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람장로교회 창립

최근 편집: 2022년 12월 16일 (금) 04:01

제퍼슨장로교회를 떠난 교인들은 헝거리언개혁교회의 건물을 빌려 해람장로교회라는 이름으로 새 교회를 시작했다. 새 교회 시작 직후 백리언 목사가 교통사고로 목회를 할 수 없게 되어 이창식 목사가 1대 목사로 부임하고, 세번의 건물 이전을 거쳐 1981년에 오늘날의 위치에 자리잡게 된다.

해람장로교회 창립

1975년 1월 첫주일인 5일 오후 2시 8가와 크렌셔가 만나는 사거리에 위치한 헝거리언 개혁교회 (Hungarian Reformed Church: 751 Crenshaw Blvd. LA, CA)에서 창립목사 백리언과 31명의 신도가 모여 해람장로교회 역사적인 첫 예배를 드린다.

박양원씨의 연주를 시작으로 백리언 목사는 시편 34편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으로 예배 선언을 하고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제목의 첫 설교를 한다.

교회 창립은 LA지역의 여러 교회들로부터 많은 관심속에 이루어졌으며 특히 백리언 목사가 4대 담임목사로 시무했던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로부터 지대한 관심을 받았다.


창립 당시 국내외 정세

5.16 군사 쿠데타 후 박정희와 장도영

창립당시 한국은 일본 제국주의 강점기가 끝난지 30년이 지난시점 이며, 한국전쟁 (1950.6.25~19537.27)이 발발하고 종전이 된지 22년이 지난 시점으로 당시 초대목사를 비롯한 장년층 신도들 대부분이 한국의 두 비극적인 시대를 겪으며 성장한 세대들이었다.

또 당시의 한국은 남북으로 분단된 상황에서 북측은 김일성 공산 독재 체제하에 있었으며, 남한은 1961년 5월 16일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부(1961.5.16~1979.10.26)가 제3공화국 체제에서 1972년 10월 17일 헌법을 개정하여 유신독재(1972.10.17~1979.10.26) 로 전환 한다.

미국 내 반전 시위

미국을 보면 1964년 가을 버클리 대학으로부터 시작된 대학가의 반전 운동은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70년 미국이 캄보디아 내전에 개입하면서 절정에 이르지만 1973년들어 베트남으로부터 미군이 철수하면서 시위도 잠잠해 졌다.

일자리와 자유를 위한 워싱턴 DC 민권 행진

1964년 7월 2일 존슨 대통령은 공공장소, 고용, 선거에서 인종차별을 금지한다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해람장로교회 창립 당시 미국에서는 인종차별이 법으로 금지된지 1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사회 곳곳에 흑인뿐만 아니라 한인들을 포함한 소수민족 이민자들에게도 차별이 여전히 남아있던 시절이었다.

1965년에는 미국 이민법이 크게 개정되면서 미국으로의 한인 이민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개정된 이민법에 의해 유학생, 객원 간호사와 의사의 신분으로 미국에 건너 온 한인들이 영주권을 취득하게 되었고 이들이 1965년부터 1970년 사이의 한인 이민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후에 국제결혼한 한인 여성들과 함께 한국에 남은 가족을 초청하면서 1970년대에 들어서 급격하게 증가하기 시작한 한인 이민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창립목사 백리언

해람장로교회 창립목사로 모신 백리언목사의 호는 해람(海籃)으로 평안북도 의주출신으로 일찍 만주 봉천에 가서 살았다. 일본 동경 신학교에서 수학한후 일제 말엽에 다시 봉천에 돌아기서 봉천 신학교를 졸업하고 1946년 2월 14일 목사 안수를 받고 봉천 서탑교회에서 첫 목회를 시작하였다. 해방후 귀국하여 전라남도 광주의 전방교회에서 시무하다가 연세대학교 교목으로 재직한다. 1956년에 미국 샌프란시스코 신학교에 유학하여 신학석사(S.T.M.)학위를 받고 귀국 후에는 연동교회 목사를 역임(1962~1966)하고 1968년 3월부터 다시 연세대학교 교목실장으로 봉직하고있었다.

