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위키:포크 프로젝트/리브레 위키/김일성

최근 편집: 2021년 11월 1일 (월) 22:58

틀:지도자 정보 김일성(金日成)은 북한의 초대 독재자이며 본명은 김성주(金成柱)였다. 본관은 전주 김씨이다. 한때는 항일운동도 했었다. 그에 대한 진위논란과 김일성 사칭 혹은 김일성 가짜론까지 있었지만, 본인이라는 것 자체는 사실이라는 듯. 다만 그 성과 자체는 북한 특유의 우상화 작업을 통해 상당히 부풀려져 있다는 듯하다. 그리고 항일운동을 한 것은 좋으나 광복 후 그의 행적은 이하생략.

북한에서 이 '존함'을 표기하는 데 사용하는 PUA 코드 포인트는 U+F113, U+F114, U+F115()이다.

성향

시작은 공산주의였지만 스탈린 같은 좌파 파시즘 보단 히틀러나 일제 식의 우파 파시즘 성향에 비교를 더 많이 당한다. 박태균 교수가 쓴 "한국전쟁"에 따르면 이승만과 박헌영이 순수한 민족주의보단 각각 우파와 좌파 성향이 강했다면, 김일성은 압도적으로 민족주의적 성향을 보였다고 한다. 사실 김일성은 공산주의 이론은 문자 그대로 쥐뿔만큼도 몰랐다. 그러니까 마르크스주의와는 기본 전제부터가 180도 다른, 극단적인 관념론에 입각한 사이비 종교를 만들고 스스로 신 노릇을 하는 사이비 교주가 된 것이다!

그 절대적 권력과 아들/손자에게 권력을 물려준 점에 빗대어 왕으로 비교당하기도 하는데 사실 조선 왕들은 김일성 같은 절대권력을 가진 적이 없다. 성리학이라는 이념과 조선 특유의 행정 제도는 신하들과의 권력 분점을 통한 균형을 이루는 것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 절대 권력을 누린 것은 연산군 정도가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연산군은 몇 년도 안 돼서 쫓겨났다. 반대로 김일성은 지옥에 떨어질 때까지 잘 먹고 잘 살았다.

전쟁관

김일성은 독립군을 지휘한 경험이 있으나 오직 비정규전뿐이었고 전면전을 지휘한 경험이 아예 없는 인물이었는데 전면전에 대한 생각이 너무나 어리석었다.

다음은 정병준 목포대 교수의 설명이다.

김일성은 중국 해방이 완성되면 다음 순서는 남한의 해방이라고 강조하면서, 자신은 밤잠을 못 이루며 통일 문제 해결에 골몰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일성은 스탈린이 얘기한대로, 이승만이 북침을 하지 않아 남한 해방과 통일이 지연되고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남한 해방을 위해 인민군이 공격하는 것이 필요하며, 이에 대한 "지령"을 받기 위해 다시 한번 스탈린을 방문하고 싶다고 발언했다.

"이승만이 북침을 해야 남한해방과 통일이 가능한데 그러질 않아서 밤잠을 못 이룬다"는 헛소리도 할 정도였다.

생애

김일성과 관련된 기록들은 많은 부분이 북한 당국에 의해 상당한 수준의 미화가 가해졌고, 여기에 더불어 혼란했던 시기인만큼 제대로 된 기록이 없이 구전 등으로 전해진 것들이 많아 신빙성이 없는 내용들이 많다.

일제 강점기

우선 알려지기로는 조상은 전주 김씨 12대조 김계상이 평안남도 평양부 고순화면(古順和面) 남동 칠곡으로 이주하여 터를 잡은 것이 시초이며 아버지 김형직과 어머니 강반석의 사이에서 1912년 4월 15일 태어났다. 아버지 김형직은 항일 독립운동가였으며, 어머니 강반석은 아버지 강돈욱 장로교 목사의 영향으로 장로교 신자였는데 이런 부모의 영향을 받아 김일성 또한 항일운동에 가담하였으며 훗날 그 악랄한 주체사상을 만드는데 자기가 배운 기독교의 교리를 비롯하여 자신의 재능을 써먹게 된다.

