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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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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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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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1963년 1월 31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학력예일초등학교 서울여자중학교 중앙여자고등학교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영어영문학과 (졸업)
직업소설가, 작가, 언론인
종교천주교 (세례명: 마리아)
가족위기철, 오병철, 이해영 (자녀) [1]
상훈가톨릭 문학상, 앰네스티 언론 특별상 이상문학상 대상
정보 수정

공지영대한민국소설가, 작가, 언론인이다.

작가

1984년 공지영은 시인으로 등장했으나 시가 너무 어려워 소설을 택해, 1988년에 창작과비평 가을호에 <동트는 새벽>을 내놓아 소설가로 등단했다.[2][3]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80~90만부가 팔렸고 비슷한 시기 내놓은 <고등어>, <인간에 대한 예의>도 함께 베스트 셀러에 오르면서 더 많은 인지도를 얻었다.[4]

집필 스타일

제목을 정해야 창작을 시작하며, 작품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를 머릿속에 자막을 곁들인 영상으로 거의 전부 그린 후에갸 글쓰기를 하고,[5] 몰입하면서 쓰는 스타일이라 쓰기 시작하면 밖에도 잘 안 나간다고 한다.[5] 산문은 쓰기가 수월하다고 한다.[5]

공백기

공지영은 <봉순이 언니>를 끝으로 7년동안 작품을 내놓지 않았다. 공지영은 "힘든 시기에 막내도 태어났고 이혼도 하면서 인생을 망쳤다. 돌이킬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작품을 쓰지 않았다"고 말했다.[6] 그러나 경제적 사정으로 인해 7년만에 펜을 잡아야 했고, 문장이 머릿속에서 나오지가 많아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7] 전에는 단편을 쓰는데 보름정도 걸렸으나 복귀 후에는 6개월이 걸릴 정도로 힘들게 글쓰기를 시작했으나 아이들을 생각하며 글을 쓴 결과 차츰 이전의 페이스를 다시 유지했다.[7] 공지영은 그 공포가 심해 앞으로는 펜을 놓지 않겠다고 다짐했다.[7][주 1]

생애

학업과 문학

반에서 1등도 하는 등 학업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었던 공지영은 선생님에게도 사랑 받았다.[8] 책 읽기를 좋아해 초등학교 3학년부터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학교 백일장 대표를 하였다.[5] 초등학교 3학년때는 MBC가 주최한 '어머니'를 주제로 한 글쓰기 대회에서 차상을 수상하고 상금 3만원을 받았고,[9][주 2] 중학생 때는 노트 두 권에 시와 소설을 쓰고 그림을 그려 자신의 문집을 만들기도 했다.[5]

공지영 자신은 나름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하며 학창시절을 보냈다고 생각했으나, 나중에 생각해 보면 모범적인 학창시절을 보낸 것을 뒤늦게 알았다고 한다.[11] 공지영은 학창시절 가장 큰 일탈로 "언니 코트를 입고 대학 도서관에 가서 공부하다가 커피숍을 가서 커피 마시다가 집에온게 가장 큰 일탈이었다"고 고백했다.[11] 당시 고등학생이 커피숍에 가면 정학이었기 때문이다.[11]

경제 사정과 가치관

공지영은 유년기 및 청소년기를 제법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며 지냈다.[주 3] 그러나 용돈을 많이 받는 편은 아니었으며 친구들은 경제 상황에 따라 여러 무리로 나뉘어 있던 친구들 사이에서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 했다.[8][주 4] 대학교를 다닐 때는 선배들이 곱게 자라온 공지영에게 싫은 내색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15][주 5] 결혼 후에는 계속해서 돈이 부족했으나 공지영은 가난이 큰 동력이었다고 말했다.[16]

