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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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한 한의사로, 강우규의 남대문역 투탄 사건은 3・1운동 이후 개인이 단독으로 감행한 최초의 의열 투쟁이었다. 2006년 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가 출범하여 『남대문역두의 투혼 의사 강우규』를 출간하였고, 동상 건립 기금 모금 운동을 비롯해 각종 기념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강우규(姜宇奎)
출생1855년 7월 14일(1855-07-14)
평안남도 덕천군 무릉면 제남리
사망1920년 11월 29일 ()
서대문 형무소
사인사형
매장지현충원
본관진주
경력남대문역 투탄의거
직업독립운동가
다른이름자 찬구, 호 왈우, 이명 영일 ・ 강녕
정보 수정

생애

25년간 함남 홍원군에서 한약방과 잡화상을 경영하면서 많은 재산을 모았다. 1908년 이동휘신민회 활동의 하나로 함경도 지역을 순회하며 기독교 선교 활동과 함께 학교 설립을 통한 구국 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이동휘를 만나 감화를 받고 기독교에 입문하고 독립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곧바로 장남 중건 부부 등 가족들을 먼저 러시아로 이주시키고, 자신은 1911년 봄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17년 봄 만주 지린성 라오허현 신흥동에 광동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취임하여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외에도 30년간 홍원에 영명학교와 교회, 러시아 이만에 협성학교와 조선민회, 만주 라오허현 신흥동에 조선민회, 블라디보스토크에 교회와 노인단, ‘밋가루시카’에 학교 6개, 교회 3개, 민회 2개를 설립하여 전도와 민족 교육에 힘썼다.

1919년 3월경 국내의 만세 시위 소식을 접하자, 신흥동 동포 400~500명을 모아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4~5월경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결성된 대한국민노인동맹단에 가입하고 라오허현 지부 책임자가 되었다.

6월 말 2대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곧 경질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신임 총독을 처단하기로 결심하고 자신이 살던 신흥동 근처 청룡에서 러시아인에게 영국제 수류탄 1개를 구입하였다. 문제는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폭탄을 국내로 반입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방법은 폭탄을 부녀자의 월경대처럼 바짓가랑이에 차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7월 5일 3・1운동의 책임을 지고 하세가와가 도쿄로 물러나고, 8월 12일 일본 정부는 예비역 해군대장 사이토 마코토를 신임 총독으로 임명한다고 발표하였다. 9월 2일 아침, 총독을 태운 특별열차는 오후 5시 정각에 서울역 플랫폼에 들어섰다. 사이토 총독은 열차에서 내려 1,000여 명의 환영객이 운집한 곳으로 가 악수를 하고는 남대문역 광장으로 향하였다. 강우규는 총독이 마차에 오르자, 수류탄을 힘껏 던졌다. 폭탄은 마차에서 약 12~13m 떨어진 곳에서 폭발하였다. 폭발과 함께 사방으로 튄 파편 몇 조각은 총독의 혁대에 박혔으나 총독은 무사하였다. 다만, 현장에 있던 신문기자와 경찰, 철도 및 차량 관계자 3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중 오사카 아사히신문의 경성특파원 다치바나와 경기도 순사 스에히로 등 2명은 며칠 뒤 사망하였다.

거사를 일으킨 지 16일 만인 9월 17일 누하동에서 한국인 경찰 김태석의 불심검문으로 붙잡히고 말았다. 1920년 2월 25일 경성지방법원은 강우규에게 사형, 거사를 도운 최자남에게 징역 3년 형을 허형에게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하였다. 강우규는 판결 후 곧바로 항소하였다. 이유는 자신의 사형을 면하기 위함이 아니라 거사를 도와준 동지 최자남을 변호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4월 26일 경성복심법원에 이어 5월 27일 고등법원(高等法院, 오늘날 대법원에 해당)에서도 상고 기각으로 사형이 확정되었다. 3심이 진행되는 동안,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았다. 따라서, 상고취지서도 직접 작성하였다. 상고이유서에 보면 총독을 처단하고자 한 것은 정의와 인도에 입각하여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상고 기각 후 6개월 뒤인 11월 26일 경성복심법원은 서대문형무소로 사형 집행 명령서를 발송하였다. 사형 일자는 11월 29일로 오전 10시 30분 오카모토 검사가 입회한 가운데 사형을 집행하였다. 일제는 사형 집행 당일, 장남 중건을 경찰서 유치장에 잡아 가두었다가 사형 집행이 끝난 후에 풀어주었다. 그러고는 오후 3시 반경 중건에게 아버지의 시신을 인도하였다.

상고심에서 강우규의 사형 결정이 확정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진주강씨종친회는 문중 차원에서 시신을 수습하여 선산에 안장하기로 결정하는 한편, 비를 세워 공적을 새기기로 하였다. 그러나 조선인의 민심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한 일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빈소도, 조문도, 장례 행렬도, 조객도 없이 장남 중건과 몇몇 지인만이 유해를 운구하여 서대문형무소 공동묘지였던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신사리(현 서울 은평구 신사동)에 가매장하였다. 1956년 10월 유지들의 발의로 수유리 산109번지로 묘지를 이장하였다가 1967년 6월에야 비로소 현충원에 안장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