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초 향신료 교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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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들어 지중해를 둘러싼 주도권이 급격하게 바뀜에 따라 중세 유럽의 향신료 교역은 일대 전환기를 맞아 더 이상 서양에 국한된 역사가 아닌, 전지구적 교역 체계로 자리잡게 된다.

1000년대 후반에 일어난 십자군 원정은 동지중해 교역 관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전지구적 물동량의 증가는 당시 유럽 단독의 힘으로는 불가능했다. 전세계적으로 보았을 때, 유럽은 중화권과 이슬람권과 비교해 문화적·경제적 수준이 떨어지는 곳이었기 때문에 교역 체계를 주도할만한 힘은 없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지정학적 변화가 묘하게 맞아떨어진 13세기 내내 유라시아의 지정학적 변화를 통해 교역체계가 바뀌게 된다. 1200년대 1095년에 시작한 십자군 원정은 유럽 이외 세계에 눈을 뜨게 물적 욕망을 터뜨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체계를 주도할 만한 힘은 없었다. 2차, 3차 원정군을 넘어가면서 이슬람권의 반격이 시작되자 4개의 십자군 왕국이 근동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1100년대~1200년대 전지구적 지정학적 형세의 변화는 이후 시대의 13세기부터 134050년대까지 교역 체계를 바꾼 중요한 1250~1350년대 전래없는 국제 교역의 발전이 일어남. 그 전 실크로드가 만들어졌던 수당시대 명청시대와 차이가 나는 대규모의 동서 교역이 일어남.

Crash Course의 실크로드 소개 영상(영어)

13세기~14세기 초까지 경로를 보면 북서유럽부터 중국에 이르는 북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에 이르는 거대한 교역망이 존재. 지금과 같은 직접 교역은 아님. 사람이 오가기도 하지만 동그라미가 중첩된 지역에 있는 중개 교역인들이 중첩지역에서 건너건너건너서 각 지역의 토착 상인 세력들이 문화권에서 문화권으로 물건을 이동시킴. 동쪽에서 시작해서 서쪽에서 끝나는 물류의흐름이 만들어짐. 이전의 미미하거나 미약한 흐름보다 훨씬 큰 교역 인적물적 교류 사람과 물건이 장거리 이동을해야함. 자연적 제약 요소가 있고 인적 정치적 제약 요소가 있음 안전의 위협 이런 것들이 발생하므로 과거에 실크로드가 있었다고 해도 제한적인 교역 루트 였음. 중국~ 이란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에서 끝나는 실크로드 여행 상품이 있음. 가보면 알겠지만 이것을 교역로라 불러야 할까. 차가 다니기도 힘듬. 엄청나게 멀고 위험하고 잘못하면 죽는. 차타고 가다 차안에서 죽음. 도적뗴 등이 있는 상태에서 교역로가 활성화되기 힘듬.

이례적으로 13세기에 그런 제약들이 극복되면서 거대한 교역루트가 만들어짐. 전지구적으로 8개의 교역권이 서로 중첩되면서 거대한 동서교역루트가 만들어짐. 인도양루트, 중앙아시아루트. 페르시아(시리아 바그다드)루트. 홍해루트(이집트,소아시아), 동지중해루트, 북서유럽루트, 물류가 동쪽에서 시작해 서쪽으로 감.. 십자군 원정 유럽에는 큰일인데 유라시아 전체로 보면 그닥 큰일은 아님. 유럽이 소비하는 물류 자체가 적었기 때문에 유럽이 변하고 이런 것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님. 이보다 더 중요한 지정학적 변화가 10세기부터 11세기까지 일어나게 됨.

