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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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間島)는 한반도 북쪽의 압록강두만강에 마주하고 있는 만주의 지역이다. 고조선 시절부터 한민족의 조상이 활동하였으나, 발해 멸망 이후로는 다른 민족들이 활동지역이 되었으며, 현재는 중국의 영토다.

역사

부여의 땅이었다가 고구려를 거쳐 발해땅이 되었다. 당시에는 한국어와 같은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주민과 후에 만주족이 되는 숙신계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발해가 망하고 백두산 폭발로 이 지역이 황폐화되면서 여진족이 거주하게 된다.

공민왕의 북벌로 공험진까지를 수복하였다가 이후 철수하였다. 세종대왕 집권기에 4군6진을 설치하여 압록강두만강 이남의 영유권을 확보하면서 명나라와의 협상을 통해 압록강과 공험진 이남을 조선의 영토로 인정 받아 그 이북의 여진족은 명나라에 복속하고 이남의 여진족은 조선에 복속하기로 결정하였다.

공민왕 시절 공험진의 위치에는 여러 이설이 있으나, 명나라가 조선이 두만강 이남의 6진 지역을 차지한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당시 지도 등으로 보아 두만강 이북에 있었다고 비정된다.[1]

후금 발흥

조선은 두만강 이북까지 영토라고 생각했으나 실제 지배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여진족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그러나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면서 간도는 한민족과의 상하 관계에서 이탈하였다.

그 이전에도 간도로 이주하는 조선인이 있었지만, 청나라의 위세에 밀려 강제로 송환을 당하게 되었다.

백두산정계비

청나라에서 간도를 봉금지역으로 선언한 뒤, 조선인이 계속해서 강을 건너 간도쪽에 정착하는 일이 벌어졌다. 간도라는 명칭이 이 때 나왔는데, 조선이 청나라의 요청에 따라 국경인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가는 것을 금지할 때 '나는 강을 건넌 것이 아니라 강 가운데 있는 섬에 다녀왔다'고 변명을 한 것에서 유래하였다.

계속해서 조선인이 월경하여 정착하자 국경을 명확히하고 이주를 막기 위해 1712년백두산 천지(天池)의 남동쪽에 조선청나라국경을 확인하는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졌다. 정계비에는 조선·의 경계를 '서위압록 동위토문'이라 하고 정계비가 분수령에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烏喇摠管 穆克登, 奉旨査邊, 至此審視,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上, 勒石爲記, 康熙 五十一年 五月十五日)

이때 분수령을 정하기 위해 조선측과 청나라 관리가 백두산에 오르기로 했는데, 이 지역을 담당하는 조선의 관리인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과 함경도 관찰사 이선부(李善溥)가 오르는 것을 막고 목극등(穆克登)이 조선의 하급관료들만을 대동한 채 임의로 수원을 정하였다.

조선은 정계비로부터 목책을 세우는 과정에서 목극등이 정한 수원이 두만강의 수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으나 청나라가 또다시 영토를 줄일 것이 우려되어 그대로 두었고, 목극등도 나중에 조선을 방문할 때 별다른 확인을 하지 않고 돌아갔다.

19세기 ~ 한일합병

1870년에 청나라에서는 간도에 조선인들이 이주한 것을 확인하였다. 이들이 흉년 때문에 월경한 것이었기에 청나라측에서는 454명의 조선인을 조선으로 그냥 돌려보냈다. 하지만 그 뒤로도 조선인의 월경은 끊이지 않았고, 조선은 1871년부터 이주민들이 정착한 땅에 대한 통치를 시도하였다.

이후 청나라는 러시아가 만주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것에 위기감을 느껴 봉금지를 개방하기 시작했고, 마지막으로 개방된 것이 1881년에 개방된 길림성 남부였다. 이 과정에서 청나라는 조선인들이 대규모로 간도에 정착한 것을 확인하였다. 이에 청나라에서는 정착한 조선인들을 그냥 두되 청나라로 귀화시키도록 했다.

청나라의 결정을 알게된 조선에서는 백성을 빼앗길 상황이 되자 조선인들을 모두 귀환시킬테니 1년의 유예기간을 달라고 요청하였고, 1882년에 청나라가 이를 수락하여 1883년에는 모든 조선인을 철수시키겠다고 발표했다.

철수명령을 받은 조선인들 입장에서는 비록 불법이었지만 자신들이 오랫동안 일구어낸 땅에서 쫓겨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자 그들은 자체적으로 국경을 조사하여, 국경의 기준이 되는 토문강이 두만강의 수원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내고 이를 근거로 자신들의 땅이 조선땅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1883년에 조선은 '월강금지령'을 폐지하고 서북경략사로 어윤중을 임명하였으며, 어윤중은 부하를 시켜 국경조사를 한 뒤 토문강이 두만강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에 조선은 간도가 자신의 영토임을 주장했다.

