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 뒤 샤틀레

최근 편집: 2022년 12월 24일 (토) 17:43
by Marianne Loir. 프랑스 보르도 미술관이 소장중인 에밀리의 초상화.[1]

개요

가브리엘 에밀리 르토넬리에 드 브르퇴유(프랑스어: Gabrielle Émilie Le Tonnelier de Breteuil, Emilie du Chatelet, 1706년 12월 17일 ~ 1749년 9월 10일)는 최초의 근대 여성 과학자이다. 통칭 샤틀레 부인.

“나는 고유한 인간이며 내가 누구이고 무엇을 하건 그 모든 것은 오직 나의 책임이다.”[2]

생애

가족관계

1706년 12월 17일 파리에서 여섯 자녀 가운데 유일한 딸로 태어났다. 두 형제는 아주 어린 나이에 사망했고,[3] 남은 네 자녀 중에는 에밀리가 막내였다.

르네 알렉산드레(프랑스어: René-Alexandre, 1698년생), 찰스 어거스트(프랑스어: Charles-August, 1701년생), 엘리자베스-테오도르(프랑스어: Elisabeth-Théodore, 1710년생)의 세 명이 살아남았다. 큰오빠인 르네 알렉산드르는 1720년에 사망했고, 둘째 오빠인 샤를-아우구스트는 1731년에 사망하였다. 그러나 동생인 엘리자베트-테오도르는 노년까지 살며 대수도원장을 거쳐 주교까지 되었다.

사생아인 이복언니 미셀의 어머니는 안네 벨린자니(프랑스어: Anne Bellinzani)였으며, 미셸은 천문학에 관심이 많았고 파리의 중요한 관료와 결혼했다.[4]

그의 아버지인 루이 니콜라스(프랑스어: Luis Nicolas le Tonnelier de Breteuil)는 비왕족 대지주 귀족(lesser nobility)로, 에밀리가 태어났을 때 루이 14세 밑에서 공식 비서이자 외교 사절 소개관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그는 목요일마다 사교 모임을 열어 저명한 문학가과학자들을 초대했다. 에밀리의 어머니는 가브리엘 안네 드 프롤레(프랑스어: Gabrielle Anne de Froullay, Baronne de Breteuil)였다.[5]

유년기

그의 아버지인 루이 니콜라스는 교육열이 매우 높은 사람이었다. 일찍이 딸의 재능을 알아보았던 아버지의 후원으로 에밀리는 남자 형제들과 동등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당대 여성들은 받을 수 없었던 수학, 문학, 과학 교육을 받았다. 또한 스페인어, 영어, 이태리어, 라틴어, 그리스어, 독일어를 배웠다.

그는 곧 가정교사들이 가르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고, 베르사유에서는 그와 지적인 대화를 나눌 만한 사람이 없었다. 어머니 가브리엘 안느는 딸이 상류층 여성이 지녀야 할 태도를 갖추길 원했지만 그러기에 에밀리는 과학, 철학, 신학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다.

아버지는 에밀리에게 펜싱과 승마도 가르쳤다. 펜싱 실력이 좋아 궁정에서 유명한 왕실 근위대장인 자크 드 브룅이라는 사람에게 결투를 신청했고, 모두가 보는 광장에서 벌인 결투는 어머니를 놀라게 했다.

뒤 샤틀레의 초상화

결혼과 연애

1725년, 18살의 나이에 당시 머스킷 총병이었던 샤틀레 후작이자 로몽 백작인 플로랑 클로드(프랑스어: Florent-Claude)과 결혼하여 아이 셋을 낳았다. 플로랑 클로드는 부르고뉴 지방의 세뮈르의 통치자였다. 남편은 주둔 병사를 감독하느라 바빴는데, 에밀리가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지만 에밀리 뒤 샤틀레는 결혼과 출산 이후로는 과학의 세계에 진입할 수 없었다. 남자였다면 대학에서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을 테고[주 1], 과학아카데미의 회원이 될 수도 있었으나 여성인 에밀리는 그럴 수 없었다.

에밀리는 루이 14세의 대자이자 대단한 바람둥이로 이름 높았던 리슐리외 공작과 연애하게 된다. 이후에는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피에르루이 모페르튀를 만나 고등수학을 함께 공부하면서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에밀리는 모페르튀에게 수학적 측면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나 나중에 모페르튀는 에밀리의 저서인 《물리학 입문》을 수학적 측면에서 비판한다. 후에 에밀리는 독일의 수학자 자무엘 쾨니히(Samuel König)에게 수학을 배우면서 더욱 심도 있게 공부하게 된다.

