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지촌

최근 편집: 2023년 8월 2일 (수) 09:33

대개 대한민국에서 6·25전쟁 이후 주둔해 온 미군기지를 중심으로 형성된 생활권을 칭한다. 미군의 외출과 외박이 허용된 1957년부터 급격히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기지촌은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 온 피난민·영세민·성매매 여성·군노무자·군납업자·상인 등이 모여들어 새롭게 형성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국 정부는 1950년대부터 이미 체계적으로 기지촌 여성을 관리, 통제하였다.

기지촌 정화 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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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지촌의 형성-발전-고립과 정부의 성매매정책

한국의 미군기지들은 아시아에 주둔한 미군의 단편이며, ‘환태평양’이라는 ‘단일한 안보체인’의 한 부분이다. 여러 아시아 국가들의 미군기지 근처 도시와 마을처럼 한국의 군대매춘은 지역 및 국가 경제와 일상의 문화적, 사회적 삶에서 필요하고 중요한 부분이 되었는데, 기지촌 경제는 주로 술집과 사창가, 즉 성-섹슈얼리티 서비스 산업에 크게 의존한다. 미군을 상대로 하는 기지촌 성 노동자들은 포스트식민지 시대의 한국의 위안부로 존재해 온 셈이다. 그런 성의 군사화된 산업화 과정은 정부의 정치-군사적인 전략적 결정 및 조직적인 전략과 수익의 예측, 값싼 노동력의 원천으로 여겨진 수많은 여성들, 군사적이고 가부장적 관점의 남성의 성욕 해소와 군대 사기 및 전투 대응력과의 연관성 등의 다양한 요인이 합쳐진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렇듯 국민국가들 간의 정치-경제-군사-국제적 관계들은 여성성과 여성적 섹슈얼리티를 다양하게 전유, 동원하고 착취해왔다. 그 전제가 되는 개념은 ‘성적 제국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데, 이는 군사주의, 제국주의, 인종주의, 남성중심주의, 성차별주의, 가부장제 같은 이데올로기들과 권력관계들의 복합적인 중첩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특히 군대 매춘의 구성적 전제 중의 하나는 그것을 젠더의 이데올로기들로 소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군사주의와 남성중심성과의 긴밀한 연관성, 남성중심성이 본래 성적 지배와 연결된다는 가정, 그리고 거래와 상업화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노출되는 여성 섹슈얼리티의 개념에서처럼, 젠더의 이데올로기들은 서로 연결되어있고 서로를 강화한다. 인종주의/신제국주의 이데올로기들과 미국정부/한국 군사당국의 젠더 정책들과의 필연적인 중첩성은, 한국과 미국, 기지촌 한국여성과 미군 간에 이미 존재하는 권력의 불균형을 더욱 심화시킨다.

사실 한국-특히 군사정부는 미국정부의 능동적 요청에 응해 기지촌 성노동 산업에서 적극적으로 브로커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기지촌 매춘을 미군과의 교류를 통한 ‘민간 외교관’의 역할로 생각했다. 군대매춘을 강요받은 여성들은 가부장적이고 가난한 농촌 가족의 딸들이며, 그들의 기본생계유지는 박정희 정권의 왜곡된 개발주의 정책에 의해 더욱 위협받게 되었다. 기지촌에서의 그들의 성적 노동은 가족을 부양하고 산업화 기간 동안 국가경제에 기여했다.

정부는 정치-경제적인 목적으로 취약계층 여성들의 성을 착취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수탈과 소외의 구조를 복잡한 제도를 통해 은밀하게 공고화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로 정부 주도하에 점진적으로 진행된 성산업 구조화의 역사는 한국 근대사의 일부인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한반도의 미주둔군은 심각한 성적 불안을 야기하여, 미군 상대 성매매가 범람했고, 미군에 의한 강간사건도 빈발했다. 이에 미군정은 일종의 완충장치로서의 성매매를 묵인하고 식민지 시기 공창제 유제를 활용하여 성판매여성을 등록, 검진했으나 종전과 해방으로 인한 혼란 속에서 관리정책을 엄격하게 실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뒤이어 일어난 폐창운동으로 1947년 「공창제도 등 폐지령」이 제정되어 성매매가 전면 금지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성매매에 대한 국가 통제가 다시금 체계화된 결정적 계기였다. 종식 후 한반도 이남에 주둔하게 된 미군은 1960년 5만 6천여명으로 집계되었는데, 휴전 이후 미군 주둔이 장기화되자 미군기지 주변에 기지촌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전쟁으로 생계가 막연해진 많은 여성들이 그곳에서 미군들을 상대로 성을 팔았다. 정부는 미군의 안전한 쾌락을 보장하기 위해 기지촌 여성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를 고심했고, ‘법률’인 「공창제도 등 폐지령」과 충돌하지 않는 ‘법규명령’인 「전염병예방법시행령」에 성판매여성에 대한 성병 검진을 명시하는 기발한 방법을 고안함으로써 복잡한 법령 체계에 근거하여 ‘공식적’으로 관리정책을 시행했다.

