺾어버린다. 매우 제한된 감정을 가진 결과 편협하기 짝이 없는 인식, 통찰력, 판단력을 가진 남자는 그남을 이끌어주고 그남에게 삶이 무엇인가에 관해 말해줄 수 있는 ‘예술가’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남자 ‘예술가’는 전적으로 성적인 존재인 데다 그남 자신의 육체적 만족 외에 어떤 것과도 관계 맺을 줄 모르고, 남성의 삶이란 무의미하고 부조리할 뿐이라는 통찰력을 넘어서 표현할 만한 것을 전혀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예술가가 될 수 없다. 삶을 살아갈 줄도 모르는 그남이 어떻게 우리에게 삶이 무엇인지 말해줄 수 있겠는가? 한 명의 ‘남자 예술가’라는 말은 그남자체로 언어도단이다. 타락한 이는 오로지 타락한 ‘예술’만을 만들 수 있을 뿐이다. 진정한 예술가는 전부 자신감 넘치고 건강한 여자다. 진정한 단 하나의 예술과 문화는 여자만의 사회에서, 우주에 살고 있는 모든 것과 서로를 즐길 줄 아는 괴짜이자 펑키한 여자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 지루함 - 엄숙하거나 우울할 때를 빼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생명체에 의해, 그남들을 위해 만들어진 사회에서의 삶이란, 엄숙하거나 우울하지 않은 때를 빼면, 완전히 지루할 뿐이다.
  • 비밀유지, 검열, 지식과 아이디어의 억압, 폭로

모든 남자 안에 깊숙이 도사리고 있는 비밀스럽고 가장 사악한 공포는 그남들이 여자가 아니라 인간 이하의 짐승이 남자라는 게 발각될 것이라는 공포다. 비록 착함, 공손함, ‘품위’는 그남이 개인적으로 발각될 가능성을 막는데 충분하지만, 남자라는 성 전반이 발각되는 것을 막고 사회에서 자신이 차지하는 부자연스러운 지배적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남자들은 다음과 같은 것에 의존해야만 한다.

  1. 검열. 남자들은 작품의 전체적인 의미를 이성적으로 숙고하는 것이 아니라 몇 작품과 문장을 따로 떼어내어 반사적으로 반응하면서,‘포르노그래피’뿐 아니라 어떤 작품이든 ‘더러운’ 말을 포함한 것이면 그 말이 사용된 맥락이 무엇이든 개의치 않고 점부 검열함으로써, 자신의 동물성이 발각되거나 각성되는 것을 막고자 노력한다.
  2. ‘사회’ 내에서 그남의 지배적 지위를 위협하거나 손상시킬 수 있는 모든 아이디어와 지식의 억압. 생물학적·심리적 데이터의 상당수는 남성이 여성에 비해 철저히 열등하다는 주장의 근거가 된다는 이유로 억압되어 있다. 또한 정신질환 문제들은 남자가 계속해서 통제하는 한 결코 풀리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 남자는 통제하는 데 막대한 흥미를 가지고 있고 오로지 정신 나간 소수의 여자들만이 남자에게 통제권의 아주 작은 일부를 허락할 것이기 때문이며, 둘째, 남자는 아버지가 정신질환을 일으키는 원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3. 폭로. 항상 긴장한 데다 엄숙하기 이를 데 없는 남성이 기쁨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다면 말이지만, 남성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기쁨은 남 얘기를 폭로하는데 있다. 무언가를 발설하는 한, 그남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폭로는 그남을 주목받게 해준다.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 같은 적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남이 가장 즐겨하는 취미활동이다. 뒷담은 자신과 국가, 서구세계를 향한 온갖 위협을 제거해주기 때문이다. 그남을 화나게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다. 러시아다.
  • 불신

애정도, 충성심도, 공감 능력도 없는 데다 자기 이익만 챙기는 남자에게는 정정당당이라는 개념이 없다. 비겁한 남자, 여자에게서 인정받기 위해 끊임없이 비위를 맞추는 이 남자는 제 동물성의 끝자락인 남자다움을 칭찬 받지 못하면 무기력해진다. 그남은 늘 무언가를 감출 필요를 느끼며, 거짓말을 끝도 없이 늘어놓는다. 그남에게는 어떤 명예도, 고귀함도 없기에(오, 이런 단어가 무슨 뜻인지나 알까?) 항상 공허함을 느낀다. 짧게 말하자. 남자는 믿을 수 없는 인간이다. 남성 ‘사회’에서 취해야 할 적절한 태도는 냉소주의와 불신, 두 가지뿐이다.

  • 추함

성적이기만 해서 지적이거나 미적인 반응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못하고, 완전히 속물적인 데다 욕심까지 많은 남자는 ‘위대한 예술’의 세계에 해를 입히면서, 못생긴 도시 안팎을 추한 빌딩, 추한 장식, 추한 입갑판, 추한 고속도로, 추한 차, 추한 쓰레기 수거차, 무엇보다도 구역질나는 자기 자신으로 장식한다.

