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지하련)

최근 편집: 2018년 5월 17일 (목) 10:28

<가을>은 1941년 11월 <조광>에 발표되었다. 앞서 <결별>이 여성 화자의 시선을 통해 결혼제도의 불합리함과 그 안에서 여성 개인이 느끼는 불안과 고독을 그렸다면 <가을>은 남성 화자의 시선을 통해 여성을 구속하는 각종 프레임을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을 시도한다. 화자 석재는 아내와 사별한 뒤 홀로 살아가던 중, 아내의 친구였던 정예의 편지를 받는다. 석재는 이 사실이 그다지 달갑지 않다. 이는 정예가 이혼 경력에 더해 수많은 연애 관계로 유명한 ‘이상한 여자’이기 때문이다. 또 정예는 아내가 살아있던 시절 느닷없이 석재에게 편지를 보내 한 차례 만남을 요구한 일로 그를 곤란케 한 전적이 있다. 이러한 정예를 경계했던 것은 아내보다는 오히려 석재로, 아내는 친구 정예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이고 죽기 전에도 정예를 찾았었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 석재는 집까지 찾아온 정예를 만나게 된다. 오랜만의 만남에서 석재는 정예를 향해 환멸, 당황, 놀라움 등이 섞인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 헤어지기 전, 정예는 사랑과 삶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으면서 석재에게 그간의 솔직한 마음을 고백한다. 석재는 정예를 바라보던 자신의 틀에 박힌 시선을 깨닫고, 정예를 이해하게 된다.

이혼 경력이 있는 데다가 연애 관계가 끊이지 않는 정예는 ‘이상한 여자’로 일컬어진다. 남성 화자인 석재의 시선을 빌려 소설은 정예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을 직접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석재는 정예를 불쾌하고 언짢게 여긴다. 이는 정예가 그에게 표현했던 관심이 불편했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석재에게 있어 정예의 ‘행실’이 문제시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선은 소설 후반부에 전복된다. 이 전복이 표면상 주인공인 석재에 의해서가 아니라, 석재가 바라보던 대상인 정예를 통해 일어난다는 것은 작품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지하련은 ‘이상한 여자’ 정예의 목소리에 집중한다. 정예는 자신의 욕망을 숨기지 않고, 이를 솔직하게 표현할 줄 알며, 자신을 감추는 것이 도리어 자신을 해치는 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정예가 석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은 순간, 이상한 것은 정예가 아닌 그를 둘러싼 시선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정예는 제 말대로 흉악할지는 모른다. 그러나 거지는 아니다. 허다한 여자가 한껏 비굴함으로 겨우 흉악한 것을 면하는 거라면 여자란 영원이 아름답지 말란 법인가?)

이와 같은 마지막 석재의 생각은 여성을 비굴하게 만드는 것, 아름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을 품게 한다. 정예는 흉악하고 아름답게, 자신에게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가을>에서 또 한 명 주목해야 할 인물이 있다면 작중 현재 시점에서 이미 세상을 떠난 석재의 아내일 것이다. 아내는 정예와 절친한 친구였지만 여러모로 정예와 대비되는 인물이다. 천진한 구석은 없어 보이는 정예와 달리 아내는 순수하고 천진한 사람으로, 남편과 친구에 대한 사랑을 아끼지 않는 인물이다. 석재의 아내에게도 자신과 달리 공부를 한 친구 정예를 부러워하는 모습을 보이며 마음 속의 욕망을 드러내는 장면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인물을 더욱 인상적이게 하는 것은 정예에게 보낸 깊은 우정일 것이다.

석재의 아내는 자신과 정반대의 친구인 정예를 무한히 신뢰한다. 석재는 정예에게서 온 편지를 아내에게 보여줬음에도, 하나의 의심도 없이 이유가 있을 테니 가보라는 말을 하는 아내가 너무 어리다는 생각을 한다. 죽기 직전에도 연락 없던 정예의 소식을 궁금해하던 아내에게 석재는 툴툴거린다. 아내는 그런 석재에게 ‘그래도 그 애 착한 구석이 있다, 다음에 만나면 다정히 하라’는 부탁을 남긴다. 소설의 마지막까지 읽었을 때 이는 특히 인상적인 장면으로 남았는데, 석재와 아내의 차이는 정예를 이해하지 못하는 인물과 이해하는 인물의 차이로 볼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석재는 정예를 신뢰하는 아내를 어리게 본다. 그러나 그것은 아내가 정예를 깊이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인식했건 인식하지 못했건 간에 그들의 우정을 소홀히 여겼기 때문에 나온 사고로 보인다. 여성의 우정이 과소평가 되는 것은 흔한 일이다.

남성 화자의 시점을 취한 서사가 여성이 처한 문제에 질문을 던질 수 있는가? <가을>은 이 질문에 대한 답안이 되는 소설이다. 동시에 매우 훌륭한 답안이기도 하다. <가을>은 작중 등장하는 여성 인물을 한 명도 허투루 다루지 않는다. 정예와 아내의 관계를 다루면서 여성들 간의 깊이 있는 우정을 그리기도 한다. 다음에 다룰 <산길>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이어져, 여성의 우정이 작품 전면에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