이러한 묵인-관리 체계는 박정희정부 시기에 더욱 체계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능동적으로 조장-지지되었는데, 1961년 11월 제정, 시행된 「윤락방지법」은 「공창제폐지령」을 대체했고, 1962년에 성매매가 묵인된 ‘특정지역’이 선포되었으며, 1965년에는 성병에 감염된 기지촌 여성을 강제수용, 치료하는 ‘성병관리소’가 설치되었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특정지역이 공식 설치되기 이전(1961년 5월~)부터 미군 접객업소의 설치와 운영기준을 마련하여, ‘유엔군용 간이특수음식점’은 보건사회부가 마련한 설치 기준을 충족한 업소에 한하여 보건사회부 장관의 승인을 얻어 설치되었다.

실상 미군기지가 1960년대 확산된 까닭에는 5.16 이후 본격화된 발전주의의 명분이 있었다. 군사정부는 1961년 8월 22일 ‘관광사업진흥법’을 제정, 시행했는데, 관광 정책을 급속하게 추진한 것은 관광 사업이 중요한 발전수단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군사정부는 미군과 일본인 관광객을 상대로 관광수입을 올리기 위해 외국인 대상 유흥업을 정책적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이시기 군사정부의 주된 관심은 관광객 유치보다 기지 내 미군이 지출하는 달러의 흡수였고, 미군으로부터 달러를 벌어들이는 관광산업 활성화를 위해 정부는 기지/기지촌에 대한 관리를 개시했다. 1962년 6월 법무부, 내무부, 복지부등이 합동으로 전국 104개소를 성판매를 허용하는 ‘특정지역’으로 지정하고 그 중 9개소를 서울에, 61개소를 경기도에 설치한 것이다. 특정지역 상당수가 미군기지 인근이었고, 정부는 특정지역 설치목적 가운데 하나를 ‘외국 군인 주둔지역의 특수사정 해결’이라고 명시적으로 밝혔다. 또한 1963년 ‘관광사업진흥법’을 개정하여 관광접객업소 여성들에게 접객업무교육을 실시했는데 이는 ‘국가를 위해 미군 병사들을 ‘위안’해준다는 자부심을 갖자’는 교육목표를 갖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1965년의 성병관리소 설치는 기지촌 여성의 신체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을 의미한다. 기지촌 성판매 여성들은 성병진료소와 보건소에 등록되어 검진을 받았는데, 이들 진료서 개설과 검진, 치료는 미군의 안전을 원했던 미국의 원조로 가능했다. 더구나 정부는 성병 검진을 받지 않은 여성들을 처벌하고 강제검진-수용-치료를 실시했다. 이는 미군으로부터 성병이 감염됐을 가능성은 묵인한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처사였던 것이다. 성병관리소에서 행해진 강제치료는 심각한 부작용과 고통을 동반했고, 심지어 죽음을 초래하기도 했다. 그래서 성병으로 부녀보호소나 몽키하우스에 강제 수용되는 것은 성매매 여성에게 ‘또 다른 폭력’으로 감지되었다.