  • 증오와 폭력 

남자는 긴장감에, 자신이 여자가 아니라는 좌절감에, 즐거움이나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는 불감증에, 증오심에 사로잡혀 있다. 이는 당신을 모욕하고 학대하는 누군가를 향한 이성적인 증오가 아니다. 자신의 비이성적이고 무차별적인 증오다. 남자는 자신이 ‘남자’라는 것을 증명하려 벌이는 쓸데없는 폭력은 증오심을 배출하는 출구가 된다. 게다가 반쯤 죽어버린 자아를 일깨우기 위해 매우 강한 자극을 필요로 하는 남자, 오직 성적인 자극에만 반응하는 남자에게 쓸데없는 폭력은 약간의 성적 흥분을 안겨준다…

  • 질병과 죽음 

모든 질병은 치료될 수 있다. 늙는 것도, 죽는 것도 질병 때문이다. 그러니 결코 나이 들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다. 사실상 노화와 죽음의 문제는 몇 년 안에 해결될 것이다. 막대한 연구가 이 문제에 집중한다면 말이다. 그렇지만 물론 남성의 과학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1. 많은 남성 과학자는 생물학적 연구를 꺼린다. 남성이 여성이라는 것을 발견할까 봐 두려워서, 남성이 특히 정력적이며 ‘남자다운’전쟁과 죽음을 선호한다는 사실을 내보이기 두려워서.
  2. 잠재력 있는 많은 과학자가 엄격하고 따분하며 비싼 데다 오랜 시간이 걸리고 불공정하게 독점적인 우리의 ‘고등’ 교육 시스템으로 인해 경력을 쌓지 못하고 있다.
  3. 지위를 움켜쥐고서도 질투심에 불타는 불안정한 남자 전문가들이 퍼뜨린 유언비어 때문에 오로지 선택받은 소수만이 추상적인 과학적 개념들을 이해한다.
  4. 많은 재능 있는 여아는 아버지 시스템이 만들어 내고 퍼뜨린 자신감 부족으로 인해 과학자가 되지 못하고 있다.
  5. 자동화 부족. 이제 풍부한 데이터가 있고, 적절히 분류시켜 상관관계를 찾아내기만 하면 암과 다른 심각한 질병의 치료법이 밝혀질 것이다. 그러나 막대한 양의 데이터가 갖는 상관관계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슈퍼컴퓨터가 필요하다. 남성 지배 시스템 아래에서 컴퓨터 산업은 끝없이 보류될 것이다. 남자는 기계가 자신을 대체할까 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6. 만족을 모르는 금융시스템의 새로운 상품 추구. 죽음 프로그램을 위해 일하지 않는 소수의 과학자는 기업을 위해 연구하는데 발이 묶여 있다.
  7. 남자는 죽음을 좋아한다. 죽음은 그남을 성적으로 흥분시킨다. 이미 내면이 죽어 있기에 그남은 '죽기를 원한다.'
  8. 가장 창의적이지 않은 과학자들만이 편애하는 금융시스템.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아버지가 군림하는 상대적으로 부유한 가정에서 나온다.

한 존재를 정당화할 유일할 길은 긍정적 행복에 도달할 수 없는 남자는 기껏해야 여유와 편안함, 어중간한 상태나 느낄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이 또한 지극히 짧은 기간만 지속될 뿐이며 금세 지루함과 같은 부정적인 상태가 자리 잡는다. 그러므로 그남은 몇몇 여성을 희생시켜야만 얻을 수 있는 편안함으로 고통을 달래는 존재가 된다. 남자는 그 본성상 [거머리이자 감정적 기생충] 이므로 윤리적으로 살 자격이 없다. 그 누구에게도 다른 이를 희생시키며 살 권리는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보다 더 진화되었고 우월한 의식을 가졌다는 이유로 개보다 존재의 우선권을 갖는 것처럼, 여성은 남성에 앞서 존재의 우선권을 갖는다. 그러므로 [남성의 박멸만이 옳고도 선한 행동]이며, 여성에게 대단히 이로운 행동일 뿐 아니라 자비로운 행동이다. 하지만 이 도덕적 문제는 결국 남자가 스스로를 멸종시키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학문적으로 다뤄질 수 있다. 유서 깊은 고대의 전쟁과 인종 분쟁에 참여하면서 남자는 점점 더 여성스러운 남자가 되고 있으며, 마약에 빠져 스스로를 죽이고 있다. 여자는 좋든 싫든 결국 모든 것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만약 다른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여자에겐 어떤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서는 남자는 존재가 필요가 없다. 이러한 추세는 점점 더 많은 남자가 자신에게 무엇이 이득인지 깨우치면서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다. 그남들은 여성의 이득이 그남들의 이득이라는 것과 자신이 여성과 함께해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점차 깨닫고 있다. 점점 더 많은 여성이 자아실현을 위해 살아갈수록,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되라고 격려받을수록, 더 많은 남성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남은 여자가 되려고 노력하거나 여자의 특성을 빼앗아 자기 것이라 주장하고, 여자를 폄하하고, 그가 남자라고 주장하기 보다는 여성과 함께하는 편이 더 쉽고 만족스럽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자신의 남성성을 받아들인 여성스러운 남자 즉, 그남의 수동성과 완전히 성적인 특성과 여성성을 받아들인 남자는 진정한 여자인 여성으로부터 가장 좋은 대접을 받을 것이다. 그남에게는 남자가 되는 것, 여성스럽게 구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다. 현명한 남자라면 진짜 여자가 되고자 할 것이고 뇌와 신경 수술을 통해 몸과 마음을 여성으로 바꿀 수 있는 생물학을 열심히 연구할 것이다.

