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접원인과 궁극원인

최근 편집: 2022년 12월 30일 (금) 10:12

근접원인(proximate causation)과 궁극원인(ultimate causation)은 진화심리학에서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행동을 설명하는 두 관점을 이르는 말이다.

정의

근접원인(proximate causation)이란 어떠한 행동에 대한 직접적인 환경적 또는 생리적 원인을 말하고 궁극원인(ultimate causation)이란 그러한 행동을 하도록 오랜 시간 작용해온 진화적 원인을 말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초콜릿을 좋아하는 이유는 맛이 좋기 때문이라는 식의 설명은 근접원인에 대한 설명이다. 한편 초콜릿의 맛이 좋게 느껴지는 이유는 초콜릿과 같이 영양(당)이 풍부한 음식을 많이 섭취하는 것이 생존 및 번식에 유리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식의 설명은 궁극원인에 대한 설명이다.

틴버겐의 네가지 질문

이러한 구분은 진화심리학에 영향을 준 동물행동학의 설명 층위와 유사하다. 동물행동학의 창시자 니코 틴버겐은 동물의 행동에 대한 모든 "왜?"에 대하여 다음 네가지 수준에서 답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틴버겐의 네가지 질문'이라 부른다.

  1. 기능 (진화적으로, 해당 행동은 어떠한 기능을 수행하는가?)
  2. 계통 (진화적으로, 해당 행동은 어떠한 계통발생을 거쳤는가?)
  3. 발생 (생리적으로, 해당 행동은 어떠한 과정으로 발달하는가?)
  4. 작동 (생리적으로, 해당 행동은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가?)

예를 들어 포유류의 '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적용해볼 수 있다.

  1. 기능: 포유류 눈이 수행하는 기능은 무엇인가?
  2. 계통: 포유류 눈의 진화 과정은 어떠하였나?
  3. 발생: 포유류 눈은 배아에서부터 어떤 과정을 거쳐 발달하여 정상적인 눈이 되는가?
  4. 작동: 포유류 눈의 작동 원리는 어떠한가?

이중 기능과 계통에 대한 설명은 궁극원인, 발생과 작동에 대한 설명은 근접 원인에 해당한다.

오해

부모의 자식 사랑

진화심리학자들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이유는 유전자의 절반을 공유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는 궁극원인에 대한 설명이지 근접원인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즉, 부모가 의식적으로 유전자의 비율을 계산하여 관심과 사랑을 분배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연애

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에서 마리 루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화심리학에는 인간의 관계에 관한 표준적 서사가 존재한다. ... 이 서사에 의하면 로맨틱한 관계란 최대한 많은 자식을 낳는 것과 같은 뜻이다. 사랑, 친밀함 등 세밀한 정서적 행위는 냉철한 재생산의 경제학에 밀려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된다.[1]

이러한 오해는 근접원인과 궁극원인을 혼동하는 가장 흔한 사례 중 하나이다. '번식의 극대화'는 궁극원인에 대한 설명이며, '사랑, 친밀함 등 세밀한 정서적 행위'는 근접원인에 대한 설명이다. 이 둘은 서로 배치되지 않는다. 궁극원인은 진화적 메커니즘에 대한 설명이지 인간 개개인이 '냉철한 재생산의 경제학'을 따지며 연애를 한다는 황당한 주장이 아니다. 또한 궁극원인에 대한 설명은 근접원인에 관련된 가치들을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내지도 않는다.

궁극원인이 프로이트 식의 무의식이라는 오해

진화심리학이 말하는 궁극원인은 프로이트 류의 '무의식'과 무관한 개념이다. 진화심리학은 각 개체 행동의 기저에 의식적으로는 알 수 없지만 진화적 가치를 극대화하고자 하는 무의식적 욕망이 존재한다는 식의 가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인간은 배가 고프면 음식을 먹는다. 궁극원인은 양질의 영양분을 주기적으로 섭취해야 생존 및 번식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 목적에 부합하는 행동을 하기 위해 각 개체에게 필요한 것은 '영양분이 부족해지면 배고픔을 느낀다', '영양분이 풍부한 음식은 맛있다고 느낀다' 정도이지, '양질의 영양분을 주기적으로 섭취하고자 하는 무의식'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으며 그러한 무의식이 진화되었다고 믿을만한 근거도 없다. 어떠한 진화적 적응이 존재한다고 가정하려면(이 경우 무의식의 존재) 많은 제약을 만족해야하기 때문이다. 즉, 궁극원인과 프로이트 류의 무의식은 아무 관련이 없다.

이러한 오해는 진화심리학을 주제로 글을 쓰는 몇몉 과학 저술가들에게서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로버트 라이트는 자신의 저서 도덕적 동물에서 궁극 원인에 대한 설명을 프로이트식 무의식과 연결하는 식의 서술을 한 바 있다.

출처

  1. p23, The Age of Scientific Sexi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