1937년 이른바 보천보 전투라고 불리는 사건으로 이름을 알렸다. 당시 김일성은 몇몇 뜻을 함께 한 동지들과 게릴라를 조직하여 함경도 외곽의 보천보 마을을 24시간동안 점거했다가 일제의 반격으로 물러난 바가 있는데, 비록 이러저러한 요소들로 실제로는 정말 별 것 없는 사건으로 취급되지만 나름대로 의의도 좀 있는 사건으로 하여튼 이름을 알린다.

하지만 이로 인해 일제에게 독립군 전체가 제대로 찍혀 대대적인 토벌전을 강행하자 결국 1940년 소련으로 망명하여 소련군에 입대, 특무공작요원 훈련을 받고 장교로 임관하여 소련군의 일원으로 일제에 맞서 싸운다.

해방 이후

1945년 8월 15일 일왕의 무조건 항복 선언 이후 해방된 한반도는, 일본으로부터의 해방이 자율적인 것이 아닌 소련과 미국에게 항복을 하여 일어난 것이란 점 때문에 '승전국'인 미국과 소련에 의해 관리를 받게 된 일본의 '부속도서(!)'로 같이 관리를 받게 된다. 일본 본토는 지리적 특성상 분단 없이 미국이 온전히 관리하게 되었지만, 한반도는 소련과도 가까운 땅이였기 때문에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남쪽만 미국이 관리하고 북쪽은 소련이 관리하게 되었다.

이런 정국에서 김일성은 소련군 장교 자격으로 다시 한반도 땅으로 귀환한다. 여기서 여하튼 소련의 관리대상이 된 북위 38도선 이북땅의 관리를 위하여 김일성은 한반도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좌익 인사계의 대표 박헌영과 회담을 갖기도 하였으나, 북녘만의 정부를 세우려는 김일성과 완전한 한반도 전체의 정부를 세우려는 박헌영의 뜻은 어긋났고 이에 박헌영과 결별하게 되었다. 하지만 박헌영이 어찌되었든 북녘땅의 관리는 소련이 담당하고 있었기에 소련의 비호 아래 김일성은 성공적으로 북녘땅만을 지배하는 임시 정부조직을 구성하였고 이것이 오늘날의 북한 정부가 된다.

이 때까지만 해도 독립운동가들은 분단된 정부를 만드는 것에 회의적이였고 반드시 남쪽과 북쪽이 하나의 완전한 한반도의 정부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실질적으로 2개의 강대국들에 의해 나뉘어 통치받고 있던 데다가 북쪽에서 김일성이 기반을 다져나가고 있는 동안 남쪽에서도 이승만이 미 군정에 협조하여 남쪽만의 정부를 만드는 작업에 들어가있어서 사정은 여의치 않았고 끝내 1948년 8월 15일에는 남쪽에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정한 대한민국이 건국되었고, 이에 질세라 같은 해 9월 9일 북쪽에는 김일성을 주석으로 선정한 북한(자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이 설립되어 이렇게 남과 북은 완벽히 두 갈래로 갈라지게 된다.

건국 이후

건국 이후 김일성이 가장 먼저 관심을 둔 것은 다름 아닌 남침. 김일성은 기회가 될 때마다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남침을 해야 한다고 설득하였으며, 처음엔 이미 수차례 벌인 전쟁으로 전쟁에 신물이 난 스탈린의 반대로 계속 무산되었으나 김일성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스탈린을 설득 시도하여 건국 직후인 48년도부터 50년도까지 2년 동안 자그마치 48번이나 면담을 가졌다.

스탈린은 처음엔 김일성의 요구에 이런저런 이유를 들면서 안 된다고 하다가 종국에는 '남한이 먼저 침공해오면 거기에 반격하는 것 정도만 허락하겠다'는 태도로 한발짝 물러섰지만 일단 남한이 선제공격을 걸리가 없는 게 너무 뻔했기 때문에 김일성은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김일성에게도 질릴대로 질린 스탈린은 1950년 5월 29일 마지못해 김일성의 요청을 허락하고 만다.

6.25 전쟁 이후

전후 김일성은 다시 북한으로 돌아왔으며, 자신의 파벌과 다른 파벌 소속 인물들에게 죄다 패전의 책임을 물어 숙청시켜버렸다. 첫 스타트는 박헌영의 처단이였는데 박헌영이 전쟁 직전 김일성에게 '남쪽을 침공하면 남쪽의 남로당원 20만명이 호응할 것'이라고 한 발언을 구실삼아 박헌영이 전쟁을 일으킨 것이라는 명분하게 숙청, 북측에 있던 인물들 중 김일성 다음가는 입지를 지녔던 박헌영이 이렇게 숙청되었으니 나머지는 물 흐르듯 아주 자연스럽게 숙청이 되었다.