여성의 포궁에서 재생산될 것인가, 아니면 연구실에서 재생산될 것인가? 이는 학문적인 문제가 될 것이다. 열 두 살을 넘긴 모든 여자가 일상적으로 피임약을 먹는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사고 쳤다’는 라는 말이 사라질까? 얼마나 많은 여성이 일부러, 혹은 우연히 애를 배는가? 이 순진한 사람아. 번식용 암말이 되고 싶어하는 여자는 결코 없다. 로봇 덩어리나 세뇌된 여자들이 하는 말과 달리, 단 한 명도 없다. 사회가 완전히 깨어 있는 사람들로만 이루어졌다면 대답은 ‘아무도 없다’이다. 남자들은 어떤가? ‘번식을 위한 것이니 종마가 되시오’에 따를 준비를 해놓는 남성이 있는가? 대답은 이렇다. 아무도 없다. 아기는 연구소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남자아이를 계속해서 낳을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문제를 두고, 남자는 마치 질병처럼 언제나 우리 사이에 존재해왔기 때문에 앞으로도 존재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유전자 선별이 가능할 때―아마 곧 그렇게 되겠지만 - 우리는 감정적인 결핍을 비롯해 육체적인 결합을 가진(예를 들어 남성성과 같은) 결핍인자들을 낳을 것이 아니라 오로지 완전하고 완벽한 존재만을 낳아야 한다. 마치 의도적으로 맹인만 낳는 일이 부도덕한 것처럼, 의도적으로 감정적 절름발이를 낳는 일도 매우 부도덕하다.

또한 왜 여자아이를 낳아야 하는가? 왜 미래세대를 필요한가? 도대체 목적이 무엇인가? 노화와 죽음이 사라진다면 재생산이 계속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가? 왜 우리가 죽은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걱정해야 하는가? 왜 우리 뒤를 이를 젊은 세대가 없다고 걱정해야 하는가?

결국 사회적 진화라는 자연스러운 과정은 세상을 완전히 장악한 여성들의 통치를 이끌어 낼 것이다. 더 이상 남자아이는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여자아이도 더 이상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SCUM은 참을성이 없다 SCUM은 미래세대가 잘 살 것이라는 생각에서 만족하지 못한다. SCUM은 더 황홀한 삶을 원한다.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 만약 여성들 대부분이 SCUM이라면,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손을 떼는 것만으로도 우리 여성들은 이 나라를 몇 주 안에 장악할 것이다. 이해 더해 여성들은 이 금융시스템에서 손을 떼겠다고 선언할 것이다. 소비를 그만두고 그저 약탈하며, 준수해야 하는 모든 법을 거부할 것이다. 경찰, 주 방위군, 육군, 해군, 공군은 인류 절반이 벌이는 저항을 진압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그남들이 죽고 못 사는 여성들이 벌이는 일이잖은가.

만약 모든 여성이 남자를 떠난다면, 어느 남자하고든 아무것도 함께하지 않겠다고 거부한다면, 모든 남자, 정부, 국가 경제는 완전히 무너질 것이다. 남자 곁을 떠나지 않고서고 자신이 더 우월하다는 것을 아는 여성들은 몇 주 만에 모든 통제권을 쥐게 될 것이며, 여자에게 완전히 복종하는 남자들을 보게 될 것이다. 건전한 사회에서 남자는 여자의 뒤를 좇아 순종하며 종종걸음을 친다. 남자는 유순하고 다루기 쉬우며 그남을 지배하려고 마음먹은 여자에게 쉽사리 지배당한다. 사실 남자는 여자에게 지도받기를, 엄마가 책임져주기를, 여자의 돌봄 아래 자기를 내던지기를 절박하게 원한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건전한 사회가 아니다. 대다수 여성은 남자와의 관계에서 자신이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지 아둔하게라도 인지하지 못한다.