공지영은 서른살이 되어서야 기형도 시인의 책을 보면서 가난의 문제를 알게 됐다.[17] 자신은 먹고 싶은대로 먹고 자랐는데, 친구들은 가난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에 미안함을 느끼기도 했다.[17] 자신의 노력을 통해 얻은 부유한 가정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신이 받은 것을 사회에 돌려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책을 쓸때도 미안함을 갖고 쓰게 되었다.[18] 공지영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 시절에는 자신이 돈이 있는 것 자체가 부끄러웠던 시절이었다고 말했다.[18] 2007년 인터뷰에는 이제 부에 대한 죄의식을 털어내어 죄책감은 없다고 하였다.[2]

학생 운동

공지영은 고3 대입시험 직전까지도 성당에서 가톨릭 포콜라레 운동(Focolare Movement)에 참가하여 일요일이면 하루 종일 성당과 빈민촌에서 보내며 가난한 이들을 만났다고 한다.[19] "예전에는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 막시즘이 이미 그 봉사활동 안에 녹아 있었다. 그래서 요즘은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게 뭐냐는 질문을 받으면 그 활동을 얘기한다"고 말했다.[19] 또 공지영이 대학 생활을 하던 시절은 독재 정권이 집권하고 있었고 대학생들은 민주화 운동을 격렬하게 하였다.[19] 1981학번, 386 세대의 첫 세대로 민주화 열기가 가득했던 시대에 대학교를 다닌 공지영은 문학회에서 기형도 시인과, 성석제 소설가를 만나기도 했다.[16][20] 1987년에는 대선 당시 구로구청 부정 개표 반대 시위에 갔다가 시위를 진압하러 온 경찰에 붙잡혀 1주일간 구치소에 수감됐다.[18] 공지영은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면서 아버지와 이념 갈등을 겪기도 했다.[18]

공지영 자신의 성향과 동료 대학생들이 가졌던 신념은 공지영의 작품에 자연스레 반영됐다.[18] 그러나 2006년 인터뷰에서 공지영은 20년동안 한국 사회가 격변하였다며 자신의 (운동권) 경력도 없다고 말하고 싶고, 앞으로 자신의 소설의 화두는 경쾌와 발랄 그리고 희망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였다.[21]

페미니즘과 공지영

공지영은 스스로 남녀차별이 심한 집에서 자랐다고 생각했고, 삼계탕을 하면 오빠와 아버지는 다리를 주고 언니랑 난 날개를 준 일로 엄청 싸웠으며, 닭 한 마리만 더 샀어도 페미니스트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2]

소설가로서 이름을 떨친 공지영은 곧 여성들의 지지를 받아 페미니스트의 대표적인 인물이 됐다.[10][22] 다만 전성기 때 공지영은 이러한 관심이 부담스러웠고 페미니스트 진영에서 과격한 운동을 같이 하자고 했었으나 거절했다고 한다.[10][22]

사회 활동

대학교 졸업 후 <한국작가회의>의 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자실)> 상근 간사로 취직했다.[2] 당시 <자실>을 드나들었던 문인들은 공지영을 담배 많이 피우고 늘 인상 찌푸렸던 삐딱한 시인으로 기억했다.[23]

취미

중학교 시절에 고등학교 야구부에서 활약하던 야구 선수 최동원을 좋아했다.[11] 그러나 같은 학생에게 사인을 받는다는 게 자존심이 상했던 공지영은 최동원에게 "나중에 내가 사인을 해주겠다"라며 자신감을 보이기도 했다.[11]

가족과 결혼, 연애관

공지영은 큰 언니, 오빠, 작은 언니의 1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12][출처 필요]

?년 결혼하여 1988년 첫 딸을 낳았고 ?년 이혼하였다.[24] 1993년 두 번째 남편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고 1995년에 이혼하였으며 이 때 남편은 폭력적이었다고 한다.[13] 두 번째 이혼 이후에는 딸을 데리고 엄마 집에 방 한 칸을 얻어 살았고 1996년 자살을 결심하기도 하였다.[13][25] 1997년 독일 유학 중 만난 세 번째 남편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고 2004년 이혼하였다.[25]