기지촌에서 쓰이던 은어들

  • 롱타임숏타임: 성매매는 시간에 따라 가격이 정해져 있었다. 롱타임은 10~15달러이며 숏타임은 3~5달러. 이를 기지촌여성들은 '긴 밤, 짧은 밤'이라고 불렀고, 미군들은 'long time, short time'이라고 불렀다.
    • 이렇게 벌어진 달러는 대부분의 위안부들이 포주에게 진 빚 5~10만원에 대한 달러 이자(1할)와 식대,침구비,방세 등으로 결재됐다.
  • 온달러: 기지촌여성들의 외상금액에 최하 3할에서 최고 5할까지 붙는 이자.
    • 기지촌여성들은 소개비(포주가 소개인에게 주는 7천 원 가량의 돈) 또는 선불금(포주가 인신매매범에게 주는 돈)을 빚으로 안고 들어온다. 여기에 포주가 내주는 2평 남짓한 단칸방에서 살면서 1만 3천 원 가량의 방세와 방 안의 가구들에 대한 침구비식대, 옷값이라는 이름의 외상이 끊임없이 쌓인다.
  • 워먼 드링크: 얼음에 음료수를 넣고 캡틴큐(당시 면세주로 기지촌 미군 전용 클럽에 제공되던 양주명)를 섞어 만든 술. 기지촌여성들은 '짜가술'이라 불렀고, 미군들은 'woman drink'라고 불렀다.
  • 왕포주: 대규모 미군 전용 클럽의 포주. 클럽 업주는 여성들을 인신매매하는 비용을 포주집의 포주에게 대여하고 이자 명목으로 기지촌여성들의 화대 수익을 서로 나누며 공동으로 착취했다.
    • 포주: 성매매 알선의 주요 거점인 클럽을 끼고서 기지촌여성들에게 클럽에 나가 술을 팔고 성매매 호객행위를 하도록 강요하고 직접 성매매를 알선하였다.
    • 자치 포주:클럽 집결지 바깥쪽에서 성매매 장소를 제공하였다.
  • 타운: 전북 옥구군 미면 북산리 들판에 인접, 미공군부대를 겨냥해서 세워진 실버타운 기지촌. 1만 2천 평 대지에 건설하여 온 마을에 울타리를 치고 정문에는 경비원이 서서 한국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
  • 터큐폰 골목: 용주골 성매매업소(파주시 파주읍 연풍리 일대). 성구매자는 모두 미군들. 최근까지도 인신매매와 성매매범죄로 악명이 높으며, 이러한 형태의 성매매를 지금은 '성매매집결지'나 '유리방'등으로 부른다.
  • 토벌: 기지촌여성들에 대한 미군과 한국경찰, 보건소의 합동단속을 말한다. 단속의 목적은 성병 검진을 받지 않는 여성들을 처벌하고 성병 검진을 강제하기 위함이었다.
    • 합동토벌:미국헌병과 한국경찰, 보건소, 자치회의 합동단속. 월 2회.
    • 집토벌: 한국경찰, 보건소, 자치회의 합동단속. 월 1회 또는 격월.
  • 펨푸집: 포주가 고용한 호객꾼이 '히파리집' 골목 입구에서 성구매자인 미군들을 유인해오면 감금돼 있는 기지촌여성들이 미군들을 상대하는 포주집의 유형. 검진증을 낼 수 없는 미성년자 여성들이 많았다.
    • 히파리: 잡아당긴다는 뜻의 일본어. 호객행위의 의미로 쓰였다.
  • 하얀 집: 동두천 낙검자수용소. 기지촌 여성들은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고 불렀다.
    • 낙검자수용소: 성병관리소. 대부분의 기지촌 여성들이 수용소 내에서 강제 치료 과정에서 페니실린 쇼크로 사망하였고, 이에 대한 공포로 기지촌 여성들은 낙검자수용소에 들어오자마자 수용소 탈출을 시도하였다.
    • 파주군 법원리 성병관리소: 파주군이 1백 63만여 원을 들여 건평 75평짜리로 1965년 9월에 설치했다. 1967년 11월에 제2성병관리소를 추가설치하였고, 1990년대 후반까지 운영되었으며, 1999년 5월 15일 폐지되었다.
  • 헬렐레: 1갑에 5백 원 하는 해피스모크(대마초)에서 세코날, 아로징 등 메프로바메이트류 습관성 약품, 암페타민, LSD 등 고성능 환각제, 모르핀 주사 등 모든 마약성 약 또는 이 약에 취한 미군들을 일컫는다.

기지촌 주민

성노동자

미국군 '위안부'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위안부'라는 명칭은 1957년 제정된 〈전염병예방법시행령〉[1]에 1977년 개정 전까지 기재되어 있었다.

  1. 접객부 기타 접객을 업으로 하는 부녀(접대부, 작부등) 2주 1회
  2. 땐사, 유흥업체의 여급 또는 이와 유사한 업에 종사하는 자 1주 1회
  3. 위안부 또는 매음행위를 하는 자 1주 2회
  4. 성병을 전염시키거나 또는 전염할 우려가 있는 자 수시

기지촌 성노동자들은 위와 같이 성병 검진을 받도록 강제되었다.

