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지촌 문학

This page was last edited on 7 November 2017, at 21:22.

1960년대의 성매매 정책은 군사정부가 경제 발전이란 이름하에 진행한, 남성중심적인 반-탈식민지 민족주의 서사가 강하게 발현된 정책이다.

이러한 배경을 토대로 60년대 이후에 나타난 기지촌 문학 또한 기지촌 성노동자들을 남성중심적 민족주의-가부장제의 알레고리로 나타내고, 기지촌과 기지촌 여성의 신체를 한국에 대한 미국의 헤게모니를 은유하는 서사로서 표현한다.


1. 한국 기지촌의 형성-발전-고립과 정부의 성매매정책

한국의 미군기지들은 아시아에 주둔한 미군의 단편이며, ‘환태평양’이라는 ‘단일한 안보체인’의 한 부분이다. 여러 아시아 국가들의 미군기지 근처 도시와 마을처럼 한국의 군대매춘은 지역 및 국가 경제와 일상의 문화적, 사회적 삶에서 필요하고 중요한 부분이 되었는데, 기지촌 경제는 주로 술집과 사창가, 즉 성-섹슈얼리티 서비스 산업에 크게 의존한다. 미군을 상대로 하는 기지촌 성 노동자들은 포스트식민지 시대의 한국의 위안부로 존재해 온 셈이다. 그런 성의 군사화된 산업화 과정은 정부의 정치-군사적인 전략적 결정 및 조직적인 전략과 수익의 예측, 값싼 노동력의 원천으로 여겨진 수많은 여성들, 군사적이고 가부장적 관점의 남성의 성욕 해소와 군대 사기 및 전투 대응력과의 연관성 등의 다양한 요인이 합쳐진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렇듯 국민국가들 간의 정치-경제-군사-국제적 관계들은 여성성과 여성적 섹슈얼리티를 다양하게 전유, 동원하고 착취해왔다. 그 전제가 되는 개념은 ‘성적 제국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데, 이는 군사주의, 제국주의, 인종주의, 남성중심주의, 성차별주의, 가부장제 같은 이데올로기들과 권력관계들의 복합적인 중첩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특히 군대 매춘의 구성적 전제 중의 하나는 그것을 젠더의 이데올로기들로 소급해야한다는 것이다. 군사주의와 남성중심성과의 긴밀한 연관성, 남성중심성이 본래 성적 지배와 연결된다는 가정, 그리고 거래와 상업화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노출되는 여성 섹슈얼리티의 개념에서처럼, 젠더의 이데올로기들은 서로 연결되어있고 서로를 강화한다. 인종주의/신제국주의 이데올로기들과 미국정부/한국 군사당국의 젠더 정책들과의 필연적인 중첩성은, 한국과 미국, 기지촌 한국여성과 미군 간에 이미 존재하는 권력의 불균형을 더욱 심화시킨다.

사실 한국-특히 군사정부는 미국정부의 능동적 요청에 응해 기지촌 성노동 산업에서 적극적으로 브로커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기지촌 매춘을 미군과의 교류를 통한 ‘민간 외교관’의 역할로 생각했다. 군대매춘을 강요받은 여성들은 가부장적이고 가난한 농촌 가족의 딸들이며, 그들의 기본생계유지는 박정희 정권의 왜곡된 개발주의 정책에 의해 더욱 위협받게 되었다. 기지촌에서의 그들의 성적 노동은 가족을 부양하고 산업화 기간 동안 국가경제에 기여했다.[1]

정부는 정치-경제적인 목적으로 취약계층 여성들의 성을 착취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수탈과 소외의 구조를 복잡한 제도를 통해 은밀하게 공고화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로 정부 주도하에 점진적으로 진행된 성산업 구조화의 역사는 한국 근대사의 일부인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한반도의 미주둔군은 심각한 성적 불안을 야기하여, 미군 상대 성매매가 범람했고, 미군에 의한 강간사건도 빈발했다. 이에 미군정은 일종의 완충장치로서의 성매매를 묵인하고 식민지 시기 공창제 유제를 활용하여 성판매여성을 등록, 검진했으나 종전과 해방으로 인한 혼란 속에서 관리정책을 엄격하게 실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뒤이어 일어난 폐창운동으로 1947년 「공창제도 등 폐지령」이 제정되어 성매매가 전면 금지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성매매에 대한 국가 통제가 다시금 체계화된 결정적 계기였다. 종식 후 한반도 이남에 주둔하게 된 미군은 1960년 5만 6천여명으로 집계되었는데, 휴전 이후 미군 주둔이 장기화되자 미군기지 주변에 기지촌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전쟁으로 생계가 막연해진 많은 여성들이 그곳에서 미군들을 상대로 성을 팔았다. 정부는 미군의 안전한 쾌락을 보장하기 위해 기지촌 여성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를 고심했고, ‘법률’인 「공창제폐지령」과 충돌하지 않는 ‘법규명령’인 「전염병예방법시행령」에 성판매여성에 대한 성병 검진을 명시하는 기발한 방법을 고안함으로써 복잡한 법령 체계에 근거하여 ‘공식적’으로 관리정책을 시행했다.

