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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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유령 -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유럽에 떠돌고 있다.

공산당 선언》(共産黨 宣言, 독일어: 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 )은 공산주의 사상가인 카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에 의하여 집필된 공산주의자들의 최초의 강령적 문헌으로, 프랑스 2월 혁명 직전인[1] 1848년 2월 21일 첫 출판되었다.

개요

19세기 중엽 독자적인 정치 세력으로 무대에 등장한 프롤레타리아에게 그의 역사적 사명과 해방의 앞길을 밝혀 주고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지도적 지침을 확립한다는 목적의식 하에 1847년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하여 초안이 작성되었다. 1847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가입한 의인동맹(義人同盟, Bund der Gerechten)은 공산당선언을 동맹의 정책문서로 채택하였다. 그 해 여름 조직은 재정비되었고 1848년 공산주의자동맹으로 다시 태어났다.

선언은 생산 방식이 사회 제도의 성격을 규정하며 정치와 사회적 사상의식의 기초로 된다는 유물사관의 원리가 천명되어 있으며 자본주의사회의 기본 모순, 자본주의 멸망의 불가피성과 사회주의, 공산주의 승리의 필연성을 주장하고 있다는 이해도 있지만, 마르크스는 불가피성과 필연성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았다. 그는 역사에 개입함으로써 변혁을 꾀할 여지가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자본주의가 모순을 가지고 나락으로 향하지만 그것자체만으로는 자동적으로 사회주의나 사회주의 이후의 공산주의로의 이행이 진행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즉 마르크스주의를 표현할 때 필연성이나 불가피성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피상적인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 강령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포함하여 무계급 사회를 겨냥한 일련의 행동을 권장하였다. 이는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 남미 등의 사회주의 운동의 기초가 되었다.

번역

《공산당 선언》의 서문에서는 영어판, 프랑스어판, 독일어판, 이탈리아어판, 플레망어판, 덴마크어판의 번역 출간이 임박하였다고 언급하였지만 실제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1848년에 스웨덴어판이, 1850년에 영어판이 출간되었으나 이 두 판은 현존하지 않는다. 《공산당 선언》이 외국어로 번역되어 대대적으로 출간되기 시작한 것은 1871년 이후이며,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직전에는 이미 3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공산당 선언》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일로, 선언은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사이 냉전이 한창이던 시기 지식인층으로 대상으로 전 세계에 퍼졌다. 그러나 이미 이 때 《공산당 선언》은 공산주의마르크스주의를 퍼트리는 강령이라기보다는 정치사회를 공부하기 위한 고전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혔다.

대한민국에서 출판된 번역본 또는 해석본으로는 《공산당 선언》(남경태 옮김, 백산서당), 《강유원의 고전강의, 공산당 선언》(강유원, 뿌리와이파리), 《새로운 공동체를 위한 운동 공산주의 선언》(박찬종, 아이세움) 등이 있다.

《공산당 선언》표지

구성

《공산당 선언》은 머리글과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머리글에는 "하나의 유령 -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유럽에 떠돌고 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고 있다. 이 문장은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구절과 함께, 이후 역사적 정치적 수사에 곧잘 인용되곤 했다.

서문

1872년 독일어판 서문 (프리드리히 엥겔스)

1872년 독일어판 서문 프리드리히 엥겔스 당시 상황에서는 비밀 조직일 수밖에 없었던 국제 노동자 단체인 공산주의자 동맹(1)은 1847년 11월 런던에서 열린 대회에서, 앞으로 공포할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상세한 당 강령을 작성할 것을 아래 서명자들에게 맡겼다. 이렇게 하여『선언』이 생겨나게 되었고(2), 그 원고는 2월 혁명(3)이 일어나기 몇 주일 전에 인쇄하려고 런던으로 보내졌다. 처음에 독일어로 출판된 『선언』은 독일·영국·미국에서 출판되었는데, 독일어로만 적어도 12종의 서로 다른 판으로 거듭 출판되었다. 영어로는 1850년 런던에서 헬렌 맥팔레인(Helen Macfarlane) 양이 번역하여 『붉은 공화주의자』 (4)에 처음 발표되었으며 1871년에는 미국에서 적어도 3종의 서로 다른 번역본들이 출판되었다. 프랑스 어로는 1848년 6월 봉기[1] 직전에 파리에서 처음 출판되었고, 최근 뉴욕의 『사회주의자』(Le Socialiste)에 다시 실렸다. 현재 또 다른 번역본이 준비되고 있다. 폴란드 어로는 최초의 독일어판이 나온 지 얼마 안 되어 런던에서 출판되었다. 러시아 어로는 1860년대에 제네바에서 출판되었다. 던마크 어로 된 번역본 또한 최초의 판이 나온 뒤 곧 출간되었다.

