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주룡은 일제의 차별에 저항한 조선의 노동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로, 여성 노동운동가 제1호로 기록되고 있다.
생애
1901년 평안북도 강계 출생으로 부친의 사업 실패로 14살 때 서간도로 건너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20살 되던 해 인근 통화현에 사는 5살 연하의 최현빈과 결혼하였고, 남편과 함께 1921년 만주지역 대한독립군에 가담하였다.
남편이 죽은 뒤 1925년 고국으로 돌아와 처음에는 황해도 사리원에서 일하다가 1926년 평양으로 이주하면서 평양 선교리의 평원 고무공장 노동자가 되었다. 1930년 8월 평양 고무공업조합이 일방적으로 노동자들에게 임금 삭감을 통고하고 차별을 하자 투쟁에 나섰다.
1931년 5월 4일 평양적색노동조합을 조직하면서 노동자의 부당대우를 호소했는데, 5월 16일 회사 측은 일방적으로 17%의 임금 삭감을 통고했고 노동자들은 파업을 개시했다. 회사가 전혀 응대를 안 하자 5월 28일 노동자들은 아사동맹을 결의하고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다음날 새벽 1시 일본경찰의 간섭으로 공장에서 쫓겨났다. 공장에서 나오자마자 당시 30살이던 강주룡은 5월 29일 을밀대 지붕에서 무산자의 단결과 참상을 호소하며 단식투쟁, 한국 사상 최초의 고공농성 1인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다음날 8시 40분에 긴급 투입된 일본 경찰에 의해 강제로 끌어내려졌다. 평양경찰서로 끌려간 강주룡은 6월 1일 새벽 2시에 풀려날 때까지 80여 시간 동안 물 한 모금, 밥 한 술도 안 먹고 버텼다. [2]
구금에서 풀려나자 강주룡은 파업본부로 돌아가 투쟁을 계속했고, 6월 6일 파업단 대표로 사측과 만나 파업 노동자들의 원직 복직을 요구하였다. 6월 8일 임금삭감 방침 철회, 노동자 복직 문제 등이 합의되었다으나, 6월 9일 적색노조에서 조직운동을 했다 하여 최용덕과 함께 체포되어 기소 투옥되었다.[3] . 1932년 6월 4일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8월 13일 오후 3시 반, 평양 서성리 빈민굴 68-28호에서 목숨을 잃었다.[4][5]
2007년 독립운동의 서훈으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강주룡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으로 <체공녀 강주룡>이 있다.
출처
- ↑ <세상을 바꾼 여성들> 한국 여성노동운동가 1호 ‘강주룡’
- ↑ 정운현. 《조선의 딸, 총을 들다》. 인문서원.
- ↑ 여성독립운동가사전. 심옥주. 천지당(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 ↑ 이달의 역사 - 강주룡과 강주룡 들
- ↑ <시대의 경계를 넘은 여성들> 변방에서 중심으로: 정칠성·강주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