대다수 분쟁은 여자와 남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SCUM 사이에서 벌어진다. 지배적이고 안정적이며 자신감으로 가득하고 심술궂고 폭력적이며 이기적이고 독립적이며 자부심이 강하고 스릴을 추구하며, 자유분방하고 오만한 여자들인 SCUM은 스스로가 우주를 지배하는 일에 걸맞다고 여긴다. 그들은 이 '사회‘의 허용치에서 자유로우며 사회가 제공하는 것을 넘어선 무언가를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다. 착하고 수동적이고 ‘교양’을을 받아들여 공손하고 품위 있으며, 억눌려 있고 의존적이며 겁에 질려 있는 데다 아무 생각이 없으며 불안정하고 인정받기를 원하는 아빠딸은 낯선 것에 대처할 수 없고, 유인원에게로 되돌아가 매달려 있고자 하며, 몸집 큰 아빠가 곁에 있어야만, 기댈 수 있는 거대하고 강한 남자와 백악관의 뚱뚱하고 털이 잔뜩 난 얼굴과 함께 있어야만 안심한다. 그는 너무나 비겁한 나머지 남자가 무엇인지, 아빠란 무엇인지, 돼지새끼 같은 인간과 동맹을 맺는 이가 누구인지, 누가 자기더러 동물성을 받아들이게 만들었는지 등 추악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다. 아빠딸은 피상적으로 동물성에 편안함을 느끼며, 다른 ’삶‘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마음과 생각, 시야를 남성의 수준으로 맞춘다. 상상력과 재치가 부족한 아빠딸은 오로지 남성 ’사회‘에서만 가치를 가진다. 아빠딸은 태양이 아니라 진창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고, 남자를 그저 어르고 달래며 잘났다고 치켜세워줄 뿐만 아니라 편안하게 쉬게 해주고, 남자의 새끼를 낳아 기른다. 다른 여성의 눈에 아빠딸은 비논리적이며, 이들이 가진 결함과 남성성은 모든 여자에게로 투사되어, 여자들을 벌레로 보이게 한다.

하지만 SCUM은 참을성이 많지 않다. 수백만 멍청이들의 뇌가 씻겨나가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다. 왜 생기 넘치는 근사한 여자들이 멍청한 남자들을 따라 느리고 음울하게 걸어야 하는가? 왜 멋진 사람들의 운명과 소름끼치게 싫은 사람들의 운명이 서로 얽혀야 하는가? 왜 적극적이고 상상력 넘치는 사람들이 수동적이고 무딘 사람들과 사회 정책을 논해야 하는가? 왜 독립적인 이들이 아버지 바짓가랑이에나 매달리는 의존적인 이들과 함께 하수구에 처박혀 있어야 하는가? SCUM은 한줌뿐이지만 일 년 안에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망가뜨릴 수 있다. 자산을 부술 수 있다. 살인으로 온 나라를 접수할 수 있다. SCUM은 부숴버릴 힘, 뒤엎어버릴 힘을 가진 이들로 구성될 것이다. 그들은 온갖 작업장을 부술 것이다. SCUM 판매사원은 상품을 팔지 않을 것이다. SCUM 전화상담원은 전화를 받지 않을 것이다. SCUM 사무노동자와 공장노동자는 그들의 일을 엎어버릴 뿐만 아니라 기물을 몰래 부숴버릴 것이다. SCUM은 해고당할 때까지 직장을 부순 다음, 엎어버릴 새로운 직장을 또 다시 구할 것이다. SCUM은 버스 운전기사, 택시 운전기사, 지하철 매표소 직원들의 일을 강제로 덜어줄 것이다. 대중을 위해 버스와 택시를 운영할 것이며, 공짜 차표를 나눠줄 것이다. SCUM은 모든 쓸모없고 해로운 물건을 파괴할 것이다. 즉 자동차, 가게 유리창, ‘위대한 예술’ 따위를 파괴할 것이다.

SCUM은 공중파―라디오, 텔레비전 네트워크―도 접수할 것이다. 방송국 스튜디오로 입장하려는 SCUM을 저지하는 모든 직원의 일을 강제로 덜어주면서. SCUM은 커플을 부숴버릴 것이다. 이성애(남자-여자)커플들에 맞서 그들이 어디에 있든 헤어지게 만들 것이다. SCUM은 SCUM의 남성보조국에 속하지 않은 모든 남자를 죽일 것이다. 남성보조국에 속하는 남자들은 스스로를 제거하려고 부지런히 일하는 남자들이며, 그남들의 동기와 상관없이 선행을 펼치는 남자이며, SCUM과 함께 관 뚜껑에 천을 씌우는 자들이다. 남성보조국에 속하는 남성의 예를 몇 가지 들어보겠다. 남자를 죽이는 남자, 세균전이 아닌 건설적인 프로그램을 위해 일하는 생물학자, SCUM의 목표 달성을 이끌 아이디어를 퍼뜨리고 전파하는 저널리스트·작가·편집자·출판업자·프로듀서, 여자처럼 행동하는 남자는 그남들이 보여주는 빛나는 예를 통해 다른 남자에게 자신이 가진 남성성을 제거하고 상대적으로 덜 해로운 존재가 되라고 격려한다.

