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미폰 아둔야뎃

최근 편집: 2022년 12월 30일 (금) 01:34
태국의 국왕
아난타 마히돈(라마 8세)
(1935-1946)
푸미폰 아둔야뎃(라마 9세)
(1946-2016)
마하 와치랄롱꼰(라마 10세)
(2016-현재)


푸미폰 아둔야뎃
라마 9세 대왕 폐하
푸미폰 아둔야뎃 대왕 폐하의 어진
타이 왕국 제9대 국왕
국적 타이 왕국
생년월일 1927년 12월 5일 - 2016년 10월 13일
재위기간 1946년 6월 9일 ~ 2016년 10월 13일
대관식 1950년 5월 5일
성별 남성
가족 아버지 마히돌 아둘야뎃, 어머니 스리나카린트라
아들 마하 와치랄롱꼰
딸 우본라따나, 시린톤, 쭐라폰 왈라일락

푸미폰 아둔야뎃 (ภูมิพลอดุลยเดช) 대왕은 타이 왕국의 제9대 국왕(군주)이다.

짜끄리 왕조라마 9세대왕이라고도 하며, 정식 성명은 프라 밧 솜뎃 프라 뽀라민타라마하 푸미폰 아둔야뎃 마히뜰라티벳 라마티보디 짜끄린리쁘딘톤 사야민트라티랏 보롬나트보핏(พระบาทสมเด็จพระปรมินทรมหาภูมิพลอดุลยเดช มหิตลาธิเบศรรามาธิบดี จักรีนฤบดินทร สยามินทราธิราช บรมนาถบพิตร)이다. 1946년부터 2016년 약 70여년간 태국의 군주이자 태국군의 총사령관, 짜끄리 왕조 수장직을 지냈다. 푸미폰 아둔야뎃 대왕은 엘리자베스 2세보다 더 오랜 기간 재위했으며 라마 1세, 라마 5세와 함께 "대왕" 칭호를 받았다. 재임 기간 무려 19차례의 쿠데타와 20회에 걸친 개헌이 있었을 만큼 태국의 근현대사는 굴곡이 많았지만, 격변과 혼란기에는 어김없이 푸미폰 아둔야뎃 대왕은 최악의 상황을 막는 구심점이자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일생

푸미폰 대왕은 1927년 12월5 일 미국 매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에서 태어났다다. 근대 의학과 공중보건의 아버지로 불리는 부친 마히돌 왕자는 당시 미국에서 의학 공부를 하던 중이었다. 푸미폰 대왕은 스위스에서 중등교육을 받았고 로잔대학교에서 과학을 공부했다.

친형인 아난타 마히돈(라마 8세) 국왕이 1946년 약관의 나이로 사망한 뒤 즉위했고 대관식은 이듬해에 치뤄졌다. 푸미폰 대왕은 삼촌을 섭정으로 임명하고 통치자로서의 자질을 갖추고자 스위스로 돌아가 대학 과정으로 정치법률학을 전공해 수료했다. 1950년 4월에 시리낏 왕비와 결혼했다.

푸미폰 대왕은 국교인 불교의 수호자로서 한때 출가 생활을 했으며, 막대한 왕실 재산을 수많은 농업 및 지역 개발 사업에 투자했다. 젊었을 때 직접 산간 벽지의 가난한 농민과 소외된 소수 민족을 찾아가 이들이 처한 문제를 눈으로 확인하고 듣고자 했고 1950년대부터는 한 해에 200일 이상을 시골에서 지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가 몸소 카메라를 메고 산간벽지를 찾아다니며 가난의 실상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모습은 태국의 국민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푸미폰 대왕은 이런 국민의 소리를 바탕으로 '로얄 프로젝트'라는 이름의 사업을 추진했다. 사업 영역은 농업, 수자원, 환경, 고용, 보건, 복지 등을 망라했으며, 크고 작은 규모의 로열 프로젝트가 자그마치 4천여건에 달했다. 그는 특히 북부의 소수 종족인 고산족의 복지를 개선해 1988년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막사이사이 상을 받았으며 2006년에는 유엔으로부터 제1회 '인간개발 평생업적상'도 받았다. 당시 사무총장이었던 코피 아난은 그가 "세계의 개발 왕으로서 신분과 종족, 종교를 초월해 극빈자와 취약 계층을 위해 헌신했다"고 평가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태국을 중진국 반열에 올려 놓고 국민과 두터운 신뢰를 쌓은 그는 군부 쿠데타나 대규모 시위 등 격변기에 권위있는 중재자 역할을 했다. 1973년에는 군부가 민주화 시위에 나선 학생들을 향해 발포하자 학생들에게 궁전 문을 개방했다. 1992년에는 민주화 시위 와중에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수친다 크라프라윤 당시 총리와 야권을 대표하는 잠롱 스리무리앙 전 방콕 시장이 대립하면서 정치적 불안이 극에 달했다. 푸미폰 대왕은 두 사람을 왕궁으로 불러들여 무릎을 꿇어앉히고 아래의 내용과 같이 질책했다.