나성연합장로교회에서 많은 싸움을 경험한 우리들은 싸우지 않으려면 가능한 한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모든 문제를 풀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목회자도 설교도 좀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분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래서 좀더 이성적으로 서로 싸우지 않고 교회를 이끌어 가 보자는 분위기로 백리언 목사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미국에 있는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로부터의 청빙을 수락 하면서 1969년 7월 1일부터 4대 담임목사로 부임한다. 하지만 서 오래된 교회 갈등으로 빚어진 시련 끝에 3년이 채 안된 1972년 6월 18일 노회에 시무 사면서를 제출하고 그해 7월 4일 한국으로 돌아간다. 1974년 서울 종암교회에서 시무하던 백리언 목사는 다시 미국에 입국하여 7월 7일 나성한인영합장로교회 초청설교를 한후 1975년 1월 5일 자신의 호를 교회명으로 하여 해람장로교회 창립목사를 역임하게 된다.

해람 장로 교회의 의미

해람은 바다해(海) 바구니람(籃)이 합쳐진 백리언 초대목사의 호이며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다. 동일 단어를 사전상에서 찾아보면 동음이의어인 풀해(解) 닻줄람(纜)자가 합쳐저 ‘닻줄을 풀어 배를 출발시킨다’는 출범이라는다른 의미를 띈 한자조합의 보통명사가 나타난다.

창립 당시, 제 곁에 누가 같이 있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버님께서는 “이제 마지막으로 죽을 힘을 다해 이 교회에 봉사 하고자 합니다. 선친께서, 네가 이 다음에 커서 큰 일을 하게 되면 이 이름을 쓰라. 하시며 해람(海籃)이라는 호를 지어 주셨는데, 교회 이름을 ‘해람 장로 교회’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라고 물으니 모두들 “그렇게 하시지요” 하고 찬성 하였습니다.
20주년기념지 ‘카이로스’ 백리언 목사의 자부 백혜옥 글

그렇지만 ‘요람에서 무덤까지’에서의 요람은 흔들 요(搖),바구니 람(籃)을 사용 하였다면 이를 통해 대략 그 의미를 추측을 할 수 있다.

요람은 젖먹이 어린애를 잘 놀게 하거나 재우기 위하여, 위에 눕히거나 앉히어 놓고 흔들게 만든 바구니로 만든 물건으로 ‘포근하고 아늑한 보금자리’, ‘어떤 일의 발생지나 근원지’,’어떤 일이 발전하는 실마리’ 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그렇다면 해람(海籃)은 ‘바다를 품을 수 있는 큰 바구니’, ‘바다처럼 큰 근원지’, 등의 의미를 띄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0년전 백리언 목사의 자부인 백혜옥씨는 글을 통해 해람이 교회명으로 채택되게 된 동기를 전해주고있다.


이렇게 명명된 ‘해람장로교회’는 의미에 대한 의문과 작명동기에 대한 논란의 여지를 안고 24년간을 유지하다가 1998년 9월 1일 제 3대 담임목사로 김기대목사가 부임한 직후인 1999년 1월 3일 현재의 이름인 ‘평화의교회’(Church of Peace)로 바뀐다.

첫 당회 구성

창립예배를 드린 지 3개월이 지난 1975년 4월 9일 당회장 백리언 목사와 이대수, 문영조, 방미철, 김종근 네 장로로 첫 당회가 구성 되었다.

초대 당회원들과 세례교인 박노철, 박선영 부부

네 장로들은 모두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 출신 이었다. 백리언 목사가 이 교회의 4대 담임목사직을 사퇴하기 전후 이 교회의 당회원들과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후 당회원 모두 담임목사를 사퇴에 이르게 한 분쟁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해산 되었다.

그리고 새 당회를 선출하게 되었는데 이때 새로 선츨된 장로는 김치은, 문영조, 안정옥, 이대수, 조규환, 차경수 6명이었다. 이중 문영조 장로, 이대수 장로, 당시 이교회에 함께 재직중이던 김종근 집사와 방미철 집사 총 4명이 이교회를 떠나 백리언 목사를 중심으로 해람장로교회 창립을 주도하게 되었다.

