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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편집: 2021년 11월 14일 (일) 14:18
파일:Gyeongbokgung Palace Night.jpg

틀:문화재

개요

景福宮 / Gyeongbokgung

조선시대에 지어진 다섯 개의 궁궐 중 최초로 지어진 조선 왕조의 법궁이며, 사적 제117호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경복궁.

도읍을 한양으로 정하고 한양에 성곽종묘, 궁궐 등을 짓게 했는데 경복궁은 1395년에 완공되었다. 경복궁(景福宮)의 이름은 정도전이 지었는데, 조선왕조실록 태조 8년 10월 7일의 기록에 따르면, 시경 주아편의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는 영원토록 그대의 크나큰 복을 모시리라)에서 끝의 景福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참고로 이것은 태조가 궁궐의 이름을 지어달라[1]고 하자 즉석에서 지었다고 한다. 경복궁의 여러 전각들의 이름을 지은 것도 정도전.

하지만 태종이 왕자의 난을 겪은 경복궁 대신 창덕궁을 지으며 사실상 경복궁보다 창덕궁이 법궁의 역할을 하나, 세종 때 법궁의 지위를 되찾는다. 그렇게 200여년 동안 중요한 궁궐로 여겨졌지만 임진왜란때 왜놈들이 종묘 등을 표함하여 경복궁을 싸그리 다 태워버려서 터만 유지해놓게 된다. 고종 때가 돼서야 흥선대원군이 불탄 경복궁을 재건했다. 이때 지어진 경복궁은 원래 경복궁과 차이가 있었다 한다.

역사

임진왜란 전까지는 어느 정도 중요한 궁궐이었는데, 1553년에 사정전, 근정전, 경회루, 함원전, 청연루을 제외한 편전과 침전 구역의 건물이 모두 불타버렸다. 1554년 봄에 다시 지었는데, 50년도 지나지 않아서 임진왜란으로 인해 한양이 왜군들에게 함락돼서 불타 완전히 소실된다.

그후 월산대군의 집을 경운궁[2]으로 쓰다가 광해군 때 창덕궁, 창경궁을 다시 재건했다. 그리고 경복궁은 짓지않고 경희궁과 인경궁을 새로 짓는다. 그렇게 273년 동안 지어지지 않다 1865년 4월 26일(고종 2년 음력 4월 2일) 고종의 수렴청정을 하던 신정왕후사실상 흥선대원군가 다시 지으라 명령해서 중건되기 시작해 1868년 6월 말에 완성됐다. 현재 남아 있는 경복궁의 전각들은 이때 지어진 것.

그러나 국고가 모라르는 형편에 지으면서 당백전 발행과 서울 사대문 통행세 등의 무리한 정책으로 결국 흥선대원군이 물러나는 이유 중 하나가 된다. 후에 우리나라 최초로 전기가 들어오는 곳이 된다. 이제부터 망해간다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경복궁 건청궁에서 시해당한다[3]. 그리고 1910년 한민족 최악의 치욕 경술국치 직후 일장기가 근정전에 걸렸다고도 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동안 일제는 광화문 뒤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세웠으며, 경복궁의 전각들을 훼손하거나 일본으로 가져갔다.

8·15 광복 이후에 복원시도가 여러 차레 있었으나, 대부분 무산되거나 하였다.

만약 100% 복원을 하려면 청와대를 옮기거나 없애야 한다.개네들이 설마 그러겠니? 박정희 시절 때 복원시도가 있었는데 더 망했다. 석굴암처럼 광화문에 콘크리트칠해서 훼손시켰다. 뭐 그건 그 시절 시대상이 그랬다 치더라도, 더 큰 치명적인 실수는 광화문의 위치를 근정전이 아닌 조선총독부를 기준으로 했다는 것. 조선총독부는 남산에 세워졌던 신사인 조선신궁을 바라보도록 지어져, 경복궁에서 5도 가량 틀어져 있었다. 그렇기에 복원된 광화문 역시 마찬가지로 틀어지게 되어버렸다. 또한 경복궁 내부에 민속박물관을 세워, 복원이 더욱 어려워지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점점 원래의 모습을 잃어간다

민주화 이후 김영삼 정권이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면서 복원사업이 시작되었다.이제야 망했어요가 끝났다 1990년 시작 당시에는 36동밖에 없었다는데 지금은 125동. 물론 아직 많이 남았다.[4]

1990년부터 2010년까지 1차복원사업이 진행됐으며, 소주방을 복원하는 것부터 시작해[5] 민속박물관 철거까지 2010년부터 2030년까지 20년 동안 2차복원사업이 진행된다.[6] 또 현재의 광화문 역시 원래 자리를 찾아 복원되었다.

구조

  • 본 내용은 2011년문화재청에서 발간한 안내 책자[7]를 참고하여 작성한 내용이다.