전국미군종업원노조연맹[2]

정식 명칭은 "전국외국기관노동조합연맹"(全國外國機關勞動組合聯盟, 이칭: 전국미군종업원노조연맹, 전국외국기관노동조합)이다.

기지촌 내에 주한미군이 고용하는 한국인 노동자들이 점차 많아지고 사용주와 근로자간의 마찰이 생기게 되자 부산지역을 시작으로 전국 미군 주둔지역에 지역별노조의 설립이 확산되었다. 1959년 11월 8일 서울, 파주, 동두천, 부평, 인천, 부산지구 등 6개 미군노조 산하 조합원들은 ‘전국미군종업원노조연맹’을 결성해 미군 종업원의 권익수호와 생활수준 향상을 위해 미군에 최저노임 인상, 한국 근로기준법 적용, 노동조건과 대우 개선 등을 요구하였다.

노조연맹은 1961년 5.16 쿠데타로 해산 되었다가 같은 해 8월 3일 공포된 법률 제672호 " 근로자의단체활동에관한임시조치법"에 의하여 ‘전국외국기관노동조합’으로 명칭을 바꾸어 전국단위 산업별 노동조합 체제로 재건 조직되어 전국적으로 활동하였다.

1963년 8월 23일 전국외국기관노동조합이 산하 16개 지부로 재결성되었으며, 그 후에 주한미군 산하의 하청업체와 외국인투자업체의 가입으로 다시 산하에 15개의 비직속 지부를 포함하게 되어 외국기관노조로서의 체계를 갖추고 활동하게 되었다.

그 뒤 주한미군의 일부 철수에 따른 조합원 감축과 국가보위법·긴급조치 등으로 활동이 위축되었으나, 지속적인 노력으로 활동을 전개하여 조합원들의 권익 향상과 노동조건을 개선하였다.

1981년 노동조합법의 개정으로 단위사업체별 노조로 체계가 바뀌자, 1981년 2월 27일 제19차 전국대회에서 규약을 변경하여 전국외국기관노동조합연맹으로 개칭하였다. 1990년 한국노총 산하의 산별노조로서 산하에 주한미군노동조합을 비롯하여 80여 개 조합과 5만 여명의 조합원을 확보하였다.

2009년 현재 전국외국기관노동조합연맹의 조직은 주한미군 노동조합 조합원이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밖에 경남지역본부(마산자유무역 제조업체) 6개 노동조합, 외자투자기업(외국상사업체) 12개 노동조합, 용역업체 4개 노동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군사노동자(미군)

인구

갈등

  • 인종차별 문제
    • 기지촌 내부의 인종차별은 1970년대 한국 정부가 실시한 '기지촌 정화운동'의 요인이기도 했다. 예컨대 캠프 험프리가 위치했던 평택 평택읍 안정리 기지촌에서는 1971년 7월 9일 이른바 "안정리 사건"이 일어났다. 기지촌 내 사업장들은 백인 병사들의 인종차별에 동조하고 흑인 출입을 금하기도 했는데 이에 격분한 흑인 50여 명이 이날 "백인전용 홀"을 습격해 집기를 부수며 폭행 했고, 주민들도 맞서 쌍방 30여 명(군인 10여명)이 중경상을 입은 사건이었다. 평택만이 아니라 파주 용주골 등 기지촌에는 대개 백인 출입 지역과 흑인 출입 지역이 분리되어 있었다.

기지촌의 분포

서울

영등포

용산 일대

경기

평택

파주

  • 용주골[3]
    • 법정 명칭은 파주읍 연풍1리다.
    • 1970년 기준 파주의 220 개 리 중 35개 리가 기지촌으로 분류되었고 인구 수 기준으로는 16.4만 명 중 약 4.8만 명으로 파주시 전체 인구의 약 30%가 기지촌에 거주했다. 인구수가 가장 많은 10개 리 중 절반이 기지촌이었는데 용주골의 인구는 약 4,700명으로 35개 기지촌 중 가장 많았다.
    • 1960년 대 용주골 상업시설을 업종별로 분류하면 식료/잡화점(17%), 양품점(8%), 양복점(8%), 클럽 (7%), 선술집(6%) 순으로, 대부분의 업종이 서비스업이었다.
    • 용주골은 대추골/대추벌(연풍2리)와 혼동 되기도 하는데, 용주골이 기지촌으로서 발달했고 미군을 상대하는 각종 상업과 서비스 업소가 자리했다면 대추골은 한국인 대상 성매매 집결지로 미군 출입이 금지되었다.
    • 2023년 현재 파주시장 김경일이 파주 내 성매매집결지 폐쇄를 선포하면서 연풍리 성매매집결지 종사자 200여명이 지난 3월 23일 생존권 보장을 촉구하고 집결지 해체 중단을 요구하는 검정 소복 시위를 진행하였다.[4]
  • 법원리