공지영은 결혼생활 내내 한국의 결혼제도[주 6]에 경악하게 되었고,[13] 남편에게도 거의 묶여 살아 귀가시간을 계속 체크당하고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는지 꼭 얘기해야 했다고 하며 세 번째 결혼 때는 7년 동안 저녁 약속 한번 못잡고 거의 아무데도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13] 결혼을 계속 한 것은 연애하는 남자들이 결혼하자고 해서라고 하며[13] 결혼제도 속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대신 좋은 남자가 있으면 나란히 옆집에 살면 좋을 것 같다고 하였고[25] 나중에 결혼과 연결되지 않은 연애도 하였다.[13]

소설 <즐거운 나의 집>에서 나온 공지영의 아이들 이름들은 별명이지만 차례로 위위녕, 둥빈, 제제이다.[26][10] 셋은 성씨가 각각 다 다르지만 어느날 하나로 합치기 위해 가족회의를 했더니 왜 이제 와서 바꾸냐고, 혹은 공씨는 싫다고 그래서 계속 그대로라고 한다.[21]

신앙 생활

공지영은 가톨릭 신자이며 영세명은 마리아이다.[21]

주거

공지영은 1963년 서울특별시 마포구 아현동[주 7]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2] 첫 번째 결혼 후에는 교외의 작은 주공 아파트에서 딸을 키우며 생활했다. 한동안 10평, 원당읍에 15평 주공아파트 살고 전셋집을 옮겨 다니고 혜화동 천에 십만원 짜리, 삼선교 2500짜리 반지하, 수유리 3천짜리 2층집도 살았다.[2] 수유리 극동아파트 고층에 전세를 살았을 때도 있고,[2] 97년 분양가가 낮을 때는 처음으로 내집마련을 했다.[2]

평가

긍정적 평가

실천적인 1960년대생 작가라는 평가가 있다. 이는 공지영은 행동적이고 실천적인 작가로서 사회문제에 직접적인 발언을 하는 우리 세대가 꼭 필요로 하는 소중한 작가라는 입장이다.[16]

여성 문제를 다룬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가 여성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공지영은 페미니스트의 대표처럼 인식이 되었고 공지영은 이러한 관심이 부담스러웠다. 페미니스트 단체에서 행동을 같이 하자며 연락이 쇄도하기도 했으나 공지영은 이러한 요청에 거절 의사를 표했다.[22]

공지영을 인터뷰한 <괜찮다, 다 괜찮다>의 저자 지승호는 "공지영은 마초가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 드물게 성공한 여성이다"라고 평했다.[27] 소설가 박완서는 "공지영의 소설이나 산문은 평론가의 도움 없이도 뭔 소린지 알아먹게 하는 문장이다. 사생활에 대해 내숭 떨지 않는 정직성이 있다"라고 평했다.[28]

1994년에 <고등어>, <인간에 대한 예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등 세 권이 동시에 베스트셀러 10위권에 올랐고 '공지영 신드롬'이라는 용어가 생겨나기도 했다.[29] 이후 자전적 성장 소설 <봉순이 언니>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7년 간의 공백기를 가진 후에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집필했는데, 이 소설은 사형제 존폐 문제를 다룬 것으로서 소설로도 많이 읽혔지만 영화로도 제작되어 400만 명의 관객이 들었다.[16]

자신의 경험담을 모티브로 삼아 자신의 가족을 모델로 <즐거운 나의 집>를 집필하였다.[16] 이 소설에는 자신의 사생활도 일부 반영하여 당당하게 공개하였는데, 이는 젊은 여성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아 '닮고 싶은 여성 4위'에 오르기도 했다.[16] 2009년 <도가니>를 출간하였고 이 소설은 실화를 바탕으로 장애인 학교의 비리를 다루어 많은 주목을 받았고 2011년 영화로 제작되어 약 400만 명의 관객이 들었다.[16]