이러한 묵인-관리 체계는 박정희정부 시기에 더욱 체계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능동적으로 조장-지지되었는데, 1961년 11월 제정, 시행된 「윤락방지법」은 「공창제폐지령」을 대체했고, 1962년에 성매매가 묵인된 ‘특정지역’이 선포되었으며, 1965년에는 성병에 감염된 기지촌 여성을 강제수용, 치료하는 ‘성병관리소’가 설치되었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특정지역이 공식 설치되기 이전(1961년 5월~)부터 미군 접객업소의 설치와 운영기준을 마련하여, ‘유엔군용 간이특수음식점’은 보건사회부가 마련한 설치 기준을 충족한 업소에 한하여 보건사회부 장관의 승인을 얻어 설치되었다.[2]

실상 미군기지가 1960년대 확산된 까닭에는 5.16 이후 본격화된 발전주의의 명분이 있었다. 군사정부는 1961년 8월 22일 ‘관광사업진흥법’을 제정, 시행했는데, 관광 정책을 급속하게 추진한 것은 관광 사업이 중요한 발전수단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군사정부는 미군과 일본인 관광객을 상대로 관광수입을 올리기 위해 외국인 대상 유흥업을 정책적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이시기 군사정부의 주된 관심은 관광객 유치보다 기지 내 미군이 지출하는 달러의 흡수였고, 미군으로부터 달러를 벌어들이는 관광산업 활성화를 위해 정부는 기지/기지촌에 대한 관리를 개시했다. 1962년 6월 법무부, 내무부, 복지부등이 합동으로 전국 104개소를 성판매를 허용하는 ‘특정지역’으로 지정하고 그 중 9개소를 서울에, 61개소를 경기도에 설치한 것이다. 특정지역 상당수가 미군기지 인근이었고, 정부는 특정지역 설치목적 가운데 하나를 ‘외국 군인 주둔지역의 특수사정 해결’이라고 명시적으로 밝혔다. 또한 1963년 ‘관광사업진흥법’을 개정하여 관광접객업소 여성들에게 접객업무교육을 실시했는데 이는 ‘국가를 위해 미군 병사들을 ‘위안’해준다는 자부심을 갖자’는 교육목표를 갖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1965년의 성병관리소 설치는 기지촌 여성의 신체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을 의미한다. 기지촌 성판매 여성들은 성병진료소와 보건소에 등록되어 검진을 받았는데, 이들 진료서 개설과 검진, 치료는 미군의 안전을 원했던 미국의 원조로 가능했다. 더구나 정부는 성병 검진을 받지 않은 여성들을 처벌하고 강제검진-수용-치료를 실시했다. 이는 미군으로부터 성병이 감염됐을 가능성은 묵인한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처사였던 것이다. 성병관리소에서 행해진 강제치료는 심각한 부작용과 고통을 동반했고, 심지어 죽음을 초래하기도 했다. 그래서 성병으로 부녀보호소나 몽키하우스에 강제 수용되는 것은 성매매 여성에게 ‘또 다른 폭력’으로 감지되었다.[3]


1 같이 보기

2 출처

  1. 이진경, 『서비스 이코노미 - 한국의 군사주의·성 노동·이주 노동』, 소명, 2015, 229-236쪽.
  2. 박정미, 「한국 기지촌 성매매정책의 역사사회학, 1953-1995년 - 냉전기 생명정치, 예외상태, 그리고 주권의 역설」, 한국사회학, 2015.04, 8~14쪽.
  3. 김원, 「60~70년대 기지촌 게토화의 변곡점 – 특정지역, 한미친선협의회, 그리고 기지촌 정화운동」, 역사비평, 2015.8, 157~171쪽.
Retrieved from "https://femiwiki.com/index.php?title=기지촌_문학&oldid=817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