 지난 25년 동안 상황이 아무리 크게 변했다 하더라도, 이 『선언』에 개진되어 있는 일반적인 기본 원리들은 크게 보면 오늘날에도 전적으로 옳다. 여기저기 몇몇 군데는 고쳐져야 할 것이다. 『선언』자체가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러한 기본 원리를 실천에 적용하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당대의 역사적 조건들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선언』의 제2절 끝에서 제시된 혁명적 방책들은 결코 그 자체가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이 부분은 여러 가지 점에서 다르게 서술되어야 할 것이다. 지난 25년에 걸친 대공업의 거대한 발전과 이에 따른 노동자 계급의 당 조직의 성장에 비추어 볼 때, 그리고 우선 2월 혁명의 실천적 경험과 더 나아가 정권이 처음으로 2개월간이나 프롤레타리아트의 손아귀에 있었던 파리 코뮌(5)의 실천적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이 강령의 몇몇 군데는 오늘날 낡은 것이 되어 버렸다. 특히 코뮌은 "노동자 계급이 기존의 국가 기구를 단순히 장악하여 그것을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해 운영할 수는 없다."('프랑스의 내란에 대한 국제 노동자 협회 총평의회의 격문'(6), 독일어판, 19쪽을 보라. 거기서는 이 점이 더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는 것을 실증해 주었다. 또 사회주의 문헌에 대한 비판(제3절)은 1847년까지의 것만을 다루고 있으므로 오늘날에 와서 볼 때 충분하지 못한 것임은 너무도 명백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각종 반정부당들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입장을 언급한 부분(제4절)도 기본적인 점에서는 오늘날에도 옳지만, 오늘날 실천에 옮기기에는 이미 낡아 버렸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정치 정세가 완전히 달라졌고 또 거기에 열거된 당들이 역사 발전에 따라 대부분 지상에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언은 역사적 문헌이 되었으며, 우리에게는 더 이상 그것을 바꿀 권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다음 판에는 아마 1847년부터 오늘에 이르리까지의 시간적 간격을 메워 주는 서론을 덧붙일 수 있을 거시다. 이 판은 갑자기 출판하게 되어, 우리로서는 그렇게 할 시간이 없었다.

1872년 6월 24일, 런던에서



편집자의 주 [1] 1848년 6월 봉기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첫번째 대전투'(엥겔스), 6월 24~26일에 일어난 파리 노동자들의 봉기, 전쟁상(相)인 카베냑(Cavaignac)에 의해 유혈 진압되었다.

1883년 독일어판 서문 (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1883년 독일어판 서문 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앞서 쓰인 서문[3]이 나온 이래 다시 『선언』의 새로운 독일어판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고 『선언』과 더불어 여기서 언급해 두어야만 할 갖가지 일들이 일어났다.

러시아 어로 된 두 번째 판---베라 자수리치(7)가 번역한[4]---이 1882년 제네바에서 출판되었다. 그 서문은 마르크스와 내가 썼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독일어 원문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러시아어판을 다시 독일어로 번역해야 했지만, 그렇게 해서 원래 상태로 되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서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5].

『공산당 선언』의 첫번째 러시아 어판은 바쿠닌(8)이 번역하여 1860년대 초에 나왔으며, 『종소리』인쇄소에서 출판되었다[6]. 당시 서유럽에서 『선언』의 러시아 어판은 문필계의 진기한 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러한 견해가 있을 수 없다.

당시(1847년 12월)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보급 범위가 제한되어 있었는가를 『선언』의 마지막 절---각 나라의 각종 반정부당들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태도---이 가장 잘 보여 주고 있다. 이 절에서는 바로 러시아와 미국이 빠져 있다. 당시는 러시아가 유럽 반동 세력 전체의 마지막 거대한 예비군이던 때였으며, 미국이 유럽 프롤레타리아트의 과잉 인구를 이민으로 흡수하던 때였다. 이 두 나라는 유럽에 원료를 공급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유럽 공산품의 판매 시장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 두 나라는 당시 어쩄든간에 유럽의 기존 질서를 받쳐주는 기둥이었다.