2011년 1월 7일, 문학사상이 주관하는 이상문학상 심사위원회는 공지영이 <맨발로 글목을 돌다>에서 이루어낸 소설적 성과를 높이 평가하여 이 작품을 2011년도 제 35회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으로 선정하였다.[30] 이 작품은 공지영이 5년 만에 내놓은 단편 소설로 월간 '문학사상' 2010년 12월호를 통해 발표됐다.[30] 북한 납치범, 위안부 경험자, 아우슈비츠 수용자 등 서로 다른 시공간 속에 존재하는 인물들이 역사적 폭력을 견디며 살아가는 과정을 그렸다.[30]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문학평론가 권영민 서울대 교수는 이 작품에 대해 "개인에 대한 폭력이라는 주제를 진지하게 탐색하는 과정에서 독특한 구성법과 작품 세계를 드러낸다"라고 평했다.[30]

1988년 작가 데뷔 이래 2011년까지 작품은 총 900만 부가 팔렸다.[16]

2011년 12월 22일, 인터파크가 주최한 <제 6회 2011 최고의 책> 시상식에서 공지영은 득표율 39.7%를 기록해 '2011 최고의 작가' 부문에 선정됐다.[31]

부정적 평가

문장력이 취약하고 글이 세속적이라는 평가가 있다.[16]

계간 '문학수첩' 특집 <여성 문학을 묻다>에서 평론가 정문순은 공지영의 작품에 대해 "운동권 경력을 활자로 남기고 싶어하는 욕망이 이면에 깔려 있다는 의혹을 떨치기 힘들다"고 평가했다.[32]

정문순을 비롯한 공지영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평론가들은 "공지영은 조숙한 여자 아이 수준의 인식에 머무르는 여성 작가이다.[33] 공지영의 소설은 대부분은 그 내용이 과거에 들러붙어 있고 자의식의 과잉이라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라고 평가했다.[33]

'의자놀이' 논란

공지영의 르포르타주 신간 '의자놀이'에서 시민운동가 하종강 교수의 글을 인용하였는데, 인용한 해당 부분이 르포작가 이선옥의 글을 인용한 부분으로 알려짐에 따라 편집후 새로 찍겠다는 입장을 밝혔다.[34][35] 이 과정에서 찍어놓은 책을 회수후 폐기하라고 요구한 것에 대해 공지영의 트위터에서 하종강 교수를 원색적으로 비난한 문제로 인해 논란이 일었다.[36] 이 논란과 별도로 공지영과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시민, 출판사 휴머니스트가 재능 기부 프로젝트로 출판한 의자놀이의 총 기부액이 2014년 2월 현재 3억 7천여만원이다. 여기에는 공지영의 인세, 출판사 판매 수익금, '의자놀이' 계좌 모금액 등이 포함된다.[37]

사회적 발언에 대한 논란

종합편성채널에 대한 반대입장

2011년 12월 1일, JTBC, TV조선, 채널A, MBN 등 종합편성채널 4개사가 방송을 시작했다. 전국언론노동조합은 이와 관련해 ‘조중동 방송 특혜 반대’를 주장하며 총파업에 들어가는 등 강하게 반발했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공지영도 트위터를 통해 종합편성채널의 개국에 대해 반감을 표현했다.[38][39][40]

공지영은 "TV채널을 돌리다 보니 종편개국 축하쇼에 인순이가 나와 노래를 부른다. 우리 사회가, 우리 모두의 노력이 유명 연예인들에게 개념 연예인이 되어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약간의 무리로 다가온다"라는 한 트위터러의 말에 "인순이님 개념 없는 거죠 머"라고 멘션을 달았고, "김연아가 그냥 인터뷰가 아니라 TV조선 9뉴스 프로그램을 하나하나 소개한다"라는 한 트위터러의 말에 "연아, 아줌마가 너 참 예뻐했는데 네가 성년이니 네 의견을 표현하는 게 맞다, 연아 근데 안녕"이라는 멘션을 달았다.[41]