세개의 루트가 있는데 어느 시대에도 한번에 운용된 적이 없음. 수당시대에 오면 해상기술 육상기술도 발전하지만 주로 육상교역 루트 그러다가 수당이 멸망하고 나면 송나라 건국되기 70년 육상루트 완전 철폐 동서 교역 전반은 완전 침체기. 왜냐면 중앙 루트가 혼탁해져 있었으니까. 수당 시대에 다시 실크로드 형성. 그러다가 당나라가 멸망하고 7080년 5대 10국 시대에는 다시 실크로드가 해체됐다가 송 대에 오면 실크로드가 완전히 끊기게 됨. 활발한 물동량을 보이지 않음. 한나라 시대에는 교역 시스템 자체가 독특 수당 시대 당이 워낙 강성했기 때문에 실크로드가 잘 운용됨. 송나라는 이 시기가 되면 이전부터 북중국을 휩쓸고 다니던 스텝의 유목 기마민족들 때문에 북중국을 대부분 끊기고 물류의 흐름이 유목민족에 막혀서 육상루트가 완전히 막히게 됨. 반면에 송나라는 내부적으로는 엄청난 생산력의 향상. 역대 중국 왕조 중에서 가장 높은 농업 생산성. 이유는 지정학적으로 약체화된 상태에서 북중국 유목민족에게 압박을 받으면서 북중국의 인구 대량이 남중국으로 이주하게 됨. 특히 장강 양쯔강으로 이주하게 됨. 아열대 기후인 남중국. 양쯔강 이남으로 인구 이주가 본격적으로 일어나게 되고 생산력에 비약적으로 상승이 일어남. 2기작이라고 부르는 쌀농사 1년에 2번 모내기법, 천수당 모두 송대 때 나온 방법. 3배 이상 4배까지도 비약적인 농업 생산력의 상승. 인구도 늘어나고 1인당 생산 소비량 , 부가 늘어나게 됨. 새로운 사치품 생산 시장이 늘어남. 여유를 바탕으로 새로운 교역 시스템이 등장. 송대 생산력의 증가 굉장히 중요함. 지정학적 변화로부터 시작된 것. 북송 시대부터 남송 시대까지 계속 생산력 확장이 일어남. 지정학적으로는 압박받았지만 경제적으로는 풍요로웠던 시대. 카이펑 인구 100만 이상의거대 도시.밥을 집에서 안 먹고 매식을 함. 교환체계가 활발했다는 것. 유통 경제 화폐경제였다. 상업경제였다는 얘기이다. 농업 혁명, 상업혁명 시대라고 얘끼를 많이 함.

스텝 유목민족들의 압박은 또다른 기술적 진보를 낳음. 수도 카이펑이 함락되고 황제와 황태자가 사로잡히는 (정강의 치욕) 송나라가 망했음. 황제 친척 가문 중의 하나가 남쪽으로 내려가서 소주와 항저우를 중심으로 새 나라를 건국. 송나라를 재건한다는 명분 하에 남송이라고 부름. 북송시대와 남송시대를 가름. 1100년대의 일. 금나라의 압박을 받으면서 대항하기 위한 기술을 발전시킴. 송나라 유목기마민족과 싸워서 이겨본 적이 없음. 이들과의 투쟁을 위해서 해상 기술을 발전시킴. 높은 생산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그 여유를 바탕으로 다양한 실험을 해봄. 송대는 과학기술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시기. 1.나침반.2.화약3.인쇄 금속 인쇄 목판 인쇄술 종이는 한참 전 후한대 나침반 화약 말고 또 배를 만드는 기술이 발전함. 유목 민족이 물에서는 약함. 양쯔강 이남으로 피신. 수량은 황하보다 훨씬 많음. 장강은 그냥 바다. 황하도 마찬가지 거의 바다에 가까움. 산사댐 길이가 15km 30km가 됨. 해상과 해상에서의 투쟁 기술이 발전하면서 이것이 수군의 발전으로 이어지고 이것이 낳은 부수적 효과가 남중국해의 해상 기술로 이어지고 남중국해의 상대적 안정화를 가져옴. 예전에는 무주공산 힘의 공백이 있던 곳. 중앙정치체제 구속되지 않은 여러 독자 세력 대만 류큐 오키나와 대마도 수많은 도서지역 어로를 하고 살다가 문제 생기면 해적이 됨. 왜구 중에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 했던 건 남중국해 사람들. 왜 출신 송 출신 고려 출신 일본으의 고대 역사서 기록을 보면 신라 해적 얘기가 엄청 많이 등장함. 우리도 왜구라고 하는 해적이 많이 등장. 장보고가 뜨게 된 것은 청해진 운용하며 해적을 정벌해서 뜨게 된 것. 그런데 그 쪽 입장에서는 장보고가 해적. 경계와 정체성이 모호한 집단. 이러한 집단들을 송나라라고 하는 거대 국가가 제압을 하게 됨. 안정화가 되니까 왔다갔다 하게 됨. 마침 송나라는 생산력이 엄청 높아 그 와중에 나온 사치품 시장 도자기. 자기. 그것을 전지구적으로 판매하게 됨. 그 당시 사치품 송대 자기 송대 청자 송대 백자는 동아시아 청자 문화 고려 청자 문화에 영향을 줌. 그 당시 송대 청자 생산 단지 용천 같은 곳은 우리가 생각하는 도예 단지 장인 생산 예술혼 이런 것이 아니라 대체로 200명 300명 많게는 1000명까지 고용하는 메뉴팩처 공장. 철저한 분업. 모두 다른 애들이 담당. 근대적인 분업 체계를 갖추고 생산성이 엄청 높음. 지금도 보면 깨진 자기가 수십톤 수백톤이 발굴됨. 송대 자기는 동아프리카의 마다가스카르까지 송대 자기가 발굴이 됨. 유럽은 말할 것도 없고 …