백리언목사의 교통사고와 장기입원

수많은 인근지역 교회, 그리고 창립 당시 초기 교인들의 기대와 지대한 관심 속에 출발한 해람장로교회는 뜻밖의 불행한 시련을 맞게된다. 새 교회를 시작한지 불과 얼마되지 않은 1975년 6월 초 교통사고를 당하여 병상에 누워 목회를 할 수 없는 사태가 발생했다. 창립 후 얼마 되지 않아 지도자를 설교단에서 볼 수 없는 초기 신도들, 그리고 당회장 없이 당회를 이끌어야하는 젊은 4명의 장로들에게 첫 걸음부터 재앙과 같은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창립 20주년 기념지 카이로스의 ‘단편회고’를 통해 “네 젊은 장로들은 마치 고아가된 심정”이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제 1대 이창식 목사와 교회의 성장

이창식 목사 부임 – 교회의 기틀을 놓다

이창식 담임목사 취임식

교회를 창립한지 5개월밖에 안된 시기에 뜻밖의 교통사고로 백리언 창립목사가 목회를 할 수 없게된 상황에서 매주 주일마다 네 장로가 번갈아 사회를 보는가운데 새로운 목사를 초청하여 설교를 부탁하면서 담임목사가 공석인 예배를 이어 가야만 했다.

창립목사께서 병상에 누우신 후 주일 예배는 드려야 하고, 옛날처럼 장로들이 설교를 할 수도 없고 해서 여러 목사님들을 초청하기 시작했습니다. 설교를 부탁드린 목사님을 두번째 초대하게 된경우 초청 목사로 부터 장로들에게 문의 전화가 옵니다. 두번이나 초청해서 설교 기회를 드리게 되면 본인에게 담임목사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열이면 열분의 목사님들이 이같이 접근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이창식 목사님께도 설교 부탁을 드렸을 때, 그분은 참 특이했습니다. 한국사회에서는 물론이고 미국사회에서 조차 보기 힘들게 특이했을 것입니다. 이분은 설교를 마치시면 식사나 디저트를 준비했음에도 일절 안드시고, 인사도 나누지 않고 곧장 차를 몰고 사모님과 함께 떠나셨습니다. 설교가 끝나면 교인들과 인사를 나누는 시간을 갖지 않으시고 바로 떠나셨습니다. 두번 세번 설교를 부탁 드려도 이창식 목사님은 부담을 주지 안았습니다. 즉 본인의 담임목사 초청 여부도 묻지 않으시고, 눈치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모습에서 장로들은 다른 목사님들과 구별되는 특이한 면을 발견 했습니다.

이렇게 8개월이 넘게 예배를 진행하다 1976년 2월 8일 이창식 목사의 초청이 이루어지고 이날 이대수 장로의 사회와 이창식 목사의 ‘제 이름은 레귀온 입니다’라는 제목의 설교를 통해 해람장로교회와 긴 인연이 시작된다. 당시 교회는 장년 40명 유년부 30명 을 합쳐 70명 정도가 꾸준히 예배에 출석하고 있었다. 예배시간은 2월1일부로 오전 9시로 변경되었다.

1976년 3월 7일 이대수 장로의 사회로 이창식 목사는 ‘잡힌바 된 그것을 잡는 사람’이란 제목으로 담임목사 부임설교를 하게 되는데 이날 교회는 주일학교 38명 장년 33명 모두 71명이 출석했다.

이창식 목사는 만주 북간도 용정에서 출생하여 1953년 한국신학대학(한신대)을 졸업하여 1965년에는 육군 군목 (소령)을 거쳐 1966년에는 기독교장로교단 교육담당 총무를 지냈으며 1969년에는 경동교회 부목사로 사역하였다. 1976년에 훌러신학대학(석사)을 졸업하고, 같은해 해람장로교회 1대 담임목사로 부임한다. 1978년 담임목사 취임후 1982년 남가주 KPC회장을 역임하고 1983년에는 클레어몬트신학교(목회학 박사)를 졸업한 후 1993년 교회에서 은퇴하기까지 17년간을 사역했다. 은퇴 후에는 어려운 교회를 돕는 Interim 사역을 하였다. 그리고 2005년 10월 15일 오후 8시 78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천주교 평신도 회관으로 교회 이전

1976년 11월 21일(감사주일)이 시작되는 주일부터 예배시간이 오전 9시에서 오후 2시로 변경해야 했다. 이에 대한 불편으로 전 교인이 기도하면서 새로은 예배 처소를 찾게 된다.

한편, 이창식 목사가 부임한 이후 조금씩 증가하던 교인수가 연말쯤에는 주일예배 66명과 주일학교(어린이)3 5명을 합쳐서 101명 정도로 성장했다.