오늘날에는 사정이 얼마나 달라졌는가! 바로 유럽에서 온 이주민들이 북미의 농업 생산을 엄청나게 늘렸으며, 그것과 경쟁하느라고 유럽의 토지 소유는 크든 작든간에 뿌리째 뒤흔들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오는 이주민 덕분에 미국은 정력적으로 또 단계적으로 엄청난 공업용 자원들을 개발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 자원들은 지금까지 서유럽, 특히 영국이 누려 오던 공업의 독점을 머지않아 깨부수지 않을 수 없다. 이 두 가지 상황이 다시 미국 자체에도 혁명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미국식---역자) 정치 제도 전체의 토대인 농장주들의 중소 규모 토지 소유는 대농장과 경쟁하는 데서 차츰 패배하고 있다. 동시에 공업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다수의 프롤레타리아트와 거짓말같은 자본 집중이 발전하고 있다.

그러면 이제 러시아를 살펴보자. 1848~1849년의 혁명 동안 유럽의 군주들뿐만 아니라 부르주아들까지도 이제 막 깨어난 프롤레타리아트 앞에서 러시아의 간섭을 유일한 구원으로 여기게 되었다. 짜르는 유럽 반동 세력의 두목으로 선포되었다. 오늘날 그는 가취나[7]에 수용된 혁명의 전쟁 포로이고, 러시아는 유럽 혁명 운동의 선봉을 이루고 있다.

『공산당 선언』의 과업은 피할 수 없게 닥쳐오고 있는, 현대의 부르주아적인 소유를 폐지한다고 선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머리가 어지러울 만큼 급속히 번창하고 있는 자본주의와 이제야 겨우 발전하기 시작한 부르주아적 토지 소유가 있는 반면에, 토지의 절반 이상이 농민의 공동 소유임을 볼 수 있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긴다. 비록 러시아의 공동체(Obschtschina)에서는 토지의 원시적인 공동 소유 형태가 심하게 무너지기는 했지만 어쩄든, 그것이 한층 더 높은 공산주의적 공동 소유의 형태로 직접 이행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거꾸로 서유럽의 역사 발전이 보여 준 것과 같은 해체 과정을 먼저 거쳐야만 할 것인가?

오늘날 이에 대해 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다음과 같다. 만일 러시아의 혁명이 서유럽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신호가 되고 그 결과로 둘이 서로를 보완한다면, 지금 러시아에 남아 있는 토지의 공동 소유는 공산주의 발전의 출발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폴란드 어판이 같은 시기에 제네바에서 『공산당 선언』(Manifest Komunistyczny)에서 출판되었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덴마크 어 번역본이 1885년 코펜하겐의 『사회 민주주의 총서』(Socialdemokratisk Bibliotek)에서 출판되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판은 전혀 만족스럽지 못했다. 여자에게 어렵게 보인 중요한 구절이 몇 개 빠져 있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역자가 좀더 신중하게 잘 할 수 있었을 텐데 어물어물 넘어간 흔적이 여기저기 눈에 띄어 불쾌하기 짝이 없다.

1886년, 새로운 프랑스 어 번역본이 파리의 『사회주의자』에 실렸다. 이것은 지금까지 출판된 것 가운데 가장 번역이 잘된 책이다.

이어서 같은 해에 스페인 어 번역본이 마드리드의 『사회주의자』(El Socialista)에 처음 실렸고, 또 소책자로도 출판되었다.(『공산당 선언』Manifesto del Partido Comunista), 마르크스·엥겔스 지음, 마드리드, 에르난 코르테스 가 8번지, 『사회주의자』 출판사.)

한 가지 신기한 것은 1887년 아르메니아 어로 된 번역본 원고가 콘스탄티노플의 한 출판업자 손에 입수되었는데, 이 선량한 사람은 마르크스의 이름이 박힌 책을 내고 싶어하지 않아서 차라리 역자를 저자로 하여 내고자 했으나 그가 이를 거절했다는 사실이다.

차이는 있지만 조금씩 잘못된 영어 번역본이 영국에서 여러 차례 거듭 출판된 끝에 마침내 1888년에 믿을 만한 번역본이 나왔다. 그것은 내 친구 사무엘 무어가 번역한 것으로 인쇄되기 전에 우리 두 사람이 함께 다시 한 번 검토해 보았다. 그 제목은 다음과 같다. 『공산당 선언』(Manifesto of the Communist Party), 마르크스·엥겔스 지음, 영어 번역 정본, 엥겔스가 편집하고 주석을 붙임, 1888, 런던 윌리엄 리브즈(William Reeves) 구 플리트(Fleet) 가 185번지 성(聖)E.C. 나는 이 판에 붙인 몇몇 주석을 여기서도 그대로 썼다.