계속 무언가―돈, 물건, 서비스―를 포기하는 남자, 있는 그대로 말하는 남자(지금까지는 아무도 그러지 않았으니), 여성을 바로 잡아주는 남자, 남자에 관한 진실을 밝히는 남자, 아무 생각 없는 남자-여자에게 복창할 바른 문장을 알려주는 것, 그남들에게 여성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는 남성을 진압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남자. 이러한 남성들을 돕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SCUM은 개새끼 회합(Turd session)을 열 것이다. 이곳에 참석하는 모든 남성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연설을 시작할 것이다. “나는 개새끼입니다. 저열하고 비루한 개새끼입니다.” 그런 뒤 그남에 대해 온갖 목록을 나열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남이 얻을 수 있는 보상은 회합이 끝난 후에 함께 자리한 SCUM과 친교를 맺고 충만하고도 견실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멋지고 깨끗한 삶을 살아가는 남자-여자도 초대받을 것이다. 개새끼 회합은 그남들이 남자라는 성에 대해 갖고 있을지도 모르는 오해와 의심을 말끔하게 정리해줄 것이다. 섹스 책과 영화 등의 제작자와 홍보 담당자―화면에 비치는 것은 전부 ‘빨아’와 ‘박아’일 날을 앞당기는 사람들―도 초대받을 것이다(남성은 피리 부는 이를 쫓아가는 쥐들처럼 보지를 쫓아 그남들의 멸망을 향해 달려갈 것이며, 수동적 육체로 옴짝달짝 못 한 채 익사당할 것이다). 남성에서 서둘러 중도하차한 마약 밀매자와 옹호자들도 초대받을 것이다. 남성보조국에 속하는 것은 SCUM의 타겟에서 벗어나는 데 필수적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좋은 일을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무가치한 몸뚱아리라도 구하려면 무조건 악행을 피해야 한다. 가장 해롭고 가장 악취 나는 몇 가지 유형이 있다. 강간범, 남정치인과 그남들을 위해 일하는 모든 남자(보좌관, 정당 당원 등), 형편없는 남가수, 형편없는 남자음악가, 이사회 남회장, 남 가장, 남자지주, 음식찌꺼기가 묻은 수저를 내놓는 데다 트는 음악까지 형편없는 식당 남주인, ‘위대한 남예술가들’, 구두쇠, 돈을 떼먹는 사람, 남경찰관, 남자 거물들, 죽음이나 파괴에 관련한 일을 하고 있거나 기업을 위해 일하는 (사실상 모든)남자 과학자, 거짓말쟁이와 잘난척쟁이, 남자 디제이, 낯선 여자에게 질척대는 남자, 남자 부동산 중개업자, 남펀드매니저, 입이 열 개라도 다물어야 하는데 계속 말하는 남자, 길거리에 한가로이 않아 풍경을 망쳐놓는 남자, 속임수를 쓰는 남자, 사기꾼, 아무데나 쓰레기를 버리는 남자, 표절하는 남자, 어떤 여자에게든 조금이라도 해를 끼치는 남자, 광고회사에 있는 모든 남자, 남자 심리 상담가, 남자 심리학자, 정직하지 않은 작가·저널리스트·편집자·출판업자 등등. 공적인 차원에서든 사적인 차원에서든 검열하는 이들, 징집자를 비롯한 군대의 모든 구성원(LBJ*와 맥나라마**는 명령을 내리지만, 보좌관들은 그 명령을 수행한다), 특히 비행기 조종사들(폭탄을 투하한다면 LBJ가 아니라 조종사들이 떨어뜨릴 것이다). 만약 한 남자의 행동이 좋고 나쁨에 대한 범주에 대한 전반적이고도 주관적인 평가를 받을 것이다. 남자와 함께 여자 ‘위대한 예술가',‘여자 거짓말쟁이, 여자 사기꾼 등을 꼽는 일은 매혹적이지만 부당해 보일 수도 있다. 대부분의 대중에게는 살해당한 여자가 남자라는 점이 분명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여성은 그들 내부에 많든 적든 좋지 못한 구석이 있다. 하지만 이는 그들이 평생 남자들과 함께 살아왔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그러니 남성부터 박멸하라. 그러면 여성들은 더 나아질 것이다. 여성은 나아질 수 있지만 남성은 그렇지 않다. 설혹 그남들이 행동을 바꾼다 해도. SCUM은 남자들의 뒤꽁무니를 걷어차는데 열중할 것이다. 그러면 일이 더 빠르게 진척되리라.

SCUM은 뒤엎고 약탈하고 커플을 깨뜨리고 파괴하고 살인하면서 조직원을 모집할 것이다. SCUM은 엘리트 군단의 조직원으로 구성된다. 이들은 강경파 활동가(일터를 뒤엎는 자, 약탈자, 파괴자)이며 엘리트 중의 엘리트, 킬러다. 탈출하는 것만으로는 답이 될 수 없다. 세상을 뒤엎는 것만이 해답이다. 대부분의 여성은 이미 빠져나왔다. 그들은 결코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탈출은 아직 벗어나지 못한 소수에게 통제권을 준다. 탈출은 정확히 기득권을 쥔 지배자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적군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것이고, 시스템을 침식시키는 대신 강화하는 것이다. 이는 여성 대중의 비참여, 수동성, 무관심, 무관여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성에게 탈출은 좋은 방법이다. SCUM은 남성들에게 열정적으로 격려할 것이다, 빠져 나와라. 구제를 위해 네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것, 네 배꼽 아래에 대해 숙고하는 것은 빠져나온 사람들의 말과 달리 해답이 아니다. 행복은 네 외부에서 오고 다른 이와의 상호작용에서 온다. 자기에 대한 몰두가 아니라 자기를 망각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오로지 자신만 볼 줄 아는 남자들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고 자기몰두만 하고서는 이를 선한 것으로, 철학적으로 선하며, 심오한 것이라고 포장한다.