두 번째 예배처였던 천주교 평신도 회관에서 2년반을 무사히 지내던 어느날, 꼭 황소같이 생긴 천주교 평신도 회의 회장으로 새로 선출됐다는 사나이가 씩씩거리며 나타나서 ”당신들 다음 주일 까지만 있고, 나가 주시오. 그리고 오늘부터 사교실은 우리가 써야 하니 본당만 쓰도록 하시오.”  다음 주일이 목사 위임식인데, 웬 마른 하늘에 날벼락? 셋방살이 설움이라. 하는 수 없이 다음 주일 목사 위임식을 마치고 좁은 본당에서 식사까지 하느라 복작거리는데, 때는 9월 인디언 써머의 꼭지점이다. 고개만 움직여도 땀이 주르르, 찐득찐득. 아 어찌 우리 잊으리요, 그 날을. 그 고통의 찌름을…

온 교인들이 기도하는 가운데 찾고있던 새로운 예배장소가 ‘천주교 평신도 회관’ (Knight of Columbus Council 621 Building Club : 850 S. Bonnie Brae Ave, Los Angeles, CA)으로 결정되면서 드디어 크리스마스 다음 날인 12월 26일부터 오전 11시 예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새 예배처가 결정 되면서 당시로는 $3,000 예산의 오르간을 사기 위해 특별헌금이 12월 12일 주일예배 시간을 통해 공지 되고 모든 교우들의 정성어린 헌금을 모아 구입하게 되면서 이사후 첫 예배에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1977년 1월2일 신년 주일 예배 에서는 교회를 창립하고 초창기를 희생적으로 이끌어준 백리언 목사의 업적을 기리는 공로패를 증정했다.

5월 22일 주일 예배에는 ‘북미 한국 기독교 학자회’ 제 11년차 대회 참석차 방문중이던 장공 김재준 목사의 설교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여전도회 창립

‘해람 장로 교회 여 전도회’가1977년 1월 21일 문명미 집사댁에서 창립 준비 모임을 가진 후 1월 30일 예배후 본당에서 창립 총회를 열었다. 임시 회장에 백시옥 임시 서기에 김성희를 선출하여 시작된 회의 결과 제1대 회장에 황명숙 집사가 선출 되었다.

이 때 시작된 여전도회는 1995년 1월에 ‘여 신도회’로 명칭을 변경 하였으며 동년 5월에는 ‘권사회’가 ‘여 신도회’에 합류 하게 된다. 조수경 목사는 여전도회 대신 한국 기독교 장로회에서 사용하는 여신도회라는 명칭을 도입한 것이다.

1978년부터 1995년까지 봉사, 선교, 구제의 아름다운 전통을 이어오면서 회의를 이끌어온 역대 회장은 다음과 같다.

초대회장 황명숙, 1대 회장 이정선, 2대 회장 김성희, 3대 회장 백시옥, 4대 회장 안영희, 5대 회장 양경옥, 6대 회장 김선심, 7대 회장 문명미, 8대 회장 이수옥, 9대 회장 정선옥, 10대 회장 구전묘, 11대 회장 민양주, 12대 회장 신영자, 13대 회장 박선영, 14대 회장 신은옥, 15대 회장 김정화, 16대 회장 이정성, 17대 회장 송혜숙, 18대 회장 안상미

