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1907년, 국채를 상환하여 대한제국의 국권을 회복하자는 취지에서 전개된 운동.
일제가 1904년부터 고문정치를 시작하고 대한제국이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여, 1907년 2월을 기준으로 대한제국의 총 외채는 1,300만원이었다. 당시의 국가 재정으로는 도저히 상환할 수 없는 금액이었기에, 1907년 1월 29일 경북 대구의 광문사에서 서상돈이 "우리 2천만 동포가 담배를 석 달만 끊고 그 대금으로 국채를 보상하자"고 제의함으로써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었다.
참여기록
- 김광제, 서상돈 등이 1907년 2월에 <국채보상 취지문>을 작성하여 배포.
- 김성희, 유문상 등이 서울에 국채보상기성회 설치.
- 1907년 2월 23일, 대구의 남일동 7부인이 결성한 남일패물폐지부인회가 취지문을 작성하고 패물을 내어놓음.
대구 '남일패물폐지부인회 취지서'(전문)[주 1] 경고(警告) 아(我) 부인동포라. 우리가 함께 여자의 몸으로 규문에 처하와 삼종지도(三從之道)외에 간섭할 사무가 없사오나 나라 위하는 마음과 백성된 도리에야 어찌 남녀가 다르리오. 듣사오니 국채를 갚으려고 이천만 동포들이 석달간 연초를 아니 먹고 대전(代錢)을 구취한다 하오니, 족히 사람으로 흥감케 할지요 진정에 아름다움이라. 그러하오나 부인은 물론 한다니 대저 여자는 백성이 아니며 화육중일물(化育中一物)이 아니리오. 본인 등은 여자의 소처로 일신소존(一身所存)이 다만 패물 등속이라, 태산이 흙덩이를 사양치 아니하고, 하해가 가는물을 가리지 아니하기로 적음으로 큰 것을 도우나니, 유지하신 부인동포들은 다소를 물구(物拘)하고 혈심의연(血心義捐) 하와 국채를 청장(淸帳)하심이 천만(千萬)행심(幸甚)이니라. 정미 정월 십일일(양력: 19074년 2월 23일) 발기인에 대구 동상 남일동 정운갑 모 서씨 은지환 일불 두냥중 서병규 처 정씨 은장도 일개 두냥중 정운하 처 김씨 은지환 일불 한냥구돈중 서학균 처 정씨 은지환 일불 두냥중 서석균 처 최씨 은지환 일불 한냥오돈중 서덕균 처 이씨 은지환 일불 한냥오돈중 김수원 처 배씨 은연화 일개 두냥구돈중
- 그외 국채보상운동에 동참한 여성단체: 서울의 부인감찬회,대안동국채보상부인회, 인천의 적성회, 대구의 국채보상탈환회, 부산의 좌천리부인회감선의연회, 진남포 삼화항의 패물패지부인회, 장원항의 국채보상부인회, 선천의 의성회, 안악의 국채보상탈환회, 안성의 장기동부인모집소, 남양의 위성회, 김포의 국채보상의무소, 제주도의 삼도리부인회, 서울여자교육회, 진명부인회, 대한부인회, 원일부인회, 진주애국부인회
- 1907년 4월 8일, 대한매일신보사에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를 설치하고, 한규설, 양규탁 등이 임원으로 선출되어 운영.
- 1907년 5월까지 230여만원이 모금되고, 일제 통감부가 국채보상기성회의 총무 양기탁을 보상금 횡령으로 구속.
- 국채보상금처리회는 각도 대표자회의를 통해 그동안 모금된 의연금으로 교육 사업을 하기로 결의하였고, 모금액의 일부가 민립대학 설립운동으로 넘어감.
부연 설명
- ↑ 순한글 고어체를 현대문으로 편집함.
출처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2년 12월 14일). 《6.25 전쟁 여군 참전사》. ISBN 978-89-89768-8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