스물여덟 살 때 볼테르를 처음 알게 된 후 약 10여 년간 볼테르와 연인 관계였으며, 죽을 때까지 특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에밀리 뒤 샤틀레는 볼테르와 다양한 연구와 업적을 남겼다.

사망

볼테르와 관계가 소원해진 시기, 에밀리 역시 젊은 시인 세인트 램버트와 만남을 갖다가 그의 아이를 임신하였다.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걸 짐작하고[주 2] 출산 예정일인 9월에 맞추어 일생의 연구를 마감해야 했다. 매일 3~4시간씩만 수면을 취하고 모든 시간을 뉴턴의 프린키피아 연구에 바쳤다. 1749년 9월 1일 샤틀레는 왕립 도서관 감독에게 뉴턴에 대해 연구해온 주요 해석들의 원고를 동봉한 서류 꾸러미를 보냈다. 3일 뒤 진통이 시작되었고, 아이를 출산하고 감염으로 인해 일주일 뒤 사망했다.

연구

존 로크의 철학 비판

에밀리 뒤 샤틀레는 그의 글에서 존 로크의 철학을 비판하며, 경험을 통한 지식 검증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업적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양적 개념의 mv^2 확립

에밀리 뒤 샤틀레는 운동량과 구별되는 총에너지 보존의 가설을 확립하는 업적을 세웠다.

18세기 초, 힘과 운동량의 개념은 오래 전부터 받아들여지고 있던 상태였다. 하지만 당시 서로 다른 계 사이를 이동 가능한 에너지의 개념은 제시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개념이었다.
현재는 시스템 안의 전체 물리적 운동량은 보존되며 마찰력으로 손실되는 것은 없다는 것이 받아들여져 있다. 에미 뇌터는 후에 이것이 일반화된 좌표에서 초기 상태가 대칭인 모든 문제에 대해 사실임을 증명했다.[주 3] 기계적 에너지, 운동 에너지 및 잠재력은 다른 형태로 손실될 수 있지만, 총 에너지는 시간에 따라 보존된다.

운동하는 물체가 갖는 힘이란 현대에 운동 에너지의 개념에 해당하는 양인데[주 4], 뉴턴은 이것을 단순히 mv로 정의를 내렸다. 이에 대해 독일의 자연철학자인 라이프니츠는 뉴턴의 관점에 이의를 제기하고 그 양은 mv^2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단순한 정의의 문제를 넘어서 뉴턴의 신학과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이 대비되는 지점이다.

뉴턴은 mv에서 신이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가 드러난다고 보았다. 뉴턴의 관점에서, 정반대 방향으로 같은 속력으로 움직이던 물체가 충돌을 일으키면 그 물체가 가지고 있던 모든 에너지는 완전히 소멸된다. 즉 그 에너지를 우리의 우주로부터 다른 어딘가로 끌어낸 것이다. 이런 유형의 사건은 우리 주변에 늘 일어나기 때문에, 뉴턴의 시각에서는 외부에서 끊임없이 에너지가 유입되는 것처럼 보인다. 뉴턴은 이를 엄청나게 복잡한 기하학과 미적분으로 증명했다. 그는 우주가 끊임없이 움직인다는 사실이야말로, 기운을 불어넣는 신이 우리를 보살피고 있다는 증거라고 보았다.

반면, 라이프니츠는 충돌하는 두 물체의 에너지는 상쇄된 것이 아니라 서로 더해진다고 생각했다. 그 에너지는 충돌할 때 일어나는 다른 '사건'들의 원동력이 된다. 그렇기에 라이프니츠의 관점에서 세상은 신이 지속적으로 유입시키는 없이 스스로 움직일 수 있다. 따라서 라이프니츠의 신은 영원한 움직임을 만들 만큼 전지전능하다. 라이프니츠의 이 해석은 객관적인 해설이 너무나 모호하여 수십 년 동안 인기가 시들해져 가고 있었다.

에밀리는 이 같은 해석에 매혹되었고, 이 주장을 객관적으로 입증하기 위해 동료 학자들과 함께 구체적이고 실험적인 증거들을 찾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에밀리 뒤 샤틀레는 라이프니츠가 내놓은 반론을 연구하며 뉴턴식 접근법의 문제점을 발견했다. 그와 동료들은 네덜란드 출신 과학자 스흐라베잔데의 실험에서 결정적인 증거를 발견했다.