광화문과 궁궐 담장

파일:광화문.jpg
광화문

경복궁 바깥의 담장 길이는 2404m에 달한다, 담장의 사방 4대문에 1426년(세종 8) 동남서북 순서로 각각 건춘문,광화문,영추문,신무문이라 이름 붙였다. 각 문의 명칭은 각각 봄,여름,가을,겨울과 나무-불-쇠-물을 상징하는 것이다.

정문인 광화문의 좌우에는 해태상이 세워져 있는데, 원래는 현재 위치에서 80m 떨어진 곳에 있었다. 왕 외의 사람은 말에서 내리라는 표식이었다고.
전면 담장의 두 모퉁이에 망루인 동십자각과 서십자각을 설치했는데, 서십자각은 일제 강점기에 철거되었고 동십자각은 세종로 확장을 위해 성벽이 이전되면서 혼자 동떨어진 길 한복판에 있게 되었다.(...)

광화문 역시 수난을 피해가지 못했는데,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을 때 철거될 예정이었다가 극심한 반대에 부딪쳐서 건춘문 근처로 이전하는 것으로 계획이 수정되었다. 대표적으로 일본인야나기 무네요시가 '일본이 타국의 식민지가 되어 에도성이 파괴된다면 어떠하겠는가'며 반발하는 내용의 글을 썼다.

그렇게 옮겨간 광화문은 6.25 전쟁 와중에 결국 파괴되었고, 1968년에야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복원되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 정문 자리로 옮겨 놓은 탓에 원래 위치와는 다소 차이가 있었고,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쓴 한글 현판 역시 말이 많았다.

결국 콘크리트 광화문은 2006년에 다시 철거되었고, 2008년 8월에야 현재의 형태로 복원되었다. 그러나 다시 3달이 지나 현판이 갈라지는 사고가 발생하는 등 여러모로 삐그덕대는 상태.

근정전 일원

'천하의 일을 부지런히 하여 잘 다스린다'는 의미에서 勤政[8]殿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경복궁의 중심 건물이 되는 법전(法殿)으로써, 문무백관의 조회, 왕의 즉위식 등의 국가적 주요한 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남쪽 회랑에 근정문을 두고 그 바깥에 다시 외행각을 둘렀으며, 그 남쪽에는 홍례문을 냈는데, 조선총독부를 지으며 죄다 박살났다가(...) 2001년 복원되었다.

여담으로, 밖에서 봤을 땐 2층으로 보이는데 내부는 사실 단층이다.

궁궐 중심축

정문인 광화문을 시작으로 북쪽 방향으로 연결되는 궁궐의 핵심 전각들에 해당한다 남쪽부터 다음과 같이 배치되어 있다. 21세기에 들어서 이루어진 경복궁의 복원도 이 중심축을 우선하여 이루어졌다.

  • 광화문
  • 흥례문 : 여기서부터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는 구역이다.
  • 근정문
  • 근정전
  • 천추전 / 사정전 / 만춘전
  • 강녕전 구역 : 강녕전은 왕의 침소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강녕전을 중심으로 서편에 경성전, 응지당이, 동편에 연생전, 연길문이 각각 남북으로 배치되어 있다.
  • 교태전 구역 : 교태전은 왕비인 중전의 침소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강녕전과는 양의문으로 통하며 서편에 흠경각, 함원전의 전각이 있으며 교태전을 중심으로 함홍각-재성문-내순당-보의당-양의문-승순당-만통문-원길헌의 순서(시계 반대방향)로 "ㅁ"자 형태로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 흥복전 일대 : 2019년 현재 복원공사중이다.
  • 함화당/집경당/영훈당(터)
  • 향원정
  • 건청궁 구역

서편구역

동편구역

현대에 들어서 들어선 건물 및 시설

지정문화재로 지정된 전각들

경복궁 전체가 지정문화재사적에 해당하지만, 다시 추가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전각들이 있다.

  1. , ‘지금 도읍을 정하여 종묘에 제향을 올리고 새 궁궐의 낙성을 고하게 되매, 가상하게 여겨 군신(群臣)에게 여기에서 잔치를 베푸노니, 그대는 마땅히 궁전의 이름을 빨리 지어서 나라와 더불어 한없이 아름답게 하라
    今定都享廟, 而新宮告成, 嘉與群臣宴享于此。 汝宜早建宮殿之名, 與國匹休於無疆。
  2. 고종 때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뀐다
  3. 하지만 숨어살았다는 내용의 외교문서가 발견되어 죽었는지 확실치 않다
  4. 고종 당시에는 500여 동. 이제 겨우 25% 복원한 거다.
  5. 소주방은 2015년 5월 2일에 개관됐다
  6. 경복궁의 76%가 복원된다
  7. 관광 안내소에서 나눠준다.
  8. 가까울 근, 다스릴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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