이 발언으로 인해 공지영은 네티즌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네티즌들은 공지영 또한 중앙일보나 동아일보에 소설을 연재한 적이 있다고 지적하였고 이에 공지영은 "나 욕참고 말할게 비슷 알바 다 꺼져라 응? 노무현 때였다"라고 트위터에 올리기도 했다.[42][43] 중 이에 대해 중앙일보는 논설위원의 칼럼을 통해서 "그녀의 언론활동을 보면 그녀는 '중앙일보의 친구'였으며, 중앙일보는 '노무현 정권의 가혹한 비판자'였다."라는 표현을 쓴바 있다.[44]

2011년 12월 2일, 공지영은 자신의 발언과 관련한 논란을 정리하고자 트위터에 "내 딸이 거기 나갔어도 똑같이 이야기했을 것이다. 내가 내 사설 의견 공간인 SNS에 내 후배와 인순이를 이야기하면서 그녀(인순이)가 그렇게 노래하는 건 개념 없는 거니 너무 슬퍼마, 한 취지였고 연아는 아줌마와 의견이 다르니 내가 슬프다 하는 거였다. 나는 오늘 반성을 깊이 했다. 내가 당신들의 공격성을 이토록 이끌어낸 것을. 하루 종일 힘들었다. 두려워서는 아니다. 슬퍼서였다"라고 글을 남겼다.[41]

교정위원 탈락에 대한 논란

법무부의 교정위원은 구치소와 교도소의 수형자 교화 활동에 참여하는 무보수의 민간 자원 봉사자들을 말한다. 이들이 접하는 만남의 대상에는 사형수들도 포함된다. 공지영은 2003년 장편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집필을 준비하며 사형수들과 만났으며 13년 동안 이 만남이 이어졌다. 하지만 2015년 봄에 이어, 가을에도 법무부 교정위원 재위촉에서 탈락하였고, 공지영이 속한 천주교의 봉사단체인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정사목위원회를 통해 최종 통보를 받았다. 이에 대해 공지영의 '정치적 성향’ 때문에 법무부 교정위원에 재위촉되지 못했다는 소식이 흘러나왔고,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하여 “죽이려고 번호(를) 매겨 놓은 사람들(사형수들에게) 내 정치성향이 뭐든 무슨 상관이란 말일까?”라며 분통을 터뜨리며, 봉사활동을 하는데에도 “본래 제게 있지도 않은 ‘사상검열’을 당하는 기분”이라고 토로하였다. [45][46]

작품

약력

상훈

방송 출연

공지영이 출연한 2002년 MBC 의 .
  • 2002년 1월 12일: <느낌표> <책을 읽읍시다>[52]
  • 2011년 3월 4일 - <MBC 스페셜> <지리산에서 행복을 배우다>: 내래이션[16]
  • 2011년 2월 9일 - MBC <황금어장> <무릎팍도사>: 게스트[10]
  • 2006년 - CBS <아주 특별한 인터뷰>: 진행[16]