이렇게 숙청을 하면서 패전의 책임을 사상이 나태한 탓이라는 주장을 내세우고는 그것을 근거로 황장엽이 만든 철학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마개조하여 주체사상을 만들고 그것을 북한의 유일한 이념으로 삼아 자신의 권력을 더욱 강화시켰다.

동시에 김일성은 공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주변 공산 국가들과의 연대를 강화하며 나아가 전쟁으로 폐허가 된 국토를 재건하게 된다. 이 시기엔 북한의 성장세가 뚜렷했기 때문에 실제로 북한 인민들의 삶이 그럭저럭 괜찮은 수준이였고 반대로 같은 시기 대한민국은 극도로 심각한 정경유착, 부패와 무능등이 겹쳐 저조한 성장세를 기록하고 있어 북한이 남한보다 더욱 지상락원에 근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말미

하지만 김일성이 정치 게임은 잘 해도 통치까진 잘 하는 건 아니라서 사실 나라를 점점 개판으로 만들고는 있었다. 단지 1970년 이전까지만해도 김일성의 실책은 이웃 공산국가인 소련과 중국의 지원으로 땜빵할 수 있어서 티가 안 났던 것 뿐이다. 결국 소련과 중국의 영향력이 약해지는 1970년도가 되면서 이웃국가들의 지원이 뚝 끊기자 드디어 김일성의 능력의 밑천이 고스란히 드러났으며, 엎친데 덮친격으로 세계가 평화모드로 돌입하면서 북한의 우군이였던 소련, 중국 등이 기존의 적이였던 자유주의 진영과 점점 거리가 가까워지자 자칫하면 권좌를 순식간에 잃을 것이란 공포에 사로잡힌 김일성은 주체사상을 더욱 가열차게 마개조를 하였고 이것을 근간으로 국가 정책을 자신의 수족인 군대에게 몰아주는 선군정치를 실행하여 군대의 힘을 키워 외부의 침공을 통해 자신의 권좌가 무너질 가능성을 차단하였다.

마지막으로 김일성은 북한 인민들의 눈과 귀를 닫아 내부의 반란를 통해 자신의 권좌가 무너질 가능성 또한 차단하기 위하여 북한 주민들의 모든것을 통제하기 시작하였으며 이 정책의 일환으로 시장이 폐쇄되고 지역 이동을 어렵게 하여 북한 인민들끼리 서로 어떤 식으로든 교류하지 못하게 틀어막았다. 하지만 이는 이미 그동안 충분히 막장이 될 준비를 다 끝마친 북한의 상태에 결정타를 날렸고 결국 북한은 우리가 잘 아는 지금의 상태로 붕괴해버렸다.

한편 김일성은 일찍이 차남 김정일에게 후계를 넘겨죽 작업을 다 마친 상태였고 말년에는 김정일에게 모든 실권을 넘긴 후 자신은 주석궁의 방에서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떴다. 죽기 직전 그는 유언으로 자신의 유해를 혁명열사릉에 묻어줄것을 요구했다.

사후

그의 사후 김정일은 자신의 권력 이양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김일성을 신격화할 필요성을 느꼈고 이에 아버지의 유언은 시원하게 씹은 뒤 그의 시신을 러시아에서 공수해온 전문가들을 통해 앰버밍 처리를 하였고, 동시에 주석궁을 개조하여 '금수산기념궁전'으로 만들어 김일성의 시신을 이 곳에 보존하고 있다. 이 장소는 후일 김정일이 죽으면서 김정일의 시신 또한 똑같이 앰버밍 처리되고 같은 장소에 모셔지면서 금수산태양궁전으로 불리게 되어 아들과 나란이 모셔지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기타

목 뒤에 거대한 혹이 있어 이른바 '혹 난 돼지'로 일컬어졌다. 2010년 이후로는 아들 김정일에 이러 손자 김정은까지 세습에 성공하면서 아예 로마의 황제스러운 이름인 '혹부리우스'라는 별명도 얻었다.