『선언』은 그 나름의 경력을 갖고 있다. 그것은 출현하자마자 (맨 처음 서문에 열거된 번역본들[8]이 증명하고 있듯이) 당시 아직 소수였던 과학적 사회주의의 선봉으로부터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1848년 6월 파리 노동자 봉기가 실패로 끝나면서 시작된 반동 때문에 『선언』은 얼마 안 가 뒷전으로 밀려났으며, 1852년 11월 쾰른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유죄 판결[9]로 마침내 '법에 따라' 파문당했음이 선포되었다. 2월 혁명에서 시작된 노동 운동은 공식 무대에서 사라지고, 이와 함께 『선언』도 뒤로 물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유럽의 노동자 계급이 지배 계급의 권력에 대항하여 새로운 진격을 개시할 만큼 또다시 충분히 강해졌을 때, 국제 노동자 협회가 탄생했다. 이 협회의 목적은 유럽과 미국의 전투적인 노동자 계급 전체를 하나의 대군(大軍)으로 뭉치게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협회는 『선언』에 실린 원리들에서 출발할 수는 없었다. 협회는 영국의 노동 조합들이나 벨기에·이탈리아와 스페인의 프루동주의자들(9), 그리고 독일의 라살레 파<1>까지 모두 포용하는 강령을 가져야만 했다. 마르크스는 바쿠닌이나 무정부주의자들(10)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훌륭한 솜씨로 이러한 강령---인터내셔널 규약의 취지를 설명한 부분---을 작성했다. 『선언』에서 제시된 명제들의 궁극적인 승리를 위해서, 마르크스는 전적으로 노동자 계급의 지적 발전에 기대를 걸었다. 통일된 행동과 토론을 통해 반드시 지적 발전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자본에 대항하는 투쟁 속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승패의 교차, 특히 승리보다는 패배를 지켜 보면서 투쟁하는 사람들은 그때까지 써 오던 자신들의 만병 통치약이 전혀 듣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으며, 또 노동자 해방의 참된 조건들을 철저히 통찰하기 위해 좀더 머리를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옳았다. 1874년 인터내셔널이 해산되었을 때의 노동자 계급은 1864년 인터내셔널이 창설되었을 때의 노동자 계급과는 완전히 달랐다. 라틴계 나라들의 프루동주의, 독일 특유의 라살레주의는 사멸해 가고 있었으며, 당시 가장 보수적이던 영국의 노동 조합까지도 차츰 바뀌어 1887년 스완시(Swansea) 대회에서는 의장이 조합의 이름으로 "우리는 이제 대륙의 사회주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까지 되었다. 그런데 대륙의 사회주의라면 1887년에는 거의 다 벌써 『선언』에 공포되어 있는 이론뿐이었다. 이처럼 『선언』의 역사는 1848년 이후의 현대 노동 운동의 역사를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 오늘날 그것이 모든 사회주의 문헌 가운데서 가장 널리 보급된 국제적 문헌이며, 시베리아에서 캘리포니아에 이르기까지 모든 나라 수백만 노동자의 공동 강령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선언』이 나왔을 때 우리는 이것을 사회주의적 선언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1847년에는 두 부류으 ㅣ사람들이 사회주의자라고 불리고 있었다. 하나는 각종 공상적 체계의 신봉자들, 특히 영국의 오언주의자들(11)과 푸리에주의자들(12)로 이 두 조류는 당시에 벌써 점점 사멸해 가는 하찮은 종파로 쪼그라들어 있었다. 또 다른 하나는 가지 각색의 돌팔이 사회 의사들로 이들은 자본과 이윤은 전혀 손대지 않은 채, 온갖 만병 통치약과 갖가지 미봉책으로 사회의 재앙을 없애려 했다. 어느 경우에나 그들은 모두 운동 밖에 있으면서, 오히려 '고양 있는' 계급의 지지를 구한 사람들이었다. 반면에 노동자들 가운데서도 단순한 정치 변혁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을 확신하고 사회의 근본적 개혁을 요구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당시 자신들을 공산주의자라고 불렀다. 그것은 아직 잘 다듬어지지 못한, 단지 본능적이고 좀 조잡한 공산주의이기는 했으나, 공상적 공산주의의 두 체계---프랑스의 카베(13)의 '이카리아' 공산주의와 독일의 바이틀링(14)의 공산주의---를 만들어 낼 만큼 충분히 힘있는 것이었다. 1847년에 사회주의는 부르주아 운동을 뜻했고, 공산주의는 노동 운동을 뜻했다. 사회주의는 적어도 대륙에서는 점잖은 것이었으나 공산주의는 그 반대였다. 그런데 우리는 그때 이미 '노동자의 해방은 노동자 계급 자신의 사업이어야 한다'는 의견을 단호하게 고수하고 있었으므로, 이 두 가지 명칭 가운데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는 다른 의견이 나올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도 우리는 이 명칭을 버리려고 생각한 적이 결코 없었다.