Crash Course의 인도양 교역 코스 (영어)

이런 식의 해상교역로가 예쩐에는 바다가 잔잔한 인도양 홍해 페르시아 같은 곳에서나 교역 가능. 국지적 교역. 송대가 해상교역 비약적 확장의 기점이 되는 시대. 송대의 (보선)무역선은 지금도 전세계적으로 남중국해와 한반도 근해에서 많이 발굴됨. 신안에서 발굴된 신안선으로 해양 박물관 하나를 만듦. 배의 높이가 건물 2층 정도 높이 중간 규모으 ㅣ배인데. 길이는 이 건물의 대각선 길이 2개 정도 엄청난 길이 --이런것들을 바탕으로 해서 남중국해에서 시작하는 해상 실크로드, 해상 교역로가 1000년대 1100년대에 수립이 됨. 이것이 아라비아에까지 연결.

1100년대부터 1200년대까지 육상에서의 지정학적 변화가 일어남. 몽골 세계제국의 등장.가장 크게는 4개의 캉국 베이징 청두부터 시작해서 바그다드 이슬람까지 도달하는 엄청난 폭력이었지만 육상 안전망, 육상 교역로를 만든 것. 1250년대 이후부터 1300년대 초까지 육상 루트와 해상루트가 모두 활발하게 운용이 되는 전례없는 교역의 시대가 도래함.

각 지역의 특성이 있음. 유럽부터 보면 세계 교역 떄문에 엄청난 수혜를 받음. 주로 수입하는 입장. 대아라비아 무역 적자에 허덕였음. 귀금속이 엄청나게 많이 필요함. 유럽의 귀금속이 아라비아를통해 중국으로 빨려들어감. 유럽의 부유층과 귀족에게 팔고 이탈리아 도시상인들이 엄청난 이윤을 남김. 어마어마한 부를 쌓고 있었음. 얘네는 13세기 교역체계의 최대의 수혜자 생산한 것은 별로 없음. 귀금속을 캐다가 결제수단으로 쓰고 아라비아에서 들여옴.

중앙 루트는 거대한 중개지 역할. 활발한 교역 지대, 상업 지대 페르시아와 홍해 지역은 원래부터 상업을 중심으로 성장해온 곳. 돈을 다루는 기술이 가장 발달했던 곳. 실제로 원나라가 몽골세계제국 시대에 보면 아랍 출신 이슬람 출신의 상인 집단들이 중국에 고용되서 다양한 활동을 함. 색목인이라고 불리는. 세금 징수를 주로 맡음. 돈을 다루는 기술. 원은 화폐체계가 다 다름. 중국 중앙아시아 화폐 쳬계가 다다름. 중간에 그걸 계산해주는 애들이 색목인이라 불리는 중앙아시아와 아라비아의 상업 집단 전근대시대의 조세체계는 직접 세금보다는 세금 대행인들이 상납하고 상납한 것보다 더 많은 양을 착취하고,

마지막으로 인도 중국 동남아시아, 생산의 중심지 얘네의 생산품을 전지구적으로 소비했다. 동남아시아와 인도에서 났던 게 향신료. 중국은 도자기와 비단. 같은 직물인데도 인도산 면직물은 저가의 생필품. 중국의 비단은 고가의 사치품.