여신도회 사업 개요

  • 1979
  • 한국의 수재민을 위한 구호금 전달(한국일보 미국 지사를 통해) $265
  • 한국의 수재민을 위한 구호품(의류를 남가주 한인회를 통해) 전달
  • 교회건축헌금을 위한 바자회 수익금 헌납 $1,414.81
  • 1979 교회 건축헌금 $5,286.95
  • 1980 불우 여성 돕기 사업 $400
  • 1981 교회 주방기구 설치 $900
  • 1983 YMCA 청소년 전도 사업(신학생 장학금) $500
  • 1984 UNITED WAY $500
  • 1987 AFRICA KENYA 선교헌금 2회
  • 1988 한국 아동 복지회 지원 $430
  • AFRICA KENYA 선교부에 양수기 기증 $600
  • 1989 남녀 전도회 합동 AFRICA선교 기금
  • 1990 나성 신체 장애자(물댄동산) 지원 $387
  • 한국 맹인 선교회 성금 $1,000
  • 한국 아동 복지회 $500
  • 베다니의 집(은퇴 전도사의 집) 지원 $500
  • KENYA 선교회 건축 기금 헌금 $500
  • EL SALVADOR 난민 구호금 $1,000
  • 1991 KENYA 장학금 지급 $1,000
  • 맹인 선교회 개안 수술비 지원 $500
  • 전라도 나눔교회 지원 $500
  • 복음의 전령 헌금 $100
  • 1992 실로암 안과병원 지원 $716
  • 소련 선교 신약성경 지원 240권
  • KENYA 신학생 학비 보조 $1,000
  • UNION RESQUE MISSION $500
  • 한국 맹인 선교회 선교 지원 $300
  • 모스크바 성경학교 지원 $300
  • 여성 보호센터 지원 $300
  • 1993 실로암 개안 수술 지원
  • 시온 복음 선교 교회 선교 후원 $200
  • 교회 옆 기술학교 후원 $100
  • 1994 AFRICA선교 후원 $951
  • 중서부 수재민 의연금 $625
  • 11월 바자회 수익금으로
  • 주방시설 확장 및 비품 구입
  • 1995 실로암 병원 개안 수술비 지원 $1,000
  • 교회 학교 교육 재료 및 활동비 지원 $616
  • 예배실 수리비 헌금 $1,500
  • 전국 여성 선교회(NKPW) 2세 교육 개척 기금 $200
  • 인도 선교 선교비 지원(선교사 1인 1년분 지원금) $600
  • 모퉁이 선교회를 통하여 북한에 성경책 30권 보냄
  • 권사회 기금 $2,500으로 교회에 새 복사기 기증
  • 자원봉사자 시스템을 조직하여 주 중 2회 봉사
  • 전 교인에게 전도지 ‘오늘의 양식’ 배부
  • 폐품 수집을 통한 자연환경 보호에 참여

그 외에도 친교실의 주방시설이 완공된 1994년 부터는 예배후 친교 시간에 전 교인의 점심식사를 준비해 왔다.

제 1차 건축 위원회 구성

1977년 에 들어서 교회 자체 건물을 마련하기 위하여 4월 10일 교회는 부활절을 계기로 교회 건축 위원회를 조직하고 건축위원으로는 이대수, 문영조, 김종근, 방미철 네 장로와 백형설, 신영한, 최병권 집사 모두 7명으로 하고, 자문의원으로는 성가대장, 여전도회장을 임명 하였다. 그리고 다음 주일인 4월 17일 건축 위원회 위원장으로는 이대수 장로를, 서기에는 백형설 집사, 회계에는 신영한 집사를 임명 하였다. 그리고 첫 단계로 9월 11일부터 일년간 주일 헌금을 통해 $30,000을 목표로 건축 헌금을 조성 하기로 하였다. 그러자 불과 3개월만에 목표 액인 $30,000의 건축기금을 조성함으로써 교회 건축에 기초를 닦아 놓았다.

1대 담임 이창식 목사 위임

1976년 3월 7일 부터 부임하여 예배를 진행하던 이창식 목사는 그로부터 2년 6개월이 지난 1978년 9월 24 드디어 1대 담임목사로 정식 위임을 받게 되었는데, 이날 백학구 장로의 장립과 문병옥 초대 권사의 취임예배도 함께 이루어졌다.

비록 짧은 기간 이지만 사실상 창립 담임목사로 시무했던 해람 백리언 목사를 1대 담임목사로 기록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백목사가 창립 직후 5개월만에 당했던 불의의 교통사고로 더 이상 시무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미처 정식위임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어서 목회를 이끌어가던 이창식 목사가 1978년 9월 24일 최초로 정식위임을 받음으로써 장로교 전통에 따라 1대 담임목사가 된다. 그리고 백리언 목사는 창립목사가 되는 것이다.[주 1]

박명필 전도사의 부임

1979년 6월 19일 해람 장로교회에 박명필 전도사가 부임한다. 그리고 1986년 9월14일 출범한 권사회 (1995년 5월 ‘여신도회’에 합류) 고문으로 임명된다. 1995년 6월 4일 은퇴 하기까지 자신의 전도사 생활중 말년의16년간을 해람장로교회에 헌신적인 노고를 쏟은 후에 당시 교우들의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감사와 기쁨속에 44년간의 전도사 사명을 마친다. 박명필 전도사는 2012년 8월 12일 별세했다.