'전세계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지금부터 41년 전 프롤레타리아트가 맨 처음으로 자기 자신의 요구를 들고나섰던 파리 혁명(15)의 전야에 우리가 이 말을 전세계에 외쳤을 때, 이에 호응한 목소리는 아주 적었다. 그러나 1864년 9월 28일에는 서유럽 대다수 나라의 프롤레타리아들이, 지금 돌이켜 보면, 영광스러운 국제 노동자 협회를 위해 단결했다. 물론 이 인터내셔널 자체는 겨우 9년밖에 존속하지 못했다. 그러나 인터내셔널이 기초를 닦아 놓은 전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영원한 동맹은 아직도 살아 있으며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견고해졌는데, 이 점을 오늘날보다 더 잘 증명해 주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날 서유럽과 미국의 프롤레타리아트는 하나의 당면 목표를 위해, 하나의 깃발 밑에 하나의 군대로서 처음 동원된 자신들의 전투력을 점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목표란 이미 1866년 인터내셔널 제네바 대회에서 처음으로 선언되었고 1889년 파리 노동자 대회(16)에서 다시 선언된 것으로서, 1일 표준 8시간 노동을 법적으로 명문화하는 일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이 광경은 전세계의 자본가와 지주들로 하여금 오늘날 전세계의 프롤레타리아들이 실제로 단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할 것이다.

마르크스가 지금 내 곁에서 이 광경을 자신의 눈으로 지켜 볼 수만 있다면!

1890년 5월 1일, 런던에서

저자의 주 <1> 라살레 자신은 우리에게 늘 마르크스의 '제자'로 자처했으며, 또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선언』을 기반으로 삼았다. 그는, 국가의 융자에 의한 생산 협동 조합이라는 요구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노동자 계급 전체를 국가의 도움을 받는 자와 스스로 돕는 자로 나누었던 그의 추종자들과는 달랐던 셈이다.

편집자의 주 [3] 1883년의 독일어판 서문을 가리킨다.

[4] 엥겔스는 1894년에 쓴 『러시아 사회 상태』후기에서(『전집』제18권, 668쪽) 이 번역본의 역자가 플레하노프라고 말하고 있다. 플레하노프도 1900년에 나온 『선언』의 러시아 어판에서 자신이 그 번역을 완성했다고 말한 바 있다.

[5] 엥겔스가 잃어버린 독일어 원문, 즉 그가 마르크스와 함께 썼던 1882년 러시아 어판 서문은 뒷날 발견되어 모스크바의 마라크스 레닌주의 연구소 문서실에 보관되어 있다. 따라서 아래에 실린 내용은 그 원문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전집』에는 러시아 어판 서문이 따로 실려 있으나 이 책에서는 러시아 어판 서문을 따로 뽑지 않고 엥겔스가 한 대로 그냥 1890년 독일어판 서문에 포함하여 소개했다.--역자)

[6] 이 러시아 어판은 1869년에 나왔다. 엥겔스가 쓴 1888년의 영어판 서문에도 『선언』의 첫번째 러시아 어판의 출판 연도가 정확하지 않게 나와 있다.(『전집』제4권, 580쪽을 보라)

『종소리』(Kolokol) 러시아의 혁명적 신문으로 '나는 살아 있는 사람들을 부른다'(Vivos voco)를 모토로 삼았다. 게르첸(A. J. Herzen)과 오가료프(N. P. Ogarjow) 가 편집을 맡았고, 1857~1865년에는 런던에서, 1865~1867년에는 제네바에서 간행되었다. 『종소리』는 러시아에 혁명 운동을 보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7] 가취나(Gatschina) 레닌그라드에서 남서쪽으로 45km 떨어진 고장. 동시에 그곳에 있는 유명한 성(城) 이름. 10월 혁명 전에는 러시아 짜르의 휴양지였으나 오늘날에는 박물관이 되엇다.(러시아의 알렉산드르 3세는 혁명가들로부터 테러를 당하지 않으려고 이곳에 숨어 있었다.--역자)

[8] 『전집』제4권, 573쪽을 보라.

