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종파사건

최근 편집: 2022년 12월 27일 (화) 08:56

개요

1956년 8월 김일성이 정적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1인 독재체제를 수립하게 된 아주 결정적인 사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민주주의도 아니고 인민을 위하지도 않으며 공화국은 더더욱 아닌 나라가 된 계기다.

배경

1950년대 당시 북한은 명목상으로는 김일성을 지도자로 내세우긴 했어도 지금과 같은 1인 독재체제가 아닌 여러 세력들이 권력을 나누어 가지는 과두정 내지는 연립정부에 가까웠다.

당시 북한내 주요세력은 다음과 같다.

  • 만주파(갑산파)

과거 만주에서 김일성과 함께 항일빨치산 운동을 했던 그룹.

  • 연안파

김두봉, 무정을 위시해 주로 국공내전중일전쟁에 참전하고 해방이후 북한 국내에 들어온 그룹.

  • 소련파

박창옥, 허가이 등 소련을 뒷배경으로 하는 그룹.

  • 남로당파

박헌영 등 주로 일제시대 국내나 한국전쟁 이전에 남쪽에서 공산당 활동을 했던 그룹.

이렇게 4개 세력이 소련 군정 하에서 조선로동당이라는 이름 하에 모인 것이 당시 북한이었던 것이다. 전쟁 당시까지만 해도 균형을 이루던 세력이 전쟁 이후 서로 권력을 노리는 과정에서 대대적인 숙청이 벌어졌는데 이것이 바로 8월 종파사건이다.

물론 전쟁 중에 이미 박헌영과 무정이 숙청되는 등 이들의 사이가 좋았던 것은 아니었으며 1956년에 가면 이미 남로당파의 경우 거의 이름만 남아 있는 상태가 된다.

전개

전쟁 이후 북한에서는 전후 복구방향을 놓고 갈등을 빚게 된다. 소련파와 연안파는 당장에 인민이 먹을 수 있도록 경공업 위주의 발전전략을 주장한 반면, 김일성과 갑산파는 소련과 같은 중공업 발전정책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러한 계파 분쟁은 동시기 소련에서 일어난 스탈린과 개인숭배 비판 움직임으로 인해 김일성 영도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이어졌고, 당시 사이가 좋지 않던 연안파와 소련파는 김일성이 동유럽 순방을 위해 북한을 비운 사이 김일성 타도를 명분으로 손을 잡게 된다. 특히 소련은 소련대사관을 통해 소련파와 접촉하면서 반김일성 운동을 부추기기도 했다. 이러한 움직임을 포착한 김일성은 급거 귀국하게 되고 반격을 준비하게 된다.

1956년 8월 30일 당 중앙위원회에서 서휘와 윤공흠 등을 앞세운 반김세력은 김일성에 대한 비판을 시도하였으나, 오히려 김일성 지지자들의 조직적인 반격으로 궁지에 몰리게 된다. 그리고 서휘와 윤공흠은 회의장을 빠져나와 그 길로 중국으로 망명하였고, 이어진 오후회의에서 반김일성 세력들은 직위박탈과 출당 조치 등 숙청과 함께 김일성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평가

북한에서 일어난 처음이자 마지막 김일성에 대한 도전이었다. 김일성은 8월 종파사건 이후 반대파들에 대한 숙청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였으며, 지금까지도 그것이 이어 내려져 오고 있다.

이를 통해 북한은 안 그래도 정통 마르크스주의와는 거리가 있는 국가자본주의(스탈린주의)로 출발한 것이 더더욱 막장화되어 더 이상 마르크스주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전근대적 봉건 왕국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1972년에 사회주의 헌법을 제정하면서 공식적으로 주체사상이라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사이비 종교를 지도이념으로 채택하여 사실상 김일성을 교주로 하는 사이비 종교의 신앙 공동체가 되어 버렸다. 즉 북한을 지금과 같은 도무지 사람이 살 수가 없는 막장 쓰레기 왕국으로 만들어 버린 원흉이 바로 8월 종파 사건이다.

만약 김일성이 이러한 권력투쟁에서 패배하여 해외로 망명하거나 극단적인 경우 통돼지 바비큐가 되거나 끔살을 당했더라면, 북한은 동유럽이나 중국과 같이 집단지도체제를 걷다가 소련 붕괴와 같이 1989년도에 공산정권 자체가 붕괴되어 민주화가 되었거나, 통일이 되었거나, 최소한 중국이나 베트남과 같이 공산당 1당 독재 정치 체제는 유지하되 개혁개방을 통해 자본주의를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즉 현재와 같은 사람이 전혀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사이비 종교 신앙촌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담으로 장성택이 숙청될 때에도 '종파분자'라는 혐의가 붙었으며, 8월 종파사건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