기타

  • 위기철(1985년 결혼~ 1991년 이혼), 오병철(1993년 결혼~ 1995년 이혼), 이해영(1997년 결혼~ 2004년 이혼) 등과 결혼했고 이혼했다.[16]
  • 공지영은 운동권 학생으로서 활동하면서도 연애를 하였고 첫사랑과 첫 번째 결혼을 하였다.[22] 이 결혼에 대해 공지영의 아버지는 반대했으나 공지영은 "아버지와 같은 부르주아가 좋아하는 사람과는 결혼할 수 없다"라고 말하며 이 결혼을 강행했다.[53]
  •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첫 번째 이혼 후 쓴 첫 작품인데, 언론에서는 작품보다 공지영의 이혼 소식에 더 관심을 보였다.[54]
  • 공지영은 베스트셀러 작가였지만, 이혼 등의 경험과 특유의 가치관으로 부를 이루지는 못했다. 세 번째 이혼을 한 이후에 처음으로 저축을 시작했다.[55] 2003년 공지영은 친구들 30명 정도가 있는 지리산에 내려갔었다. 친구들은 대부분 집이 없다. 그곳에서 가장 부자인 친구가 연 70만 원을 지불하는 집에서 살고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빚도 없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었다.[10] 한때는 화전을 부쳐먹기로 해 공지영이 새벽 6시 반에 출발해 약속 시간인 11시쯤에 그 집에 도착해보니 다들 자고 있는 것이었다. 친구들은 시간 개념이 전혀 없었고 알고보니 집에 시계가 없다는 점을 눈치챘다. 그 친구들은 게으른 배짱이들처럼 여유롭게 지내며 넉넉하지도 못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공지영도 나중에 그곳에 내려가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다. 공지영은 나중에 자신이 인생을 실패하고 아무것도 없이 와도 받아줄 수 있는 곳이 있다는 사실에 나름대로 위안을 갖게 되었다.[56]
  • 공지영은 7년 간의 공백 끝에 복귀했는데, 이는 아이들의 학비 등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7]
  •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베스트셀러가 된 후 유력 일간지와 인터뷰를 가졌다.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기자가 공지영에게 "국장이 바뀌어서 특집을 하려는데, '공지영 인터뷰를 하고 와라'라는 지시를 받았다"라고 말했고, 공지영은 자신을 알아봐준다는 생각에 기쁜 마음으로 인터뷰 장소로 나갔다. 그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성이 다른 아이 셋을 키우고 있다"는 말을 하였다. 자신의 이 발언에 대해 별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다음 날 신문 가판대에서 신문 1면에 '아이 셋, 이혼 셋'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이야기가 기사로 나간 것을 보고 놀랐다. 하지만 공지영은 '이런 것들 때문에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할까봐 걱정했지만 오히려 통쾌하다'라는 생각도 가졌다. 이혼에 대해 공지영의 아버지는 공지영에게 "네가 세 번 이혼하는 것은 싫지만, 네가 불행해지는 것은 더 싫다"라며 공지영을 걱정해줬고 이 말은 용기를 내는 데 도움이 되었다. 소설가의 이미지가 중요했던 시기여서 공지영은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으나 "소설가 못하면 어떤가, 내 인생이 그것뿐은 아니다"라며 스스로를 위로했고, 위대한 소설가보단 인생의 승리자가 되기로 마음 먹었다. 한편, 공지영은 이 기사로 인해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비난을 할 것을 우려하였으나, 사람들은 공지영이 아픔을 뚫고 나온 것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57]
  • 묘비명을 미리 써 놓았다고 한다. "나 열렬하게 사랑했고 열렬하게 상처 받았고 열렬하게 좌절했고 열렬하게 슬퍼했으나, 모든 것을 열렬한 삶으로 받아들였다-."[21]
  • 좋아하는 인물은 세종대왕, 싫어하는 인물은 박정희전두환이다.[21]
  • 이메일은 gsmaria로 시작하는데, 신(神)의 마리아라는 뜻이라고 한다.[21]
  • 주종은 소주, 주량은 그냥 졸릴 때까지.[21]
  • 공지영 신드롬을 분석하는 평론이 나왔을 때 "대중의 지지만을 얻기 위한 글을 쓴다", "얼굴로 책을 판다"는 등의 혹평이 동료들에게서까지 나오자 공지영은 충격을 받고 정신과 치료를 받으러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6]
  • 공지영은 소설을 쓰면서 5개월정도 사형수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인생이 바뀌었다고 고백했다.[7] 공지영은 사형수를 처음 만나자마자 눈물을 마구 흘렸다. 그 눈물은 3년간 이어졌는데 그러한 눈물을 본 사형수가 마음을 서서히 열기 시작했다.[16] 밥을 먹었느냐고 묻는 사소한 질문에서부터 시작된 교감으로 인해 사형수들이 변해가는 것을 보면서 이전까지 공지영이 품어왔던 인간에 대한 불신을 내려놓고 인간에 대한 신뢰가 싹트기 시작해 지금까지도 사형수들과의 우정을 이어가고 있다.[16]
  •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베스트셀러가 된 후 유력 일간지에 인터뷰가 실리게 됐다.[57]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기자가 "국장이 바뀌어서 특집을 하려는데 공지영 인터뷰를 하고와라"는 지시가 내려져 공지영은 자신을 알아봐준다는 생각에 기쁜 마음으로 인터뷰를 나갔다.[57] 그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성이 다른 아이 셋을 키우고 있다"며 고백했다.[57] 별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으나 다음날 신문 가판대에서 1면에 '아이 셋, 이혼 셋'이라는 제목으로 나간것을 보며 놀랐으나 한편으로는 '이런것들 때문에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할까봐 걱정했지만 오히려 통쾌하다'는 생각도 가졌다.[57] 아버지는 공지영에게 전화해 "네가 세번 이혼하는 것은 싫지만, 네가 불행해지는 것은 더 싫다"라며 공지영을 걱정해줬고 많은 용기가 됐다.[57] 소설가의 이미지가 중요했던 시기 공지영은 좌절했으나 "소설가 못하면 어떤가, 내 인생이 그것뿐은 아니다"라며 스스로 위안을 얻고 위대한 소설가보단 인생의 승리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57] 기사가 나간 후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을것을 우려하였으나 아픔을 뚫고 나온 것에 대해 사람들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내왔고 수많은 안티들도 사라졌다. 아이들에게도 솔직하게 알려줬다.[57]
  • 트위터를 시작하면서 표절 소란 등으로 심신이 약해진 시기도 있었지만 20일만에 복귀했다.[3]
  • 공자 78대손이라고 한다.[2]