이후 청나라는 국경이 애매한 두만강 상류 일부지역을 제외한 부분에서는 두만강 북쪽을 청나라 영토로 선포하고 관리하기 시작하였다. 청나라가 관리하기 시작한 영토에 있던 조선인들은 쫓겨나거나 한 집에서 한 명씩 청나라에 귀화하여 변발을 해야했다.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의 입김이 강했던 터라 조선에서는 별다른 조치를 할 수 없었다.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한 이후에 조선은 간도에 행정권 확보를 다시 시도하였다.

1885년에 감계회담이 이루어졌는데, 조선측에서는 '토문강 흐름이 어떤지 살펴서 국경을 명확히 하자'고 주장하였고, 청나라측에서는 '토문강이 두만강 수원이 아니라면 다른 수원을 찾아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실제로 국경 조사에 나섰는데, 여기에서도 조선은 정계비부터 확인하자고 주장하였고 청나라는 두만강을 거슬러 올라가자고 주장하여, 결국 두 무리로 나누어 각각 조사한 뒤 다시 모여 정식회담을 시작하였다.

회담에서 청나라는 '토문강이 송화강으로 흘러가니 토문강은 경계가 아니다'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정계비에서 토문강을 국경으로 하고 있으므로 토문강을 기준으로 삼아야한다고 주장하였다. 토문강을 기준으로 삼으면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은 만주 한복판으로 흘러가는 송화강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회담은 결렬되었다.

이후에도 분쟁이 계속되어 1887년에 2차 감계회담이 이루어졌다. 이 때는 조선측의 주장이 현실적으로 바뀌어, 청나라가 제기한 두만강의 최남단 수원인 홍단수를 국경으로 삼자는 주장에 대해, 두만강의 최북단 수원인 홍토수를 경계로 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회담이 난항에 접어들자 청나라에서는 홍토수의 지류인 석을수를 경계로 삼자고 양보하였으나 조선이 거부하였고, 결국 회담은 다시 결렬되었다. 조선은 1888년에 이중하가 강압에 의해 토문강을 경계로 주장한 것으로 보고 이것은 무효라고 통보하였다.

그리고 1898년에 조사단을 파견하였고 그 조사단은 '조선과 청의 국경은 토문강-송화강-흑룡강이며 그 중에서 1천여 리에 해당되는 땅을 러시아에 넘긴 것은 불법이다.'라고 보고하였다.

의화단 사건 이후로는 본격적으로 간도지배를 시도하여, 1902년에 조선은 이범윤을 간도에 파견하여 인구를 조사하고 1903년에는 그를 북변간도관리로 임명했다. 당연히 청나라에서 항의하였고 외교분쟁이 이어졌지만,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충돌을 예방하기 위해 협상이 일시중단되었다.

을사조약으로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행사하게 되자 일본은 초기에는 간도를 조선의 영토로 보아, 통감부 파출소를 설치해 간도를 조선에 부속된 지역으로서 통치하려고 하였으나, 이후 외국이 간도를 포함한 조선을 일본이 지배하는 것에 반대하게 된다.

일본은 만주철도에 대한 권리를 위해 만주철도에 관련된 이권을 얻는 방향을 만주 6안건안을을 제안하였고,[2] 최종적으로 길림-회령간 철도에 대한 이권을 간도협약에서, 나머지 5개 이권을 만주5안건 협약에서 확보하였다. 이 과정에서 국경의 기준은 청나라가 타협안으로 제안하였던 석을수가 되었다.

현대

유사역사학을 주장하는 역사학자 이덕일이 간도는 조선땅이라며 '간도가 조선땅이라고 주장하지 않으면 비국민'이라며 간도가 원래부터 조선의 영토였던 것으로 기술하지만 사실과 다르다. [3][4][5]

몇몇 단체에서 100년 안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면 간도 영유권이 완전히 넘어간다는 떡밥을 뿌리곤 하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애초에 100년이라는 주장이 나온 이유 자체도 근거가 없다.

간도 분쟁이 '청나라가 봉금정책으로 출입을 금한 사이에 조선인들이 불법월경하여 발생한 국경분쟁'이므로 간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어떠한 명분도 없다. 비엔나 협약 운운하는 소리도 있지만, 비엔나 협약은 20세기에나 나온 것이므로 소급적용하는 것이 우스운 짓이다.

  1. 단, 공험진의 실제 위치는 학설에 따라 분분하다.
  2. [1]
  3. [2]
  4. [3]
  5.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