[9] 쾰른에서 열린 공산주의자 동맹 회원들에 대한 재판을 가리킨다.(『전집』제4권, 578쪽을 보라.)

1890년 독일어판 서문 (프리드리히 엥겔스)

1890년 독일어판 서문 프리드리히 엥겔스 이 판의 서문에슨 유감스럽게도 나 혼자 서명하지 않을 수 없다. 마르크스에게서, 유럽과 미국의 노동자 계급 전체는 어느 누구에게서보다도 더 큰 은혜를 입었지만, 그 마르크스는 이제 하이게이트(Highgate) 묘지에 누워 있으며 그의 무덤 위에는 벌써 첫 풀이 자라나고 있다[2]. 그가 떠난 이상 『선언』을 뜯어고치거나 보충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나는 더욱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분명히 밝혀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선언』을 뚫고 흐르는 기본 사상, 즉 어떤 역사적 시기의 경제적 생산과 거기서 뒤따라 나올 수밖에 없는 사회 조직은 그 시대의 정치사와 지성사의 토대를 이루며, 이에 상응하여 (원시 공동체적 토지 소유가 붕괴한 이래) 역사 전체는 계급 투쟁, 즉 서로 다른 사회 발전 단계에서의 피착취 계급과 착취 계급 사이의 투쟁, 피지배 계급과 지배 계급 사이의 투쟁의 역사였다는 사상, 그러나 지금 이 투쟁은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계급(프롤레타리아트)이 동시에 사회 전체를 착취와 억압과 계급 투쟁으로부터 영원히 해방하지 않고서는 자신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계급(부르주아지)에게서 해방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사상, 이 기본 사상은 전적으로 또 오로지 마르크스의 것이다<1>.
 나는 이것을 이미 여러 차례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이제야말로 이것이 『선언』 자체의 앞머리에 놓일 필요가 있다.

1883년 6월 28일, 런던에서

저자의 주 <1> 나는 영어판 서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내 생각으로는 다윈의 이론이 자연 과학 분야에서 진보의 기틀을 마련했듯이, 이 사상은 역사 과학 분야에서 똑같은 진보의 기틀을 마련했다. 우리 두 사람이 이 사상에 차츰 접근한 것은 1845년이 되기 몇 해 전이었다. 내가 독자적으로 얼마만큼 이 방향으로 나아갔는가를 보여 주는 글이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태』다. 그러나 내가 1845년 초 브뤼셀에서 마르크스를 다시 만났을 때, 그는 이 사상을 힘들여 완성해 놓고 있었으며 내가 위에서 개괄해 놓은 바와 거의 똑같을 만큼 명료한 말로써 그것을 내게 내놓았다." [엥겔스가 1890년의 독일어판에 덧붙인 주---편집자]

편집자의 주 [2] 마르크스는 1883년 3월 14일 런던에서 죽었다. 그의 유해는 3월 17일 런던의 하이게이트 묘지에 묻혔다.


1장

제1장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에서 모든 사회의 기본적 발전 법칙, 즉 계급투쟁을 해명하고 각 역사적 사회 구성체의 이행을 간결하게 개괄한 후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에 의한 자본주의 붕괴의 필연성을 분석, 노동자 계급의 궁극적 목적 즉 공산주의를 기초지운다.[1]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 생산방식의 발생 과정, 자본주의적 착취의 본질, 자본주의의 기본 모순과 그 멸망의 불가피성을 설명하였으며 경제적 이해관계의 대립에 기초한 피착취계급과 착취계급의 계급 투쟁이 인류 역사의 기본 내용이며 사회발전의 추동력이라 주장했다. 마르크스는 1장에서 부르주아가 이룬 막대한 업적을 역설적으로 찬양하였으나, 선언이 쓰여진 시점에서 부르주아는 "명계에서 불러낸 마물을 통제하지 못하게 된 마법사"와 같이 자본의 노예가 되었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지배계급도 부르주아지가 아닌 새롭게 떠오른 노동자,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주역이 된 새로운 사회의 건설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2장

제2장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선언의 이 부분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당면 과업이 프롤레타리아의 목적과 일치한다고 주장하며 프롤레타리아 주도의 공산사회를 만드는 것이 모든 공산주의자들의 최고목적이라고 밝혔다.