국가는 모든 사람에게 속하며, 하나 또는 두 명의 특정 사람들에게는 속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서로 이야기하고 함께 해결하지 않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고한 시민이 피를 흘렸습니다. 사람들은 폭력에 의지하면 마음을 잃을 수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왜 그들이 서로 싸우며 그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단지 그들이 서로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들은 유일한 승자가 되기 위해 이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 길은 승리로 이어지지만 위험합니다. 승자는 없고 패자만 있을 것입니다. 서로 폭력적으로 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패자가 될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그 패자의 국가가 될 것입니다. ... 유적과 파편에 서있을 때 그대가 승자라는 것을 당신은 스스로에게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이러한 그의 모습은 국민에게 깊이 각인됐다. 수친다 전 총리는 결국 해외 망명길에 올랐다. 그러나 노령기에 접어든 푸미폰 대왕 폐하는 지난 2009년 이후 수 없이 방콕 시리라즈 병원에 입원해 생활했고 국민은 그의 안위를 크게 걱정했다. 태국 국민은 그의 무병장수와 건강 회복을 위해 늘 기원하였으나 애석하게도 대왕 폐하께서는 2016년 10월 13일 시리라즈 병원에서 사망했다. 왕실 사무국은 성명을 통해 "주치의들이 최선을 다해 상태를 면밀히 살피고 치료했지만, 대왕 폐하의 상태는 호전되지 않은 채 계속 악화했다"고 밝혔다. 이 날 태국 방콕에는 큰 별이 지고 말았다.

이후 태국 정부는 1년간의 애도 기간을 선포하였고 30일간 축제를 금지하였다. 대왕 폐하의 장례식은 1년이 지난 2017년 10월 26일 사남루앙 왕립화장장에서 열렸다.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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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절대왕정이 폐지되고 입헌군주제가 도입된 이후 추락하던 왕실의 위상은 푸미폰 아둔야뎃 대왕의 치세에 이르러 회복됐다. 그는 태국 사람들로부터 높은 존경을 받았으며, 어떤 사람들은 그를 신에 가까운 존재로 보았다. 불안한 정국 속에서도 태국이 동남아시아에서 비교적 높은 자유와 안정을 누리고 있는 것은 푸미폰 대왕이 사회 구심점으로서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대부분의 국민은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권위주의 및 왕실과 군부간의 커넥션을 이유로 비판을 하기도 하며 이는 "왕이 민주주의를 말하자 국민들의 머리가 땅에 닿았다"라는 말로 대표된다. 실제로 라마 9세는 과거 시암 혁명때부터 군부와의 커넥션을 통해 자신의 권위를 유지했으며, 군부의 권위가 자신을 위협할 정도가 되면 군부 내 쿠데타나 민주주의에 대한 지원을 통해 이를 부쉈다는 음모론도 존재한다.[1]

재산

2010년 포브스지는 푸미폰 아둔야뎃 대왕의 재산과 투자를 포함한 자산과 왕실 소유를 포함하여, 푸미폰 아둔야뎃 대왕의 재산을 300억 달러로 추정했다. [2]

출처

  1. package.lua 80번째 줄에서 Lua 오류: module 'Module:Citation/CS1/Suggestions' not found.
  2. 강남규 (2015년 1월 30일). “[똑똑한 금요일]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태국 왕실”.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