네덜란드 출신 과학자 스흐라베잔데는 부드러운 진흙 판에 무게 추를 떨어뜨리는 실험을 하고 있었다. 만약 mv가 맞는다면, 처음에 비해 2배 빠르게 떨어지는 무게 추는 2배 깊이 박힐 것이다. 3배 빠르게 떨어진다면 3배 깊이 박힐 것이다. 하지만 스흐라베잔데가 발견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놋쇠 공을 전보다 2배 빨리 내려치면, 진흙 속에 4배 깊이 박혔다. 3배 빠르게 내려치면 진흙 속에 9배 깊이 박혔다. 그것은 E=mv^2의 원리로 생각하면 예상할 수 있는 수치였다. 2의 제곱은 4이고, 3의 제곱은 9이기 때문이다.

스흐라베잔데는 확실한 실험 결과를 보여주었지만 그것을 종합적으로 설명해내는 이론이 부족했고, 라이프니츠는 탁월한 이론가였지만 상당 부분 추론을 통해 내놓은 결과였다. 샤틀레는 라이프니츠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이에 더해, 스흐라베잔데의 실험 결과를 종합적으로 설명해내며 라이프니츠에 대한 이론을 입증하는 매우 설득력 있는 객관적 증거로 제시했다.

이 당시 대부분의 영어권 과학자들은 뉴턴의 이론을 지지했고, 독일어권 과학자들은 라이프니츠의 이론을 맹신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에밀리의 연구 발표로 이 논쟁은 말끔히 해결되었다. 이로써 에밀리 뒤 샤틀레는 역사상 최초로 이와 같은 에너지의 개념을 해명하고 자신의 경험적 연구를 바탕으로 질량과 속도에 대한 관계를 정량화한 인물이 되었다.

불의 성질에 관한 연구

뉴턴의 프린키피아 번역 및 주석

라틴어로 쓰여진 아이작 뉴턴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주 5]를 연구했다. 당대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한 기하학적 기술과 라틴어로 가득했던 이 저술을 핵심 내용을 강조하고 주석을 달아 별도 해설을 추가하는 등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번역하여 프랑스의 과학 수준을 끌어올렸다고 평가받는다.

당대의 현대 수학이었던 미적분을 토대로, 복잡한 기하학을 보다 쉽고 명료하게 재해석해 주석과 논평을 달았다. 에밀리는 뉴턴의 책을 단순히 번역하는 작업을 넘어서서 뉴턴의 저작 속에 든 핵심적인 두 가지 정리를 밝혀내고자 했다. 에밀리는 뉴턴이 중력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어떻게 지구 중심에서 바깥쪽으로 뻗어나가는지를 밝히려고 한 정리를 70번에서 75번정리[주 6][6]에서 찾았다. 뉴턴이 복잡한 기하학 양식으로 기술해놓았기 때문에 그 정리의 중요성이 눈에 띄지 않았는데, 에밀리는 그 속에 숨은 개념을 명료하게 드러냈다. 여기서 그녀는 행성이나 항성 전체가 운동할 때에 하나의 수학적 점과 같이 취급할 수 있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또 에밀리는 에너지 보존에 관한 다른 정리들을 정확하게 짚어내 현대용어로 바꾸면서 자신이 연구했던 불에 대한 실험과 연관시켜보려 시도했다. 그에 대한 답이 13번 정리에 딸려있던 40번 명제[주 7][7]에 숨어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 개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임으로써 후대 과학자들에게 길잡이 역할을 했다. 에밀리는 출산을 앞둔 8월 30일 원고를 탈고했다.

이 책은 에밀리의 사망 이후 10년 뒤에 출간되었으며 이로서 뉴턴의 과학철학이 더 널리 알려졌다. 오늘날에도 프랑스에서 쓰이는 《프린키피아》의 표준 번역서이다. 에밀리가 이 책을 훌륭히 번역하였기 때문에 프랑스는 영국보다 100년 앞서 과학이 발달할 수 있었다는 시각도 있다. 왜냐하면 영국에서는 복잡한 기하학으로 가득찬 판본을 읽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프린키피아'에 대한 그의 번역과 해설은 프랑스에서 과학 혁명을 완성하고 유럽에서도 이를 수용하는 데 기여했다. [8]

