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명당

최근 편집: 2022년 12월 29일 (목) 00:36
공명당
公明党
영문명 Komeito: KM
약칭 공명(公明)
슬로건 小さな声を、聴く力。
(작은 목소리를, 듣는 힘.)
창당일 1964년 11월 17일
재창당일 1998년 11월 7일
당사 위치 일본 도쿄도 신주쿠구
미나미모토마치 17
선행 조직 공명정치연맹
연관 조직 창가학회
이념 불교 민주주의
풀뿌리 민주주의
평화주의
스펙트럼 중도 ~ 중도우익
대표 야마구치 나쓰오
부대표 기타가와 가즈오
후루야 노리코
간사장 이노우에 요시히사
당색 분홍색
중의원 29 / 465
참의원 28 / 245
도도부현 206 / 2,614
시정촌 2,729 / 30,101
당원 수 약 46만명
홈페이지 [홈페이지], [트위터], [페이스북], [유튜브]

공명당 (公明党)은 일본의 중도~중도우익 성향의 정당이다. 1964년 1964년 일본의 불교계 종교단체인 창가학회를 모체로 중도정치 실현을 위한다는 목표로 창당되었으며 1994년 신진당 합류로 인해 해산되었다가 1998년 재창당되었다. 재창당 이후 자유민주당의 연정 파트너로 활동중이다. 일본의 불교계 종교단체인 창가학회가 모체이며 표면적으로는 "상당수 관계가 해소되었다"는 것이 입장이지만 실질적으로 여전히 창가학회가 공명당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이다.

역사

1961년 신미일안보조약이 체결되는 과정에서 보혁 갈등이 격화되자 창가학회는 '제3문명'을 기반으로 한 중도정치를 주장하면서 '공명정치연맹'을 결성했다. 공명정치연맹은 이후 1964년 단체에서 정당으로 성격을 바꾸면서 이름도 공명당으로 바꾸게 됐다. 1972년 중의원 선거에서 패배한 공명당은 당 노선을 좌선회해 사회·공명·민사 연대를 추진하기로 결정한다. 이렇듯 1990년대 중반까지는 혁신 진영과 함께 야권연대에 협력하기도 하였고 1993년 선거 이후 비자민 연립정권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비자민 연립정권 붕괴 이후에는 1994년 야권을 거의 대부분 통합하여 만든 신진당에 가담하여 소멸하였으나 1996년 신진당이 선거에서 대참패한 이후 다시 독립하여 1998년 재창당하였다. 재창당 이후에는 노선을 바꾸어 자유민주당과 협력하고 있으며 20년 넘게 자민당-공명당 연립정권을 형성하고 있다.

성향

창가학회가 모태지만 1970년부터 창가학회가 공명당 내에 창가학회 고위직을 파견하지 않고, 창가학회의 교리를 지우는 등 공식적으로는 직접적인 연관관계를 해소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영향력과 연대는 강하며 창가학회도 공명당에 조직적으로 표를 주고 있다.

자민당보다 보수색이 옅기 때문에 일본의 우경화를 막는 역할을 한다는 평과 함께, 역으로 자민당에 표만 주고 끌려다닌다는 비판 역시 동시에 받고 있다. 실제로 현재 대표인 야마구치 나쓰오는 성향적으로 유한 면이 있기에 자민당에 목소리를 독자적으로 내지 못하고 끌려다닌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도쿄도의회 등에서는 자민당과 연정을 해소한 적도 있고 상당수의 지방의회에서 '중립회파'로 남아있는 등 무조건적으로 자민당에 끌려다니지 않으려 최근 노력하는 면도 있다.

창가학회의 종교적 교리에 따라 약자 구호와 복지를 중시하며 일본 제국 시기 창가학회가 탄압받은 과거사로 인하여 극우주의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 또한 불교의 영향을 받아 평화주의와 반전주의 색채가 강하기 때문에 헌법 개정에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내부 의견이 많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서 말한 야마구치 대표도 "굳이 헌법을 개정할 필요가 있는가"라고 예외적으로 강한 주장을 드러냈다. 한국에는 '이웃과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창가학회의 교리로 인하여 우호적이다.

지지 기반

지역 기반

지역은 오사카나 고베 같은 간사이 지역이 주요 기반이다.

연령 기반

연령에 관계없이 모든 연령층에서 10% 정도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 10%의 지지는 50%에 살짝 못미치는 자민당의 지지를 보충해준다. 그리고 창가학회가 표를 날라주기도 하는 등 공명당을 강하게 지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