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학생운동

최근 편집: 2023년 8월 17일 (목) 12:31

배경[1]

3.1운동 이후 1920년대부터 전국 각처 수 없이 많은 학교에서 항일 운동이 계속되어 왔다. 표면상으로는 일인 교사 혹은 일인 교장의 배척, 식민 노예 교육인 차별 제도 철폐 등을 내세운 맹휴였으나 본질은 항일 투쟁이었다. 그 운동의 배후에는 반드시 비밀 조직이 있어 학생들을 지도했다.

부수적으로는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중학교(일본인 학교)는 1924년 있었던 야구 시합에서부터 깊은 골이 파여 있었다. 안동이라는 일인 심판이 편파적인 심판을 함으로써, 항의한 광주고보생이 심판을 구타하고 맹휴를 한 바 있으며, 이 과정에서 몇몇 학생이 퇴학을 당했다.

1926년 사회주의 물결을 타고 농민 운동, 노동 운동이 구체성을 띔과 동시 광주고등보통학교를 중심으로 광주농업학교 학생이 성진회를 조직하였으며, 1927년에는 학교 시설의 확장을 요구하며 동맹휴업을 했다.

1928년 광주, 송정리 등지에 뿌려진 격문으로 광주고보 5학년이던 이경채가 조선 농민 총동맹의 간부, 성진회 관련자들과 함께 피검됨으로써 광주고보의 시라이 교장이 당국에 사과함과 동시 이경채의 부친을 불러 이경채를 권고 퇴학시킨 사건이 터졌다. 처음에는 이경채의 동급인 5학년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이경채 권고 퇴학의 이유를 명시하라'고 학교 당국에 요구했고, 나아가 27년 동맹휴업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것, 교장 시라이가 광주고보의 경비를 광주중학교에 양도한 것, 학교 도서실에 조선어 서적과 신문이 없다는 것을 들어 일인 교장, 교사의 배척과 조선인 본위의 교육을 내세우며 조직적인 맹휴 투쟁을 6월부터 시작했다. 학교측은 퇴학, 정학으로 응징하며 양보하지 아니했고, 학생들은 맹휴 중앙 본부의 지휘 아래 보다 격렬하고 과감하게 맞섰다. 그러나, 학부형, 동창들이 동원되면서 일부가 온건파로 갈라섰고, 학교의 처벌 강화, 철저한 탄압으로 일부가 맹휴를 배신하자 다른 학생들이 이들을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구타사건은 경찰이 개입함으로써 재판에 회부되었고, 10월에는 16 명의 학생이 구속되어 실형을 받고, 54 명이 퇴학되어 일단락되었다.

발단

1929년 10월 30일 오후 5시반경 광주발 통학열차가 나주에 도착하여 나주역에서 통학생들이 집찰구로 걸어나올 때 일본인 학생 몇 명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3학년 학생 박기옥(朴己玉). 이금자(李錦子). 이광춘(李光春) 등의 댕기 머리를 잡아당기면서 모욕적인 발언과 조롱을 하였다. 그때 역에서 같이 걸어나오고 있던 박기옥의 4촌 남동생이며 광주고등보통학교 2학년생인 박준채(朴準埰) 등이 격분하여 이들과 충돌하였다. 그때 출동한 역전 파출소 경찰은 일방적으로 일본인 학생을 편들며 박준채를 구타하였다. 이에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인 최희선(崔熙善). 김보섭(金普燮) 등 10여 명이 박준채와 합세하여 한·일학생간의 대결이 계속되었으나 더이상의 큰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날인 11월 1일 통학생도 아닌 일본인 중학 5학년 학생 4, 5명이 광주고등보통학교의 정세면(鄭世勉)에게 도전해 옴으로써 한·일학생간의 충돌 사건이 다시 일어났다. 양교의 교사들이 충돌 사건을 수습하기 위하여 현장에 왔으나 일본인 중학교 교사들은 중학생들을 오히려 선동하였으며, 교사끼리의 교섭도 일본인 중학교 교사들의 교만한 방언으로 옥신각신하다가 간신히 동시 퇴각을 결정하였다.

11월 2일 하학 열차에는 양교 교사와 경찰이 동행하였으며, 아침에는 전라남도 지사가 양교 교장에게 통학생들에 대한 엄중한 감독을 지시한 바 있어 조용히 사건이 마무리되는 듯 했다.

