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제의 역사. 가부장제에는 수렵채집사회 혼인과 함께 생겨났다는 설, 대한민국에서 고려 말에 들어와 일제강점기를 거쳐 강화 되었다는 설 등이 있다.

1 수렵채집사회

혼인형태가 수렵채집물의 분배방식상 남여간의 차이를 낳아 불평등관계의 기초를 제공하기 전 수렵채집사회에서는 여성도 생산과 재생산에 핵심적인 기능을 했고, 경제적 기여는 전체 식량의 60%~80%를 차지했다.[1]:11 여성의 역할은 인류 사회의 문화 발달에 남성보다 더 중요한 기능을 했을 것이라는 추정조차 내려지기도 한다.[1]:11 모계사회

그러나 수렵채집사회에서의 혼인은 다음과 같은 남녀간의 비대칭성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지적받고 있다.[1]:11

  • 혼인으로 남성은 부인의 채집물을 확보함으로써 식량을 구걸할 필요가 없어졌다.
  • 혼인한 남성은 공공집회에서 발언권을 갖게 되며 여자에 자신의 사회관계망을 수렴할 수 있게 된다.
  • 여성의 남성의 주 생산물인 고기에 대한 권리는 결혼에 의하여 증가하지 않는다.[주 1]

이러한 사회는 남성들간의 평등성이 지켜지나 그 기반은 여성이다.[1]:11 즉 남성은 부인을 얻음으로써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것이다.[1]:11

2 한국의 가부장제

가부장제가 언제부터 한국사회에 정착하였는지는 다양한 이견이 있다. 그 중 하나는 고려성리학이 들어오면서 함께 들여온 「주자가례[주 2]에 따라 가부장적 유교철학이 사대부 사이에 확립되고 양반가를 중심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이후 대표적으로 변화한 사회모습 중 하나가 혼인풍습이다. 고구려로부터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일반적 혼인 풍습은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으로 결혼 후 신랑이 신부의 집에 머물러 지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던 것이 중국의 혼례법인 친영제도(親營製度), 즉 신부가 신랑의 집으로 시집을 오는 방식으로 변화하게 된다. 또한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성리학적 명분론을 중시하는 사림세력의 성장과 함께 부계위주의 가족구성과 장자(長子)의 우대, 부계를 위주로 한 족보 작성 및 제사제도 등 오늘 날 가부장제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관습들이 대부분 정착하게 되었다.[1]

한국 가부장제는 일제강점기에 더욱 심화되어 여성의 개화와 평등의 요구는 지연되고 억압당한다. 조선총독부에 의해 호주권이 더욱 강화되고, 창씨개명으로 여성이 부성 대신 남편의 성을 따르게 된다. 천황제 군국주의를 강화하기 위해, 일제는 전통적 가부장제를 존속시켰고, 여성의 성을 혼혈의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또한 일부 여성들은 일본군 '위안부'로 재상산기능을 상실하기도 하였다. 군사 정권이 성립되면서 한국 고유의 전통과 이른바 미풍양속을 계승하고 강화하는 정책을 실시하였고, 혈통 중심의 가족주의가 강화된 형태로 온존하였다. 이는 여성에게 전통적 현모양처 상을 강요했다.[2]

3 기타

  • 엥겔스는 여성의 종속을 사유재산제와 계급의 발생과 연결시켜 설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이론에서 전제된 원시 공동체의 만민 평등론은 원시사회에서도 남녀가 평등하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연구보고서들에 의하여 그 타당성이 상실되었다.[1]:11

4 부연 설명

  1. 이는 대규모 사냥의 수확물은 공식적 분배규칙에 따라 나누어짐으로써 사냥꾼 가족에게 특별히 돌아올 몫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2. 「주자가례」란 중국 남송 시대 주희(朱熹, 1130~1200)의 저서로 가례(家禮), 즉 가정의 예법을 적고 있다.

5 출처

  1. 1.0 1.1 1.2 1.3 1.4 1.5 1.6 조옥라(趙玉羅), 장상, 이효재, 이문웅 (1986). 가부장제에 관한 이론적 고찰. 한국여성학, 2, 9-49.
  2. 이효재. (1996). 한국 가부장제와 여성. 여성과 사회, (7), 160-1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