동두천

주한미군은 1951년부터 동두천에 주둔하기 시작했다.

  • 중앙역, 턱거리마을 : 동두천 중앙역에서 동쪽으로 3키로 떨어진 곳에 있다. 미군부대 캠프 호비가 위치해있는데, 1954년 설치된 캠프 호비의 규모는 14.05㎢로 동두천시 전체 면적(95.67㎢)의 15%가량을 차지하며 동두천에서 가장 큰 미군 기지다. 캠프 호비가 들어서면서 미군부대 관련 종사자들이 마을로 몰려들었고, 미군부대 정문 앞에 기지촌 성매매 집결지가 생성됐다. 턱거리마을 주민 대부분은 미군 상대로 일했다. 여성들은 미군부대 안 빨래공장에 취직하거나 기지촌 성노동자들의 청소와 빨래, 육아를 대신하며 돈을 벌었다. 식당이나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도 있었고, 성매매업소에서 일하는 여성들도 있었다.[5]
  • 턱거리마을 기지촌 성노동자 혐오 범죄 : 1964년, 기지촌 성노동자 김옥희(28)가 변사체로 발견됐다. 그와 함께 동거하던 미군이 범인이었다.
  • 중앙역, 양키시장 : 청소년 24시간 출입 금지 구역이 있다.
  • 소요산, 몽키 하우스 : 과거 동두천 기지촌에서 일하던 여성들을 가두던 성매매 여성 낙검자 수용소, 몽키 하우스가 소요산 주차장 인근에 버려진 폐허 건물로 존재하고 있다. 박정희 정부가 주한미군 주둔을 위해 기지촌 성매매 산업을 활성화 시키며 기지촌 여성들을 강제로 성병 검진을 하고 감금하던 곳이 몽키하우스다. 기지촌 여성들은 이곳에 끌려가 페니실린 주사를 맞고 부작용때문에 사망하기도 했다.[6]
  • 보산역, 캠프 케이시 : 1960년, 미군이 주둔하던 당시 가장 번화한 기지촌 동네였으나, 2004년 이라크 전쟁 당시 동두천에 주둔하던 미군 절반이 빠져나가고, 평택 미군기지 이전으로 병력이 빠져나가 현재 보산동 일대는 원래 미군 규모의 10분의 1수준으로 줄어들었고, 상권도 몰락하고 있다. 과거에는 한국인 성노동자가 대부분이었지만, 현재에는 이주 성노동자로 채워졌다. 필리핀, 러시아 등의 여성들이 중개업자로부터 E-6(예술흥행) 비자를 받아 유흥업소에서 일하고 있다.[6]

양주

포천

인천

  • 부평 애스컴 시티(ASCOM CITY)[7]
    • 현 부평구 산곡동 292-1번지 일대에 ASCOM CITY(Army Service Command City. 1945.9.16.〜1949.6.29, 1951.8〜1973.6.30)로 불리는 미군 부대 구역이 운영되었다. 부대별로 캠프 마켓, 캠프 그란트, 캠프 타일러, 캠프 해리슨, 캠프 아담스, 캠프 하이예스, 캠프 테일러 등 7개 구역이 있었는데 대부분 베트남 전쟁 이후 철수하거나 이전했고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 캠프 마켓이었다. 그래서인지 인천의 대표적인 기지촌이라 하면 대개 애스컴 시티나 캠프 마켓을 떠올린다.
    • 캠프 마켓은 미8군에 속한 기지로 군수 보급품 저장 및 지원(빵, 분식품 제조공장)이 주된 업무였는데, 핵심은 제빵공장 운영이었다. 그 외 DRMO(Defense Reutilization and Marketing Office, 주한미군 군수품 재활용사무소)가 있기도 했는데, 2011년 김천시 아포읍으로 이전했다.
    • 캠프 마켓으로 이어진 기지촌에서 많은 한국의 음악인이 성장했다. 캠프 마켓은 팝, 록, 재즈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국내로 활발히 유입되는 전초기지였는데, 해방 이후 한국가요의 1세대 스타라고 할 수 있는 현미, 한명숙, 최희준, 신중현, 키보이스  등 당대 내로라하는 가수들이 이 지역 무대를 발판으로 성장해 국내 정상급 가수로 발돋움했다. [8]
    • 2019년 12월 11일 인천시와 국방부의 발표(캠프마켓 1단계 구역의 즉시 반환)를 거친 후 2020년 10월 14일 국방부와 인천시 부평구 간에 열쇠 전달식을 하면서 기지 반환이 완료되었다.

