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희(高靜熙, 1948~1991), 대한민국의 시인이자 여성운동가로 활동하면서 한국문학사에서 페미니즘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본명 | 고성애(高聖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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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48년 1월 17일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송정리 |
사인 | 실족사 |
매장지 |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송정리 |
국적 | 대한민국 |
학력 | 한국신학대학 |
직업 |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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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및 활동 사항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에서 5남 3녀의 장녀로 태어났다. 삼산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거의 독립적으로 성장, 정규교육과정을 거치지 않고 독학으로 공부하였다. 해남을 떠나기 전까지 해남문학동호회와 『월간해남』 기자로 활동하며 홀로 문학 수업을 하였으며, 1967년에는 『새농민』지에 장만영 시인의 추천으로 시가 실리기도 하였다. 이즈음 고정희는 목포 지역의 젊은 문인들로 이루어진 ‘흑조’ 동인으로 활동하며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고정희는 1970년부터 『새전남』, 『주간전남』, 월간 『백조』, 『소녀생활』 등에서 기자 생활을 하였으며 1974년 광주 YWCA 대학생부 간사를 역임하였다. 1975년 박남수 시인에 의해 『현대시학』에 「부활 그 이후」,「연가」 등이 추천 완료되어 등단하였다. 1979년 한국신학대학(현 한신대학교)을 졸업하였다. 1979년 첫 시집인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 서문에서 “광주YWCA가 내게 생의 길을 열어 준 곳이라면 수유리의 한국신학대학은 생의 내용을 가르쳐 준 곳”이라고 적고 있다. 1979년 광주 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던 허형만, 김준태, 장효문, 송수권, 국효문 등과 함께 <목요시> 창간동인으로 활동하였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여성문학인위원회 위원장과 시창작 분과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전남일보』 기자를 지냈으며, 1894년부터는 기독교신문사, 크리스천아카데미 출판부 책임간사로 근무하였다. 우리나라 초기 여성운동에도 혁혁한 족적을 남겼는데, 1984년 남녀노소가 서로 평등하고 자유롭게 어울려 사는 대안 사회를 모색한 여성주의 공동체와 대안문화 운동단체인 《또 하나의 문화》 창립 동인으로 참가하게 되면서부터 여성문제에 적극적으로 고민하게 되었고,1986년부터는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출판부장을 역임하였다. 그런 이력이 토대가 되어 1988년에는 여성문제를 대중매체를 통해 공론화하는 데 이바지한 여성 정론지 『여성신문』 초대 편집주간을 맡아보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시인이었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창작 여정을 보여주었다. 그는 시를 통해 어떤 가혹한 억압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의지와 생명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형상화하였다.
그는 생애 마지막 작품을 다음과 같은 시로 남기고 갔다. "사십대 문턱에 들어서면/바라볼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기다릴 인연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아니, 와 있는 인연들을 조심스레 접어두고/보속의 거울을 닦아야 한다."(「사십대」) 마치 죽음을 예견이라도 한 듯한 이 작품은, 사랑과 성찰의 모습이 잔잔하게 다가오는 시편이다.
고정희는 1990년 필리핀 마닐라의 아시아종교음악연구소 초청으로 아시아 시인 및 작곡가들이 모여 1년 동안 벌인 ‘탈식민지 시와 음악 워크숍’에 참여하여, 체류 중 ‘밥과 자본주의’, ‘외경 읽기’ 등 연작시를 창작하였다. 1991년 한국가정법률상담소에서 『가족법 개정 운동사』를 편집 제작하였으며, 그 해 6월 8일 [또 하나의 문화] 월례논단에서 "여성주의 리얼리즘과 문체혁명"이란 주제로 발표를 마치자마자 그의 시의 모태가 되어 온 지리산으로 갔다. 그러나 느닷없이 쏟아진 폭우에 뱀사골에서 실족, 43세를 일기로 불타던 삶을 마감하였다.
2001년부터 매년 6월 고정희기념사업회에서는 고정희를 추모하고 여성주의 문화를 지향하는 ‘고정희문화제’를 개최하고 있다. 광주광역시 문화예술회관 광장에 시비가 세워져 있다.[1][2]
의의와 평가
고정희는 1975년 『현대시학』을 통해 문단에 나온 이래 15년간 『실락원 기행』, 『초혼제』, 『지리산의 봄』, 『저 무덤 위의 푸른 잔디』,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여백을 남긴다』 등 모두 열 권의 시집을 발표하였다. 고정희의 시세계는 기독교적 세계관의 지상 실현을 꿈꾸는 노래로부터 민중에 대한 치열한 사랑과 관심, 여성주의적 시선과 경험에 입각한 선구자적 작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탐구의 편폭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모든 시편에서 목숨 있는 존재들에 대한 사랑을 적극적으로 노래하였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계기로 하여 『초혼제』,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 『광주의 눈물비』 등 전통적 남도 가락과 씻김굿 형식을 빌려와 민중의 고난과 저항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위안하는 장시 형식을 잇달아 발표함으로써 새로운 양식적 자각도 보여주었다.
고정희의 시에서 여성문제가 본격적인 주제로 표출된 것은 1989년 출간된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부터지만, 1990년의 『여성해방 출사표』에 이르면 여성문제에 대한 인식이 좀 더 심화될 뿐 아니라 다양한 시적 방법론을 구사하게 된다. 그는 시와 여성주의를 결속한 독자적 시세계를 보여주었고, 여성의 시선과 경험으로 여성만의 역사성과 사회성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였다. 결국 그는 자유 의지를 바탕으로 한 실존적 고통을 승인하면서, 메시아니즘을 핵심으로 하는 앙가주망의 시학을 펼쳤고, 내면 성찰과 남은 자의 그리움을 표상하는 시세계를 남겼다. 거기에 여성으로서의 경험과 시선이 결합하였다. 물론 그가 내놓은 열 권의 시집은 제각기 조금씩 다른 양식과 정조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들이 이러한 성격 규정과 배치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모든 것은 기독교 정신 또는 이념이라는 것이 편협한 종교 도식이 아니라 넓은 현실의 세계를 면밀하게 살펴내는 적극적 인식의 한 패러다임임을 시사하는 훌륭한 예증이라 할 것이다.
그는 자유, 민족, 민중, 그리고 여성의 해방을 위해 노력한 시인이다. 1980년대 이후 폭발적으로 나타난 페미니즘 운동의 선구자였고, 민중적 관점에서 시를 지속적으로 쓴 시인이었으며, 기독교 정신의 시적 형상화에서도 선구적 업적을 남겼다. 애상과 연성을 위주로 씌어졌던 한국 여성시 계보에 굵은 목소리와 강인한 의지를 이채롭게 던진 몫도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저서
-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 (평민사, 1979)
- 『실락원 기행』 (인문당, 1981)
- 장시집 『초혼제』 (창작과 비평사, 1983)
- 『이 시대의 아벨』 (문학과 지성사, 1983)
- 『눈물꽃』 (실천문학사, 1986)
- 『지리산의 봄』 (문학과 지성사, 1987)
- 장시집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 (창작과 비평사, 1989)
- 장시집 『광주의 눈물비』 (도서출판 동아, 1990)
- 『여성해방출사표』 (동광출판사, 1990)
- 『아름다운 사람 하나』 (들꽃 세상, 1990)
- 유고시집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창작과 비평사, 1992)
수상
- 1983년 대한민국문학상 신인상 수상 - '초혼제'
- ↑ “열사정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 김, 경윤. “해남의 특별한 이야기”. 《디지털해남문화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