지중해 교역의 지배자는 베네치아. 동지중해 물동량의 70~80%는 베네치아가 담당. 향신료만 봐도 전성기를 지나 1500년대가 되면 평준화되는데 베네치아와 제노바 사이의 향신료 교역량이 5:1이었음. 전성기 때는 거의 90%를 담당. 강력한 해상 세력과 강력한 교역 시스템을 갖춤. 비잔틴 제국의 비호하에 일찍부터 무역에 참여를 했고 카톨릭 애들임에도 불구하고 상업적 마인드를갖추고 종교보다는 실리를 택한 이들. 베네치아의 주요 무역 거점- 빨간 점들. 크레타 섬과 키프로스 중요.사실상 식민화 하면서 이 지역을 기점으로 처음에는 이슬람 지역에 있던 기독교 십자군 왕국들과 교역. 패퇴한 이후에도 어려움을 갖게 되었지만 우회 루트를 마련하고 이슬람 왕국과 직접 교역을 하게됨. 전혀 거리낌없이 교황의 이슬람왕국 교역 금지령 을 내려서 베네치아가 엄청난 타격을 받는데, 흑해를 타서 우회로 중국과 직접 교역을 하거나 밀무역을 하는 것. 2~30년 지나면 교황 말 다 무시함. 베네치아의 갤리 선단. 상인 집단들이 지배층. 모든 관심이 무역에 있음. 베네치아 주요 무역 상품은 향신료 , 향신료 교역과 함께 부를 쌓는데 상업적 팽창 상업적 부의 축적과 함께 인구가 늘어나고 농업지역이 줄어드니까 사치품인 향신료와 함꼐 식량 교역이 늘어남. 겔리 선단으로 대규모 수입. 여전히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주요 상품은 향신료.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시리아의 베이루트와 주로 교역.

베네치아 겔리 선단의 주요 투자자들. 베네치아 공화국 국정 운영하는 대 귀족 가문들. 우리로 치면 인프라 투자와 같은 것. 선단의 규모는 300여척에 가까운 중대형 범선. 45척의 갤리선(전투선) 전성기 때 이 정도면 어마어마한 것. 범선 : 8000명 갤리선: 11000명 베네치아 도시 내에 있는 남자 성인 전부 베네치아의 인구 대부분이 선원으로 일했다는 것. 수십개의 귀족 가문들이 투자하고 이윤을 남겨 획득.

주요 교역품

베네치아 자기들 생산한 것이 별로 없음. 주로 화폐로 바꾸는데 화폐가 적용되는 범주가 있음. 법정 화폐의 개념은 없지만 베네치아 화폐=/=이슬람 화폐. 물물교환 에 가깝게 교환을 함. 구리, 수은, 벨벳, 유리세공품, 모직물, 비누로 교환을 함. 비누 높은 알칼리성이어야 함. 양잿물로 만드는 법이 있고 동물의 오물을 정제해서 만드는 방법이 있음. 이것만 가지고는 지불하기가 도저히 힘들어서 결제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 있음. 그게 바로 은.유럽은 금이 거의 안남. 폴란드와 체코 지역에서 거대한 은광이 발견됨. 후추, 생강, 계피를 구매해서 유럽 전역에 판매. 이 당시 베네치아 상인들이 향신료를 가지고 어디까지 이동을 했느냐. 유럽 전역과 함께 서지중해, 대서양까지 향신료를 운반.보통 몇백배의 차익을 남김. 1300년대 후반. 교역체계가 약간 쇠티한 시기. 전성기인 1200년대에는 더욱 많은 유통량을 가짐.