강원도

춘천

원주

충청도

대전

전라도

군산

  • 아메리카타운
    • 법정 명칭은 미성동 및 산북동이다.
    • 1969년부터 본격적으로 (주)옥구아메리카타운이 설립됨에 따라 민간기업이 운영, 조성한 주한미군 전용 위락시설로 조성되었다. 지역 주민들은 '아메리카타운'이라는 별칭을 줄여 '에이(A) 타운' 혹은 '타운'으로 불렸다.
    • 1969년 당시 중아정보부 서울분실장이자 5.16 군사 쿠데타 주역으로 통하는 백태하 대령의 조카가 (주)옥구아메리카타운을 설립, 군산시 산북동(당시 옥구읍) 이리대 토지 1만여평을 매입하고 상가 55여곳을 비롯해 성매매를 위한 방 500여개를 조성했다고 알려져 있다. 1964년 외화 수입이 1억달러 수준이었는데 아메리카타운에서만 벌어들이는 돈이 전체의 10%인 960만달러에 달했다는 기록 또한 남아있다.[9]
    • 다른 대부분의 기지촌과 달리 민간 회사가 설립, 조성했던 지역인 만큼 주한미군 뿐 아니라 내국인 고객의 출입이 자유로웠다는 특징을 가진다.
    • 국내 기지촌 여성들이 점차 줄어들면서는 필리핀, 러시아 등 해외에서 이주해 온 이주여성 노동자들이 그 자리를 대체했고, 성매매의 주 고객은 미군과 내국인이었는데 2000년대부터 점차 우즈베키스탄 등 백인계 이주여성 종사자들이 유입되면서 기지촌은 내국인 성매수자를 대상으로 제2번영기를 맞는다. 그러나 2021년 코로나팬데믹 이후 상권은 경제적 타격을 입었고, 상인 및 주민들은 최근 건설업체들이 아파트 재개발 계획을 공격적으로 추진해나감에 따라 또다시 생계를 위협받고 있다. 현재는 이주여성 종사자들 약 30-50명만이 노동을 이어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10]

경상도

대구

포항

칠곡

부산

같이 보기

출처

  1. “전염병예방법시행령”. 2023년 4월 14일에 확인함. 
  2. “전국외국기관노동조합연맹(全國外國機關勞動組合聯盟)”. 2023년 4월 13일에 확인함. 
  3. 강, 수영; 백, 일순; 이, 승욱 (2020년 3월 11일). “미군 기지촌, 용주골의 역사적 변화: 사회경제적 공간구조를 중심으로” (PDF). 《대한지리학회지》 55 (2). 
  4. ““파주시장님, 성매매집결지 싱글맘 대표로 제 얘기를 할까 합니다.””. 2023년 4월 13일에 확인함. 
  5. 윤지연, 은혜은 (2020년 3월 3일). “쇠락한 기지촌 마을, 배제된 사람들의 기록”. 《참세상》. 2023년 4월 13일에 확인함. 
  6. 6.0 6.1 윤지연, 은혜진 (2020년 3월 6일). “동두천, 여전히 배제된 여성들의 도시”. 《참세상》. 2023년 4월 13일에 확인함. 
  7. “애스컴시티와 캠프마켓”. 2023년 4월 13일에 확인함. 
  8. “50~70년대 팝의 산실, 부평 캠프마켓 내년 '음악창작소'로 재탄생”. 2021년 9월 8일. 2023년 4월 13일에 확인함. 
  9. “상권 초토화…'군산의 이태원' 꿈꾸던 아메리카타운의 몰락”. 2022년 7월 10일. 2023년 5월 18일에 확인함. 
  10. “군산뉴스”. 2023년 5월 18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