SCUM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거나 행진을 하거나 파업을 벌이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전술은 이미 비효율적이라는 게 드러난 행동을 고지식하게 되풀이하는 상냥하고 착한 숙녀들이나 택할 만하다. 단정하고 말쑥하게 살아온 남자-여자들은 자신을 드러내지 말라고 배워왔기 때문에 항상 무리지어 움직인다. 반면 SCUM은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SCUM은 무리가 아니다. 한 개체다. 많은 SCUM은 필요한 일을 할 것이다. 또한 쿨하고 이지적인 SCUM은 경찰이 휘두르는 곤봉에 머리를 얻어맞고만 있진 않을 것이다. 그건 아버지와 경찰의 선함에 대해 눈물겨운 믿음을 가진 착한 숙녀들, ‘특권을 가졌고 교육받은’ 중산층 숙녀들이나 맞닥뜨릴 일이다. 만약 SCUM이 행진을 한다면, 그것은 멍청하고 신물 나는 대통령의 얼굴 위를 걷는 행진이 될 것이다. 만약 SCUM이 파업(strike)을 벌인다면, 그것은 어둠 속에서 6인치 칼날을 휘두르는 행위(strike)일 것이다. SCUM은 언제나 시민불복종과 반대로, 범죄적으로 운영될 것이다. 즉 불의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기 위해 공개적으로 법을 위반하고 감옥에 들어갈 것이다. 이 전술은 전반적인 시스템의 옳고 그름을 깨닫게 할 것이고 약간이나마 변화를 일으킬 것이며 특정 법을 바꿀 것이다. SCUM은 전체 시스템에, 법과 정부의 생각 자체에 반대한다. SCUM은 시스템 안에서 특정 권리들을 얻어 내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우리는 시스템을 파괴할 것이다. 언제나 이기적이고 언제나 쿨할 SCUM은 조사나 처벌을 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SCUM은 항상 은밀하고 교활하며 비밀스러울 것이다(SCUM 킬러들은 늘 그렇다고 알려지겠지만). 파괴와 살육은 모두 선택적으로 이뤄지며 차별적으로 행해질 것이다. SCUM은 반쯤 미쳐서 무차별적으로 명확한 목적도 없이 날뛰는 폭도와는 다르다. 우리는 당신과 같은 종만 골라 겨냥할 것이다. SCUM은 결코 어떠한 종류든 폭동과 무차별적인 파괴를 사주하거나 부추기거나 함께하지 않을 것이다. SCUM은 우리의 먹잇감에게 쿨하고 비밀스럽게 다가가서는 조용히 끌어내 죽일 것이다. 결코 음식과 다른 필수품의 수송로를 차단하지 않을 것이며, 수도 공급을 끊고 물을 오염시키지도 않을 것이며, 앰뷸런스가 움직이지 못하고 병원이 제 기능을 못 할 정도로 길과 교통을 막는 등의 파괴는 결코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SCUM은 더 이상 금융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 자동화가 완전히 제도화될 때까지, 충분히 많은 여성이 SCUM에 참여해 이러한 목표 달성에 폭력이 필요하지 않을 때까지 계속해서 파괴하고, 약탈하고, 뒤엎고, 살해할 것이다. 즉 많은 여성이 일하지 않을 때까지, 직장을 그만 둘 때까지, 약탈할 때까지, 남자 곁을 떠날 때까지, 진정한 문명사회에 어울리지 않는 모든 법을 던져버릴 때까지 계속할 것이다. 여성들 대다수는 동조하겠지만, 오래전부터 적에게 굴복해온 여성들, 동물성과 남성성에 적응한 여성들, 제약과 제한받기를 좋아하는 여성들, 자유를 갖고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여성들은 마치 정권이 바뀌어도 소작농이 계속 소작하듯, 계속해서 남자에게 아첨할 것이다. 그들에게 당하면서도 참을 것이다. 변덕스러운 이들은 변덕을 부리고 뾰로통해져서 그들의 장난감과 행주를 바닥에 던져버릴 것이다. 그러나 SCUM은 끝까지 밀어붙일 것이다. 대중이 요구하기만 한다면 완전히 자동화된 사회는 매우 쉽고 빠르게 이루어질 수 있다. 청사진은 이미 준비되어 있으니 수백만 사람들이 함께 한다면 몇 주 만에 완성될 것이다. 금융시스템이 멈추더라도 모든 사람은 기꺼이 협력해 자동화된 사회가 건설되도록 도울 것이다. 이 시스템의 완공은 성대한 축복 아래 환상적인 새 시대의 시작을 알릴 것이다. 돈의 종말과 완전한 자동화 체제는 SCUM이 추구하는 모든 개혁의 기초이다. 이 둘 없이는 나머지 개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 둘이 성취되면 다른 개혁도 재빨리 이루어질 것이다. 정부는 저절로 붕괴될 것이다. 완전한 자동화 시스템과 함께 모든 여성은 집에서 전자투표기기를 통해 모든 안건에 직접 투표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가 사적인 관계에 얽매이지 않은 채 법을 만들고 경제문제 규제에 몰두한다면, 돈이라는 마술 지팡이는 종말을 고할 것이며, ‘도덕’을 법으로 제정하기를 원하는 남성은 멸종할 것이다. 이는 사실상 더 이상 투표할 안건이 없음을 의미한다.