다음날인 11월 3일은 일본으로서는 일왕 메이지의 생일인 메이지절[明治節]이었고, 우리 민족으로서는 마침 음력 10월 3일로 개천절이었으며, 광주 학생들의 독서회원들에게는 전신인 성진회 창립 3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오전 11시경 우편국 앞에서 신사 참배를 하고 돌아오던 16명의 광주중학교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고등보통학교의 최쌍현(崔雙鉉) 등이 충돌하여 최쌍현이 광주중학교 학생의 단도에 찔려 코와 안면에 부상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소식을 전해들은 주변의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도주하는 일본인 학생들을 쫓아가 구타하자 일본인 중학생들은 광주역쪽으로 도망쳤다.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그들을 추격하여 계속 구타를 가했다. 그때 시찰 중인 광주경찰서원과 교사들이 제지를 하였지만, 이를 뿌리치고 역 구내로 도망친 광주중학 학생들을 개찰구를 뛰어넘어 닥치는 대로 때려 눕혔다.

급보를 전해들은 광주중학 기숙사생 백수십명은 목도(木刀)와 단도 등을 들고 유도교사를 선두로 '고보생타도'를 외치면서 충돌 현장으로 달려왔다. 또한, 광주고등보통학교 기숙사생들과 시내의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농업학교 학생들도 이 소식을 듣고 야구배트 등을 들고 역 앞으로 몰려왔다. 이들은 중학교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성저리 십자로 부근의 작은 흙다리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였다. 그러나 학생 외의 당사자들의 교섭으로 동시 퇴각이 결정되었다. 오전중에 한·일학생 가두 투쟁으로 발생한 부상자는 광주중학교측은 16명, 광주고등보통학교측은 10명이었다.

학교로 돌아온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노병주의 사회로 집회를 열어 가두시위 투쟁을 결행하기로 하고 김병기(金炳基)·강윤석(康潤錫)·김용대(金容大)·김상환(金相奐) 등의 지휘로 목봉과 검도 도구 등으로 무장, 시가전을 각오하고 오후 1시 대오를 정비하여 300여명의 학생들이 교문을 박차고 나섰다. 김향남·김보섭·김상섭(金相燮)·강윤석·김무삼(金戊三) 등이 선두에 서고,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과 광주농업학교 학생 일부가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운동가를 고창하며 행진해 나갔다. 원래 광주 학생들의 가두 행동대는 충장로를 거쳐 광주역을 돌아 광주중학교를 습격할 계획이었으나, 경찰이 소방대·재향군인까지 동원하여 필사적으로 방어를 하였다. 때문에 진로를 바꾸어 일본인 소학교(지금의 중앙초등학교)를 돌아 광주중학교로 다시 진공해 들어가려고 했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가두 행동대가 충장로와 우체국을 거쳐 도청 옆의 상품진열관부근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 있던 광주사범학교 학생 100여 명의 호응을 받았다. 또, 메이지절 기념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 일부가 행동대에 가담하였다. 광주 학생들의 호응 속에 숫자가 불어난 가두 행동대는 도립병원 앞으로 나와 다시 광주중학교 습격을 시도했으나 경찰·소방대 등의 완강한 방어에 부딪히게 되었다. 행동대는 계속 함성을 지르고 일전불사의 기세로 시위를 했으며, 연도의 군중은 이들의 결연한 항쟁을 지지, 성원하였고, 일본인 상인들은 폐점 상태에 들어갔다. 행동대는 가두에서 강력한 제지와 해산명령 등을 아랑곳하지 않고 금동을 지나 광주고등보통학교로 돌아왔다. 광주농업학교·광주사범학교 학생들은 교문에서 해산하고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강당에 집결하여 김향남·오쾌일(吳快一)·정명섭(丁明燮) 등이 차례로 등단하여 '부상자 문제'와 '금후의 연락 방법' 등을 결의하고 대오를 지어 귀가하였다. 이날 박상기(朴相琦)와 최상을(崔相乙) 등 30여명은 광주역에서 일본인 순사와 역원을 구타하였고, 일본인 중학생 12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1. 박, 경리. 〈10권(4부 1권)〉. 《토지》. 지식산업사. 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