후세에 끼친 영향

에밀리 뒤 샤틀레의 분석과 연구는 이후 과학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업적이 된다. 에밀리가 확립한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양적 개념의 은 19세기에 이르러 패러데이와 같은 과학자들에 의해 모든 에너지의 보존 가능성 개념을 확립시키기 위해 채택된다. 아인슈타인의 의 '제곱' 개념에 영향을 주었다. 에밀리와 볼테르가 시레이 성에서 보여주었던 전통을 타파하는 독자적인 삶의 방식에 사람들은 강한 인상을 받았다. 두 사람은 불합리한 관습과 전통에 의문을 품었고, 다음 세대 계몽주의 사상의 선조 격 역할을 했다.

출처

  1. “Émilie du Châtelet”. 《Wikipedia》. 
  2. Émilie du Châtelet, Rede vom Glück. 다음 자료도 참조할 것. Elisabeth Badinter, Emilie, Emilie. Weiblicher Lebensentwurf im 18. Jahrhundert(München, 1991).
  3. Zinsser, pp. 19, 21, 22.
  4. Zinsser, pp. 16–17; for a quite different account, see Bodanis, pp. 131–134.
  5. Detlefsen, Karen (2014년 1월 1일). Zalta, Edward N., 편집. 《Émilie du Châtelet》 Summer 2014판. 
  6. 조경철 옮김, 프린시피아 1권, p.349~357,
  7. 같은 책, p.239~241
  8. Larson, Hostetler, Edwards (2008). 《Essential Calculus Early Transcendental Functions》. U.S.A: Richard Stratton. 344쪽. ISBN 978-0-618-87918-2. 

부연 설명

  1. 로크는 부유한 귀족의 후원으로 런던의 지식인 모임에 영입될 수 있었고, 뉴턴케임브리지 대학의 비호와 격려 속에서 연구를 진행할 수 있었다.
  2. 당시에는 나이 들어 출산했을 경우 살아남을 확률은 극히 드물었다. 그 시대의 의사들은 위생에 대한 관념이 없었다.
  3. 뇌터 정리
  4. 정확히는 운동 에너지(Kinetic Energy)는 :인데 계수 은 제외하고
  5. 원제목을 줄여서 프린키피아,라고 불렀다. 1687년에 나온 세 권짜리 저작으로, 서양의 과학 혁명을 불러일으킨 책 중 하나이다.
  6. 30번 정리. 70번 명제: 만일에 구형 물체의 그 구면상의 모든 점들을 향하여, 그것들의 거리의 제곱비로 감소하는 같은 구심력이 작용한다면 그 면의 내부에 놓인 한 입자는 그것들에 의하여 전혀 끌리지 않을 것이다.
    31번 정리. 71번 명제: 이전과 같은 것을 가정하면 구면 밖에 놓인 한 입자는 구의 중심으로 향하여 그 중심서부터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으로 끌린다.
    32번 정리. 72번 명제: 만일에 구의 각 점을 향하여 그 점들로부터의 저리의 제곱비로 감소하는 같은 구심력이 작용하고, 또한 구의 밀도 및 구의 지름과 그 중심서부터 입자의 거리와의 비가 함께 주어진다면 입자가 끌리는 그 힘은 구의 반지름에 비례한다.
    33번 정리. 73번 명제: 만일에 주어진 하나의 구의 각점으로 향하여 그 점들로부터의 거리의 제곱비로 감소하는 같은 구심력이 작용되면 그 구의 내부에 놓여진 입자는 중심서부터의 거리에 비례하는 힘으로 끌릴 것이다.
    34번 정리. 74번 명제: 이와 같은 일들이 가정된다고 하면 구의 밖에 자리 잡은 한 입자는 중심서부터의 그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으로써 끌릴 것이다.
    35번 정리. 75번 명제: 만일에 어떤 주어진 하나의 구의 각 점을 향하여 그 점으로부터의 거리의 제곱비로 감소하는 같은 구심력이 작용된다면 또하나의 닮은 구는 그것에 의하여 중심(간)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으로 끌릴 것이다.
  7. 만일에 어떤 구심력이 작용되는 물체가 어떤 방식으로 운동하며, 딴 한 물체가 한 직선상을 상승 또는 하강하며, 또한 그 속도들이 고도가 같은 경우에는 서로 같다고 하면, 그 속도들은, 다른 모든 같은 고도에서도 마찬가지로 서로가 같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