한참 잘나가던 13세기 중엽~ 14세기 초까지 화폐자본을 엄청나게 축적함. 계속 지속됐으면 달랐겠지만 14세기 초 중반부터 이 교역체계가 흐트러지기 시작함. 이탈리아가 중심이 되는 향신료 교역의 시대가 1300년대 초반이 되면 변화가 발생함.

  1. . 몽골세계제국의 붕괴 = 거대한 중앙 권력체가 없어짐. 아랍지역 주로 페르시아에 걸쳐있던 이르크한국도 결국 소멸 토착한국도 1300년대 중후반이 되면 러시아 공격에 소멸 북방루트 중앙루트 남방루트 실크로트와 초원의 길이 해체가 됨. 교역로의 축소라고 하는 거대한 곤란 북부 이탈리아 입장에서 한세기 동안 쌓아왔던 부의근원이 흔들리게 됨.
  2. . 통합 이슬람 세력의 등장(오스만 투르크) == 오스만과의 베네치아 와의 교역을 유지되긴 하나 오스만에서 보호주의 정책을 취하면서 외부 상인 집단을 제약함. 난립해있던 상인들 중에 대표 상인들과만 교역을 함.
  3. . 중세 왕국의 붕괴 == 프랑스 잉글랜드 신성로마제국 같은 중앙성을 유지하던 체계들이 1330-40년대에 유럽의 백년 전쟁,
  4. . 교회의 붕괴 == 가톨릭 교회가 이 시기에 위기를 맞음.
  5. . 흑사병, 르네상스, 백년 전쟁

경제와 인구, 교회, 정치의 위기 모두 흑사병과 관련이 있음 1300년대 초 중반에 유럽이 거대한 위기를 맞게 되고 한 세기 동안 유럽 지중해 교역을 주도했던 이탈리아가 도시국가들이 교역 시스템에서 문제가 생기게 됨. 새로운 지정학적 변동과 함께 중세~근대 이행기의 여러가지 특징들이 발생. 향신료 교역만 놓고 보면 교역량이 줄어들게 됨.

->>여러가지를 촉발. 흑해 중앙아시아-중국 루트가 있고 동지중해-페르시아-아라비아-인도로 이어지는 루트 제노바와 베네치아가 나눠먹는데 한 루트가 없어져버림(몽골제국 붕괴로 중앙아시아 루트 없어짐) 1300년대 초가 되면 동지중해 키프로스와 크레타를 두고 베네치아와 제노바 사이에 백년 간의 전쟁이 벌어짐. 1380년에 베네치아의 승리로 끝남. 1.무력분쟁의 시작. 2.대부업의 발생. 이 당시 북부 이탈리아 국가의 부의 수준은 한 가문이 왕국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지님. 고리대의 조건은 수요자가 있어야 하고 신용이 있어야 함. 두 가지를 갖춘 대부자들이 서로 싸우고 있었으니까 많았음. 전쟁이 발생해서 유럽의 여러 국가들이 돈이 모자름. 유럽의 왕국들은 자기 영지 이외에는 조세를 걷을 수 없어서 돈을 빌리거나 귀족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왕국이 싸우는 돈을 북부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이 빌려줌. 베네치아와 제노바 특히 제노바 상인들은 향신료 교역에서 밀려나면서 금융화, 고리대업화됨. 이 당시 세속권력들 외에 돈이 엄청나게 많이 필요한 애들. 교회와 교황. 옛날의 권위를 되찾을 수 없자 일종의 과시적 소비를 하기 시작함. 이탈리아 금융 가문들에 막대한 돈을 빌려 베드로 대성당 짓고 시스틴 대성당 짓고 르네상스를 촉발하게 됨. 초기 르네상스는 금융적 소비 과시적 소비로 인해 촉발됨. 철학자나 미술가를 후원해서 과시적 소비. 중세~근대로 넘어가는시점의 경제적 변화. 그 이후 교역로가 막히자 새로운 교역로를 찾음. 그게 바로 대서양을 넘어가는 대항해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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