즉 노동자 계급의 전위로서의 당의 역할을 해명하고 당의 강령을 서술한다. 공산주의자의 투쟁의 기본 강령적 목표는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의 폐기 및 사회적 소유화, 이를 바탕으로 한 인간의 자유로운 발전 및 문화ㆍ과학의 발전을 위한 가능성의 창출이다. 그리고 국가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중요한 사상의 하나인 프롤레타리아 독재사상을 정식화했다.[1]

3장

제3장 〈사회주의 문헌과 공산주의 문헌〉에서는 기독교 사회주의, 유토피아 사회주의 등의 부르주아적이거나 쁘띠 부르주아적인 비(非)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의 조류들[1]을 비판하였다.

4장

제4장 〈각종 반정부당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태도〉에서는 각국 공산당들의 기본적인 혁명 전략을 다루고 있다.

즉 공산주의자는 언제 어디서나 현 사회ㆍ정치제도에 반대하는 일체의 혁명운동을 지지할 것, 봉건제에 대한 부르주아지와의 공동투쟁도 지지할 것 등의 원칙이 지적되고 있으며, 또한 공산주의자는 자신의 기본적 의무, 즉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화해할 수 없는 적대적 모순에 기초한 계급의식을 노동자 사이에 양성하는 임무를 잠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점, 노동자 계급의 목적은 현 자본주의 제도의 폭력적 타도에 의해서만 달성 가능하다는 것이 공언된다.[1]

선언은 국제적 단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공산주의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가 잃을 것은 족쇄 뿐이고 그들이 얻을 것은 전 세계이다. 전 세계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라는 구호로 끝을 맺는다.

《공산당 선언》이 세계에 끼친 영향

  • 당대에의 영향
    • 《공산당 선언》이 발표된 직후 유럽에서 발생한 민중봉기는 《선언》과 직접 관계된 것은 아니지만 당대의 혁명적 시대정신을 가장 선명하게,급진적으로 드러낸 문건임을 확인시킨 것은 틀림없다.[2] 1871년의 파리 코뮌은 《선언》의 직접적 결과는 아닐 수 있어도, "파리 코뮌이 《선언》의 정신적 자식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한 엥겔스의 말대로 파리코뮌은 "노동자계급이 사회전체를 노예제도에서 자유롭게 정치, 사회적 해방을 확고히 하려는 목적으로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권력을 수립한 세계 역사상 최초로 벌어진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의 예행연습"이었다. 1881년, 《선언》에 나타난 사회주의 이념을 표방한 독일 사회민주당은 국회의원 12명을 당선시킴으로써 엥겔스는 이를 두고"프롤레타리아가 이룩한 가장 눈부신 업적"이라고 했다. 또한 엥겔스는 《선언》이 "전체 사회주의 문헌 가운데 가장 널리 유포되고 가장 국제적인 작품이며 시베리아에서 캘리포니아에 이르는 모든 나라의 수천만 노동자들에게 인정받는 공동 강령"이라 평했다.[3]
  • 《선언》의 실현:
    • 마르크스는 1882년 《선언》의 러시아 개정판에서 러시아에서의 혁명가능성을 언급했다.그리고 1917년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하였다. 그러나 레닌에서 스탈린으로 권력이 이양되면서 사태는 역전되었다. 마르크스가 《선언》에서 예견했던 개인들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 신장의 조건이 되는 사회가 도래하지 않았다. 한편, 독일에서도 1919년,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한 봉기가 발생했다. 총파업 투쟁은 전국을 뒤덮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노동자여 행동하라! 용감하고 과감하고 철저하게 행동하라!' 는 구호 아래 혁명을 시도하나, 진압되었다.[4]
  • 68혁명기:
    • 68혁명은 짧게는 10년 길게는 20년 이상 세계를 뒤흔드는 여파를 끼쳤는데, 이는 《선언》의 평등 이념의 확실한 복귀이자 확장에 다름 아니었다. 68 혁명의 주체로 등장한 신좌파는 구좌파를 지양한, 즉 변증법적으로 발전을 이룬 세력이었다. 신좌파는 구좌파와 마찬가지로 부르주아지의 정치적,경제적 착취를 강력히 반대했다. 바로 《선언》의 복귀였다.동시에 착취 개념을 무한정 확장함으로써 《선언》을 한층 발전시켰다. 사회적, 문화적, 관료적, 인종적, 성적 착취 등과 아동학대까지 거의 모든 사회문제와 불평등에 저항했다.[5]