링크

부연 설명

  1. 이 때 쓴 작품이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다.
  2. 이 때 입상한 글은, 집에서 여름마다 닭 백숙을 하는데 다리를 아버지와 오빠에게 하나씩 주고 날개는 자신과 언니가 먹고 어머니는 껍질 이런 걸 먹었는데, 다리를 왜 오빠를 주는지, 엄마랑 아빠가 먹든지, 아니면 순서대로 하려면 엄마랑 언니를 주든지(언니가 오빠보다 위여서) 하는 의구심이 있었어서, 이에 대해 '우리 엄만 나쁘다' 식으로 시작해서 쓴 글이라고 한다.[10]
  3. 예를 들어 아버지는 국비 유학생으로 미국에 유학을 다녀 온 적이 있으며, 차와 기사가 있을 정도로 부유한 집안이었고 주 5일제를 시행하는 외국계 회사에서 근무하였고,[12][13] 한번은 1969년에 아버지가 일본으로 출장을 가게 됐는데 시골에 있는 친척들까지 김포공항으로 올라와 환송을 하며 단체 사진을 찍고 잔치를 벌이기도 했다.[14] 아버지가 유학을 갔다오면서 공지영을 위해 핑크색 바바리와 키티 필통, 롤러스케이트까지 고가의 선물을 받으며 친구들 사이에서 주목을 받은 일도 있다.[14]
  4. 잘 사는 친구들은 초등학생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갑에 지폐가 가득했고, 가까운 거리도 꼭 택시를 타고 다녔다.[8] 그에 반해 다른 친구들은 풀빵조차 사먹을 돈이 없었다.[8]
  5. 공지영은 당시 학생 식당에서 밥먹을 돈이 없는 친구들이 많았다고 회상했다.
  6. "명절 때 나는 전을 부치는데 왜 저 사람들은 고스톱을 치지? 내가 열 달간 술 담배도 못하고 애를 낳았는데 왜 남편 성을 붙여야 하는데? 나보고 모성애가 없다고 하는데 진짜 없는 걸 어쩌라고?"[13]
  7. 자전적 소설인 <봉순이 언니>의 배경이기도 하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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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5. 공지영 정신과 치료 고백…"외모로 책 판다? 정말 예뻤다" tv리포트 2011년 7월
  56. 공지영 “걱정의 90% 오지도 않을 날에 대한 것”고백 뉴스엔 2011년 7월
  57. 57.0 57.1 57.2 57.3 57.4 57.5 57.6 57.7 공지영 “세번의 이혼경력 밝혀져 통쾌” 눈물고백 tv리포트 2011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