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양왕

최근 편집: 2022년 12월 26일 (월) 11:54
고려의 역대 국왕
33대 창왕 왕창 34대 공양왕 왕요 조선 1대 태조 이성계
묘호 없음
생몰년도 음력 1345년 2월 5일 ~ 1394년 4월 17일
양력 1345년 3월 9일 ~ 1394년 5월 17일
재위기간 음력 1389년 ~ 1392년
양력 1389년 ~ 1392년
부모 어머니 국대비 왕씨
아버지 정원부원군 왕균
창(昌)
시호 공양대왕(恭讓大王)
간성왕(杆城王)

개요

고려의 제34대 왕이자 마지막 왕으로, 고려의 제20대 국왕신종의 둘째 아들 양양공의 6대손[1] 이며 정원부원군 왕균과 충렬왕의 서장자 강양공 자(滋)의 손녀 국대비 왕씨의 차남이다.

성은 (王)이고 휘는 (瑤)이며, 공양군(恭讓君)이라는 강칭(降稱)으로 불리다가, 태종이 그를 왕으로 추봉하면서 공양왕(恭讓王)의 시호를 올렸다.

공양왕(恭讓王)은 재위한 1389년부터 1392년까지 이성계(李成桂)가 실권을 맡았다. 폐위 후 처음에는 강원도 원주로 유배되었다가 간성으로 유배지가 옮겨졌고, 다시 삼척으로 옮겨진 뒤에 그 곳에서 처형되었다. 이로 인해 간성왕(杆城王)이라는 호가 붙여졌다.[2]

생애

고려 왕실

정원부원군 균(鈞)과 그 부인 국대비 왕씨의 둘째 아들로서, 왕후는 교하(交河) 사람인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 노진의 여식인 순비 노씨이다. 어려서 정창군(定昌君)에 봉해졌고, 그의 형 정양군 왕우의 딸이 이성계신덕왕후 강씨의 아들 이방번과 결혼하여 사돈인 관계로 이성계 일파의 추대를 받아 폐가입진(廢假立眞)이라는 명분으로써 왕위 계승자로 천거되었다.

친명파 신진 사대부인 이성계와 정몽주 등은 1389년(창왕 1년)에 창왕을 폐위시킨 직후에 공양왕을 옹립하였다. 온건 개혁파였던 정몽주 등의 신하들은 공양왕을 보필하며 고려를 재건하려는 필사의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이성계, 정도전 등은 역성 혁명을 꾀하고 있었고 정몽주가 이성계의 5남인 이방원(李芳遠, 훗날의 태종)에게 선죽교에서 살해되자, 온건 개혁파 신료들의 응집력이 약화되어 조정은 와해되었다.

그리고 1392년(공양왕 4년) 이성계와 이방원, 정도전 등은 공양왕을 폐하고[3] 왕위가 양위되어, 고려는 사실상 멸망하였다. 이후 7월 11일강원도 원주로 유배되었다가, 8월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돼 강원도 간성으로 쫓겨났다.[2]

폐위 후

공양왕은 강원도 간성에 머무르다가 1394년(태조 3년) 3월 14일강원도 삼척 궁촌리로 유배지가 옮겨졌다.[2] 4월 17일 궁촌리 마을입구 고갯길에 있는 고돌산의 살해재[4]에서 아들인 폐세자 왕석(王奭)과 함께 처형되었다[5]. 1416년 태종공양왕(恭讓王)으로 추봉을 하고, 사신을 보내 그의 능에 제사를 지내었다[6].

두 개의 능묘

공양왕의 능으로 전하는 묘소는 두 개가 있다. 공양왕의 능은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와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7] 두 곳에 있다. 삼척 묘는 처음 묻힌 곳이고, 고양에 위치한 묘는 조선 왕실에서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 불러 올린 뒤에 묻은 곳으로 추정된다.[2]

현재는 왕비인 순비 노씨(順妃 盧氏)와 합장되어 있으며 조선 태조의 즉위 3년만인 1394년고릉(高陵)의 능호가 붙여졌다.

가족 관계

공양왕이 등장하는 작품

출처

  1. 신종 - 양양공 서 - 시안공 인 - 서원후 영 - 익양공 분 - 순화후 유 - 정원부원군 균 - 고려 공양왕
  2. 2.0 2.1 2.2 2.3 쫓겨난 공양왕 위해 삶 바치다 - [‘杜門不出’두문동 72賢을 찾아서⑫|강릉(양근) 함씨와 함부열] , 동아일보 신동아 2006년 518 호
  3.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1년 “侍中裵克廉等白王大妃曰: “今王昏暗, 君道已失, 人心已去, 不可爲社稷生靈主, 請廢之。” 遂奉妃敎廢恭讓。”(시중 배극렴 등이 왕대비(王大妃)에게 아뢰었다. “지금 왕이 혼암(昏暗)하여 임금의 도리는 이미 없어지고 인심도 이미 떠나갔으므로, 사직과 생민(生民)의 주(主)가 될 수 없으니 그를 폐위하기를 청합니다.” 마침내 왕대비의 교지를 받들어 공양왕을 폐위하였다.)
  4. 일부 지도에는 사래재, 살해치로 나온다
  5. 함씨 집안 야사에는 간성왕의 최후가 좀더 상세하게 전해오고 있다. 1394년 3월에 함부열은 삼척으로 두 번째 유배되는 간성왕의 뒤를 따랐다. 내려간 지 한 달 만에 간성왕을 살해하러 중앙에서 관리가 내려왔다. 역사 기록에는 중추부사 정남진이 내려왔다는데, 함씨 집안에 전해오는 얘기로는 함부열의 형 형조의랑 함부림도 동행했다고 한다. 함부열은 마주친 형에게 간청하여 다른 왕족의 시신만 거두게 하고 간성왕을 간성으로 피신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정남진과 함부림은 도저히 조정의 뜻을 거역할 수 없어서 간성으로 자객을 보내 간성왕을 살해해버렸다. 그게 공양왕 삼척 사망일인 4월17일에서 8일이 더 지난, 4월25일의 일이라는 것이다. 살해된 간성왕은 금수리 수타사에서 가까운 고성산 기슭에 묻혔다고 한다. 매장을 주도한 사람은 함부열이다. 함부열은 유언으로 간성왕 밑에 자신을 묻고, 자신의 묘에 제사 지내기 전에 왕 무덤에 축문 없는 제사를 지내라고 했다.
  6.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권제32, 태종 16년(1416년) 8월 5일(갑자)
  7. 당시는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원당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