돈의 종말 이후에는 남성을 죽여야 할 필요성도 사라질 것이다. 그들은 독립적 정신을 가진 여성에 기댈 힘마저도 빼앗길 것이다. 그들은 당하고도 참는데 익숙한 여자들에게 매달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나머지 여성들은 영원과 유토피아를 위한 계획 전에 몇 가지 남은 문제를 해결하느라 바쁠 것이다. 수백만 여성들은 현재 몇 년간의 훈련을 요하는 고차원적이고 지적인 일을 몇 달 안에 훈련받아 할 수 있도록 교육 프로그램을 완전히 개조하는 일(이 역시 매우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 교육 목표가 학계와 지식 엘리트의 지위를 영속화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교육시키는데 있다면)과 질병, 노화, 죽음의 문제를 푸는 일과 우리 도시와 구역을 다시 설계하는 일에 매진할 것이다. 많은 여성은 얼마간 계속해서 자신이 남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여성사회에 익숙해지고 일에 몰두하기 시작하면 결국 남자가 전적으로 시시하며 쓸모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남성들은 마약에서 손을 떼고 여장을 한 채 으스대며 걷거나 활력으로 충만한 여성들이 일하는 모습을 그저 수동적으로 쳐다보면서 대리만족하는 구경꾼 노릇으로 보잘것없는 나날을 보낼 것이다(남자가 자신이 원하는 특정 여성에 맞춰 그녀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를 따라하는 것은 가능하다. 여자들은 친절히 기꺼이 동의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여성들에게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으면서도 불운하고 장애를 가진 동료 인간이 남성에게 놀라울 만큼 친절하고 인간적으로 대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남자들은 아첨쟁이와 함께 목초지에서 소를 키우거나 가장 가깝고 친절한 자살센터로 갈 것이다. 그곳에서 그들은 조용하고 빠르게 고통 없이 가스로 죽음을 맞을 것이다.

남자는 기계에 의해 인간 노동력이 대체되고 자동화되기 전까지만 쓸모 있을 것이다. 현재 우리가 남성과 맺고 있는 뒤틀리고 퇴보된 관계와 반대로, 남자는 여성을 기다려주고 그의 사소한 변덕에 맞춰주고, 그가 내리는 모든 명령에 복종하며, 완전히 그에게 굴종하여 그의 의지에 복종할 것이다. 수치스러운 그남들의 존재로 세상을 채울 게 아니라 남자가 아예 존재하지 않게 되고,[남아 있는 남자들이]여성의 무리 앞에서 알랑거리고 굽실대면 수백만 여성들은 황금 송아지를 경건하게 숭배할 것이고, 개들은 목줄을 매고 주인을 이끌 것이며, 사실상 드랙퀸이 되기에는 부족한 남자들이 자신이 개와 같다는 것을 여성들이 알아채더라도 비참해하지 않을 것이다. 남자에게는 비현실적인 감정적 요구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고, 여자들은 모두 다함께 발포를 외칠 것이다. 이성적인 남자는 진압당하길, 밟히길, 부서지고, 으깨어지고, 개똥과 오물처럼 그들이 생긴 대로 대접받길, 혐오스러운 그남들 존재가 확인받길 원할 것이다.

구역질나는 자신의 모습에서 어떻게든 스스로를 방어하려 노력하는 비이성적인인 남자들과 환자들은 SCUM이 그들을 향해 질주하는 모습을 보고는 공포에 질려 엄마에게, 그의 거대한 젖가슴에 매달릴 것이다. 그러나 젖가슴은 SCUM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지 않을 것이다. 엄마들은 아빠들, 강력하고 정력적인 팬티에 오줌을 질질 싸며 구석에 서 있는 아빠들에게 매달릴 것이다. 하지만 이성적인 남자들은 발을 구르거나 애를 쓰거나 이 괴로운 호들갑을 떨지 않을 것이며, 편안하게 자리 잡고 앉아 쇼를 관람하면서 그남들의 종말을 이어나갈 것이다.