풍자와 왜곡을 일삼는 백괴사전에서 김일성 항목은 몇 안 되는 제대로 된 진실만을 적은 솔직한 항목이다. 심지어 카테고리를 '지옥에 떨어진 사람'에 분류한 것까지도 말이다. 이는 그만큼 이 작자의 행보가 진성 개노답이였기 때문.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김일성은 위의 보천보 전투 등에 참가한 김일성과는 다른 사람이며 독재자 김일성이 독립운동가 김일성을 코스프레한 것이라는 가짜설이 나돌기도 했다. 특히 김일성의 원래 이름이 '김성주'였기 때문에(김일성이란 이름은 후일 개명한 것) 이런 설이 더욱 강하게 돌았다.

한편 김일성이 죽은건 실은 김정일이 암살한 것이라는 설 또한 존재한다. 이것은 심지어 남한보다 북한에서 더 유명한 설인데 아마 김정일의 이미지가 북한 인민들 사이에서 김일성의 이미지보다 더 나쁘기 때문에 생긴 것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김일성은 죽기 직전 남북회담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회담일로부터 며칠 후에 급사했기 때문에 더욱 신빙성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어쩌면 진짜일수도 있지만. 다만 실제로 말년에 김정일이 김일성보다 더 권세가 강했다는 점은 사실인데 일례로 김일성은 김정일을 찬양하는 시를 써서 바치기도 했다(...). 이건 의심의 여지가 없는 확실한 진짜.

우상화가 심하다보니 별의별 말도 안 되는 신화들이 존재하는데 축지법을 쓸 줄 안다는 정도는 기본이로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서 싸웠다거나, 가랑잎을 타고 두만강을 건넜다거나, 웃통을 벗고 모래밭 위를 굴렀더니 모래가 전부 쌀이 되었다는 등 80년대 아동만화에서도 안나오는 황당한 소리들이 좀 많다.

이 외에도 북한에서는 그의 얼굴이 담긴 물체를 절대 훼손시킬 수 없다. 예를 들어 로동신문에 그의 얼굴이 찍힌 그림이 있으면 그 그림이 접히지 않도록 보관해야 하며 이를 어길시에는 무시무시한 곳으로 간다고 한다. 이 때문에 종종 농담삼아 대 북한군 결전 병기라며 김일성 얼굴을 프린팅한 방어복이 언급되기도(...).

더불어 북한에서는 그의 이름을 표기할때 반드시 강조체로 적어주어야만 한다. 게다가 그의 이름은 반드시 그의 이름이 포함된 문장의 맨 앞에 와야만 한다. 위의 문장들 중 하나를 예시로 들어 설명해보겠다. 본의 아니게 셀프 인용

전후 김일성은 다시 북한으로 돌아왔으며, 자신의 파벌과 다른 파벌 소속 인물들에게 죄다 패전의 책임을 물어 숙청시켜버렸다. 첫 스타트는 박헌영의 처단이였는데 박헌영이 전쟁 직전 김일성에게 '남쪽을 침공하면 남쪽의 남로당원 20만명이 호응할 것'이라고 한 발언을 구실삼아 박헌영이 전쟁을 일으킨 것이라는 명분하게 숙청, 북측에 있던 인물들 중 김일성 다음가는 입지를 지녔던 박헌영이 이렇게 숙청되었으니 나머지는 물 흐르듯 아주 자연스럽게 숙청이 되었다.

이 부분을 북한식으료 표현하면 다음처럼 된다.

전후

김일성은 다시 북한으로 돌아왔으며, 자신의 파벌과 다른 파벌 소속 인물들에게 죄다 패전의 책임을 물어 숙청시켜버렸다. 첫 스타트는 박헌영의 처단이였는데 박헌영이 전쟁 직전
김일성에게 '남쪽을 침공하면 남쪽의 남로당원 20만명이 호응할 것'이라고 한 발언을 구실삼아 박헌영이 전쟁을 일으킨 것이라는 명분하게 숙청, 북측에 있던 인물들 중

김일성 다음가는 입지를 지녔던 박헌영이 이렇게 숙청되었으니 나머지는 물 흐르듯 아주 자연스럽게 숙청이 되었다.

...이런 식으로 정리가 된다. 참고로 이 규칙은 김정일에게도 적용된다.

북한에서 사용하는 전용 한글 폰트는 이 규칙에 입각하여 만약 김일성, 김정일이 입력되면 자동으로 강조체가 되는 구조로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이것을 (뻔뻔하게도) 유니코드에 등재시키려고 시도도 했지만 당연히 무산되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