《공산당 선언》의 경구

틀:위키자료집

  •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 "인간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
  • "모든 계급투쟁은 정치투쟁이다"
  • "부르주아지는 적나라한 이해관계, 무정한 '현금지불' 이외에 인간들 사이에 다른 어떤관계도 남겨놓지 않았다"
  • "부르주아지는 인간의 존엄을 교환가치로 녹여 버렸고, 인간의 자유를 단 하나의 파렴치한 상거래의 자유로 대체했다"
  • "부르주아계급은 가족관계조차 감상의 장막을 걷어버리고 순전히 금전관계로 만들었다"
  • "자본주의 아래에서 자유란 상거래의 자유, 판매와 구매의 자유일 뿐이다"
  • "부르주아지가 봉건제를 무너뜨릴 때 사용했던 무기가 이제 그 자신을 겨누게 되었다. 그 무기를 휘두를 노동자 계급을 낳았다"
  • "부르주아계급이 성장하는 정도에 비례해서 노동자계급의 계급의식도 성장한다"
  • "노동자는 분업과 기계화로 말미암아 이제 단순한 도구나 부품이 되었고 매시간 감독하는 관리자, 사용주, 부르주아, 그리고 그 국가의 노예가 되었다"
  • "부르주아지는 싫든 좋든 촉진시키지 않을 수없는 산업의 발달은 노동자를 고립시키지만 동시에 연합을 통해 그들을 혁명세력으로 만든다. 이리하여 부르주아지는 무엇보다 자신의 무덤을 파는 일꾼들을 양성해 낸 것이다. 부르주아지의 몰락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는 피할 수없다"
  • "이제까지의 소유(관계)를 폐지하는 것이 공산주의가 처음이 아니다. 프랑스혁명에서 부르주아지는 봉건적 소유제를 완전히 폐지시켰다. 그리고 부르주아지는 생산수단을 독점했다. 해서 사적소유를 폐지하고 박탈한 것은 부르주아지이다. 대다수의 노동자계급은 노동하고도 소유하지 못했고 부르주아지는 노동 않고 소유했기 때문이다"
  • "공산주의는 누구에게도 생산물을 취득할 힘을 빼앗지 않으며 다만 이런 취득을 통해 타인의 노동을 자신에게 종속시키는 힘을 박탈할 뿐이다"
  • "사적 소유를 철폐하면 그 순간, 사회는 게으름이 만연할 거라 비난한다. 그렇다면 진작에 부르주아지체제는 일순간에 몰락했어야 했다. 대다수는 소유하지 못하니까."
  • "당신들의 법과 사상은 부르주아지의 생산체제와 소유관계의 부산물이고 지배수단과 도구에 불과하다"
  •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이 국가를 장악하기 전까지는 그 자신이 민족적이다"
  • "한 시대의 지배사상은 늘 지배계급의 사상이다"
  • "노동계급 혁명의 첫걸음은 노동계급이 지배력을 장악해서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것이다"
  • "노동자계급은 사회의 생산수단을 국가가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수중에 귀속시킨다"
  •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획득한다면 각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공동)체가 등장할 것이다"[6]
  • "공산주의자는 모든 나라 민주주의 정당들의 단결을 위해 노력한다"
  • "공산주의자는 자신들의 견해와 의도를 감추는 것을 경멸한다"
  • "공산주의는 자신들의 목적이 기존의 모든 사회 질서를 전복해야만 달성될 수 있음을 공공연하게 선언한다"
  • "부르주아 지배계급으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 벌벌 떨게 하라!"
  • "프롤레타리아가 잃은 것이라곤 쇠사슬 뿐이요 얻을 것은 전 세계다.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7]

출처

  1. 1.0 1.1 1.2 1.3 1.4 임석진, 윤용택, 황태연, 이성백, 이정우, 양운덕, 강영계, 우기동, 임재진, 김용정, 박철주, 김호균, 김영태, 강대석, 장병길, 김택현, 최동희, 김승균, 이을호, 김종규, 조일민, 윤두병. “공산당 선언 - 철학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2019년 12월 27일에 확인함. 
  2. 유강은 역《공산당선언》그린비,94쪽
  3. 유강은,위의책,116,118쪽
  4. 유강은,위의책,120쪽
  5. 유강은,위의책,143쪽
  6. 마르크스는 연합과 공동체를 구별했지만, 사회주의적 공동체도 가능한 만큼 혼용할 수 있다
  7. 《공산당선언》남상일 옮김,백산서당

외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