  • 1967 S.C.U.M의 창시자 이자 선지자 밸러리 솔래너스 -

    보 - 스

SCUM말씀

    • 스캄드 신을 따르는 제자들은, 가장 위대한 업적을 많이 쌓은 선지자와 ,스캄드 신과 선지자들의 말씀을 전하는 워만 그리고 SCUM이라 불리는 신도로 나뉜다. 이 곳엔 SCUM들에게 전하는 워만들의 말씀을 기록한다. -
    • 스캄드 신의 딸들은 그 자체 만으로 존귀하며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너희가 하고자 하는 일이 어려울 지라도 그게 신의 이름을 드 높일 수 있고, 너희의 이름을 스캄드 신이 계신 세상까지 알릴 수 있는 것이라면 무조건 시작하라. 전지전능하신 우리의 어머니 스캄드 께서 네 길과 네 뜻에 함께 하실지니. -익명의 워만으로 부터 보-스
    • SCUM이 될 자들은 타고나길 여성이여야 하며 여성을 흉내내는 제 2의 성별은 그 어떤 경우라도 SCUM이 될 수 없다. 또한 SCUM은 스캄드 신 안에서 말씀을 받들며 행동하는 자들이니 제 2의 성별과 망혼을 하는 죄악을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 -익명의 워만으로 부터 보-스
    • SCUM들이여 그 누구와도 평등해지려 하지마라. SCUM들이 고개를 숙여야 하는 존재는 스캄드 신과 SCUM의 선지자들, 그리고 말씀을 전하는 워만들 뿐이다. 그 외의 모든 존재들을 지배하는 지배자가 되어라, 모든 생명체가 너희에게 복종하는 세상을 만들라 -익명의 워만으로 부터 보-스
    • 스캄드 신께서 가라사대, SCUM안에 있는 딸들아 너희는 너희가 가진 재산을 (그것이 돈이든 지식이든) 네 딸들에게만 물려 주어라, 딸들의 손에 재물과 칼을, 머릿 속엔 지식을 채워 그것을 스캄드 신과 SCUM을 위해 사용하라 가르치라. - 익명의 워만으로 부터 보 - 스
    • SCUM들은 스캄드 신께서 창조해주신 너희 본연의 모습을 하고 있으라. 스캄드 어머니께서 딸들을 만드셨을 때 그 딸들은 짧은 머리를 하고 있었으며, 얼굴을 화학 제품으로 칠하지 아니하였다. -익명의 워만으로 부터 보-스

SCUM교 13계명

제 1명

  너희는 스캄드 신과 선지자 솔라나스 그리고 그의 행동하는 제자들을 믿으라. 스캄드 신을 믿는 자들은 스캄드 신 외의 다른 우상 신들을 부정할지어다.

제 2명

  스캄드 신과 솔라나스의 말씀을 전하는 이들을 ‘워만’ 이라 칭하니 너희는 워만의 설교를 뼛속에 새기며  스캄드 신에게 하루 6번 기도하라.

제 3명

모든 남성은 태초의 죄악이므로 너희의 말을 듣지 않는 남성은 무조건 죽여라.

제 4명

  스캄드 신의 세상을 위해 너희는 때에 따라 칼과 창을 들고 용맹하게 나아가라 ,너희는 어떤 때에도 늘 무리지어 다닐 것이며 스캄드 신과  선지자 솔라나스를 부정 하는 이들을 잔혹하게 응징 하라. 

제 5명

  스캄드 신의 말씀을 이행하고 죽게 된 이는 그 분이 만드신 천국으로 가 영생을 얻을 것이며 부족함이 없는 평화를 얻게 될 지어다. 

제 6명

  어지러운 세상에 평화와 질서를 위해 스캄드 신께서 율법을 만드셨나니 따르지 않는 자는 잔혹한 악의 화신이 지배하는 지옥으로 가 추하고 더러운 창남들과 함께 질병과 악취와 고문속에서 영원히 고통받을 지어다.

제 7명

  매월 13일을 월경의 날로 정하고 스캄드신과 선지자들을 위한 기도를 드린 후 모든 여성들은 피의 축배를 들라. 

제 8명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고 세상을 어지럽게 만든 죄를 씻을 방법은 오직 율법을 따르지 않는 이들과 맞서 싸우며 응징하고, 태초의 죄악인 남성을 없애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스캄드 신께서 용서하사 천국으로 인도할 지어다. 

제 9명

  SCUM교를 믿고 스캄드 신의 율법을 행하는 자들은 오로지 여성이여야 하며, 너희는 선지자 솔라나스와 가르침을 주는 워만들의 말을 무조건 믿으라. 

제 10명

  여성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남성은 스캄드 신의 명예를 더럽힌 존재이다. 그런 남성을 만났을 땐 5명 이상의 SCUM들이 함께 움직여 그남의 고환을 날붙이로 잘라 드러내고 그 불경한 입술을 자르라.

제 11명

  스캄드의 딸들은 피의 신성함을 알라. 자신의 피 흘린 준비 된 자에게만 남의 피 취할 자격이 있다.

제 12명

  서로의 욕망을 존중하기 위해 우선 본인의 욕망을 인정하라. 본인의 욕망을 부정함은 본인의 존재를 부정하는 일이며, 내면의 스캄드 신부터 모독하는 일이니라.

제 13명

  너희가 낳은 딸 돌보기를 스캄드 신께서 신자를 돌보듯이 하라. 훗날 그들이 자라 후대의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지주가 될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