세번째 예배처 Faith Presbyterian Church로의 교회 이전

두번째 예배처소로 사용해왔던 천주교평신도회관 (850 S. Bonnie Brea St., LA, CA)을 떠나 1979년 7월 8일2057 Century Blvd., LA, CA에 위치한 Faith Presbyterian Church로 창립 이후 두번째 이사를 하게 되었다. 새로 이사하게 된 예배처는 기존의 천주교 평신도회관으로부터 직선 거리로 8마일 남쪽으로 다소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대부분의 교인들이 변함없이 출석하여 예배를 보았다.

제 2차 건축 위원회 구성

1975년 1월 5일 헝거리언 개혁교회(Hungarian Reformed Church)에 첫 예배처소를 정하고 그로부터 2년후인 1976년 12월 26일 두번째로 천주교 평신도 회관(Knight of Columbus Council 621 Building)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반이 지난 1979년 7월 8일 에는 Faith Presbyterian Church로 이사하게 되면서 세번째 예배처소에 이르기 까지 두번의 이사를 치렀고 이 과정에서 겪은 세입자로서의 서러움은 앞에 해람 장로 교회 20주년 기념지 카이로스 ‘단편회고’ 의 셋방살이 설움을 통해서도 읽을 수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꾸준히 교인 수 가 증가 했으며 그에따른 여러가지 불편함을 감수하는 과정에서 이제는 자체 교회건물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1979년 9월 2일 김종근장로를 위원장으로 하는 2차 건축 위원회를 구성 하한다. 1980년 5월에는 그동안 매입 수속중에 있던 교회 대지를 매입완료 하였다.

그해 9월 14일 부터 ‘교회건물 수리를 위한 2차 건축헌금’의 목표액을 $40,000로 정하고 10월5일까지 모금한 결과 $67,870로 초과 도달했다. 1차 건축헌금과 비교해볼 때 1차 건축헌금은 목표액 $30,000을 초과하여 1978년 9월에 $46,228이 조성 되었었다.

제2차 건축 위원회를 구성하고 2년후인 1981년 12월 27일에 드디어 현재 주소 (1640 W. Cordova St. Los Angeles, CA)로 이사 하면서 세입자 신세를 벗어나 최초로 자체 건물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남신도회 창립

해람장로 교회 ‘남전도회’ 는 1979년 12월 2일에 창립총회를 열고 초대 회장으로 정용진 집사를 선출했다. 1980년 4월20일에는 평신도 교양지 ‘종’지(편집인:정용진)를 창간 하여 1993년 1월 31일당시 7호까지 발간했다. 그간 국내외 선교사업은 물론 구제 사업, 교회 내 화단 조성 및 조명 시설, 어린이 놀이터 시설, 농구 코트를 시설 하였고, 93년도에는 새로 구입한 건물을 친교실로 개조하는 일에 회원들이 적극 참여하여 대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쳤으며, 경제적으로도 교회에 많은 보탬이 되었다.

1대회장 정용진, 2대회장 백형설, 3대회장 신기효, 4대회장 이덕유, 5대회장 이진수, 6대회장 김세진, 7대회장 조성철, 8대회장 이명우, 9대회장 정압섭, 10대회장 김인성, 11대회장 박노철, 12대회장 송상하, 13대회장 신효우, 14대회장 윤응진

1995년 1월 부터는 명칭을 ‘남전도회’에서 ‘남신도회’로 변경 하였다.

연표

  • 1975년 1월 5일 목사 백리언 교인 31명으로 751 Crenshaw Bl., LA, CA에 있는 헝가리 개혁교회에서 해람장로교회 창립예배를 드리다
  • 1975년 4월 9일 당회장 백리언 목사와 이대수 문영조 방미철 김종근 4 장로로 첫 당회 구성
  • 1975년 5월 25일 백리언 창립목사께서 교통사고로 장기간 입원하다
  • 1976년 3월 7일 이창식 목사 부임하다
  • 1977년 1월 20일 850 S. Bonnie Brea St. LA, CA의 천주교 평신도 회관으로 이전하다
  • 1978년 9월 24일 이창식 목사 위임과 백학구 장로, 문병옥 권사 임직예배
  • 1979년 6월 19일 박명필 전도사 부임하다
  • 1979년 7월 8일 2507 Century Bl., LA, CA의 Faith Presbyterian Church로 이전하다

부연 설명

  1. 자료 사진에 따르면 조수경 목사 부임 당시 3대목사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위임 목사의 의미를 잘 몰랐던 데서 온 착오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