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공화국

최근 편집: 2022년 12월 25일 (일) 03:59

개요

  • 프랑스공화국(la République française)
  • 언어 : 프랑스어
  • 수도 : 파리
  • 인구 : 프랑스의 인구는 약 7000만 명[1]이다. [2]

역사

중세

프랑크 왕국은 843년 베르덩 조약으로 세 왕국으로 갈라지고, 870년 메르센 조약에 의해 중프랑크 왕국에서 기원한 로타링기아 왕국이 각각 서프랑크 왕국과 동프랑크 왕국에 나뉘어 편입되었다. 프랑스의 중세적 기원은 바로 서프랑크 왕국이다.

서프랑크 왕국은 바이킹 침입에 잘 대응하지 못한 카롤링 왕조의 왕권이 몰락하다시피 하고 지방 실권자들이 지역을 수호하면서 수없이 많은 제후국들이 난립하게 되었다. 제후들은 약한 왕을 상급자로 인정하기는 했으나 봉신으로서의 책무는 다하지 않았다.[3]

카페 왕조

987년 봉건제후들이 위그 카페(재위 987년-996년)를 왕으로 추대하면서 이후 341년 동안 지속되는 카페 왕조가 열렸다.

그러나 카페 왕조 초기에는 파리 근방의 직할지인 일 드 프랑스 지역 외에는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3] 10세기와 11세기 경에 귀족들은 정치적인 결혼이나 무력 정복을 통해 아키텐, 노르망디, 플랑드르, 앙주, 블루아, 샹파뉴, 부르고뉴 등의 지역적 구획을 형성했는데 이런 대규모의 지방들은 프랑스 왕과 거의 유사하거나 더 강대한 세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루이 6세에 이르러 일 드 프랑스는 안정화되었다. 루이 6세는 자신의 아들 루이 7세를 아키텐의 공작인 엘레오노르와 결혼시켰는데 이후 부부 간 불화가 심해졌고, 엘레오노르가 동행한 2차 십자군 원정이 실패하면서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엘레오노르가 결혼 무효화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루이 7세는 동의하지 않았고 교황 에우제니오 3세는 결혼 무효화를 거절했다. 이후 둘 사이에서 둘째 아이가 첫째 아이에 이어 딸로 태어나자 루이 7세는 엘레오노르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해 결혼 무효에 합의한다. 1152년 결혼이 무효화된 후 엘레오노르는 딸들의 양육권을 루이 7세에게 넘겨주고 결혼 전에 공작으로서 가지고 있었던 아키텐 지방 영지를 되돌려받았다. 엘레오노르는 결혼 무효 2달 뒤 아키텐 지방을 소유한 채로 9살 연하의 친척 헨리 플랜태저넷(헨리 2세)과 결혼하는데 이로 인해 앙주 제국이 광대한 지역을 통치하게 되면서 프랑스는 심각한 위협에 빠졌다.

루이 7세의 뒤를 이은 필리프 2세는 잉글랜드 왕 존을 상대로 노르망디의 봉토를 몰수한다고 선언한 후 부뱅 전투에서 승리하여 가스코뉴를 제외한 앙주 제국의 모든 지역을 흡수했다.
또한 1207년 알비 지역의 이단을 처리하기 위한 교황의 알비 십자군을 틈타 남프랑스의 툴루즈도 영토에 편입시켰다. 그는 재정과 사법을 관장하는 장관(provôt)을 두고 봉토를 수여했으며, 장관을 감독하는 대관(bailli)을 임명했다.[3] 또한 전국을 대관구로 나누어 재판과 납세를 관리했고 파리를 수도다운 도시로 만드는 데에 착수했다.

뒤를 이은 성왕 루이 9세(재위 1226년-1270년)는 왕실 법정을 확대하고 파리중앙법정을 설치했는데 이는 후에 파리고등법원이 된다.
그는 사법제도를 확립했으며 13세기 중반 지방도시에 파견되기 시작한 순찰사들이 시민들의 분쟁을 조절했다. 루이 9세는 각 도시에 해마다 예결산 보고서를 제출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이단을 매우 엄격하게 규탄했는데 이단을 정벌하기 위해 일으킨 십자군 때문에 여러 사건을 겪는다. [3]

루이 9세가 십자군을 일으켰다가 카르타고에서 사망하자 미남왕 필리프 4세가 1285년 왕위에 올랐다. 필리프 4세는 왕권의 우위를 강조했는데 군주권과 중앙정부에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철저히 제거하려 했다. 그는 전쟁을 벌이는 한편 혼인정책을 통해 부르군드 지역의 프랑슈 콩테를 획득했다.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와는 성직자 과세 문제로 대립했으며, 가혹하고 교묘한 술책으로 템플 기사단을 박해하고 이들의 막대한 재산을 빼앗았다.[3] 그는 성직자와 귀족, 도시민의 세 신분을 대표하는 대표자들을 소집하는 삼부회를 창설했다.

표기

프랑스어로는 La france, 영어로는 France, 중국에서는 法国(법국)이라고 한다. 국가명 자체의 유래는 라틴어 Francia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옛날에 佛蘭西(불란서)라고 불렀는데, 이는 일본의 한자 음차에서 따온 것이다. 경우에 따라 중국의 법국과 일본의 불란서의 하이브리드로 法蘭西(법란서)라고 표기한 기록이 있기도 하다. 불어과 할때의 불이 불란서에서 나온것.

같이 보기

출처

  1. [국립 통계 경제 연구소(INSEE)], 정확히 66,9 millions, 2017년 자료
  2. “france”. 《프랑스 위키페디아》. 
  3. 3.0 3.1 3.2 3.3 3.4 차하순 (2017). 《새로쓴 서양사 총론 1》. 탐구당. ISBN 97889873144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