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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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덕(金今德, 1909년[1] - 1975년)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자 일제 강점기대한민국의 여성 운동가이며, 유치원 보육교사, 대한제국의 황자 의친왕의 후궁이었다. 의친왕의 유폐지인 벳푸에 찾아가 소리를 질러 사동궁에서 쫓겨났다. 그 후 유치원 교사로 활동했고 정치, 사회활동에 투신하였다. 해방 후 1948년 제1대 국회의원 총선거와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대전 제1선거구에서 출마했다가 낙선하였다.

1 생애

경성보육학교(京城保育學校)를 나와 유치원 보육교사로 활동했고, 한때는 보험회사 직원으로 취직했다. 일제 강점기 초반, 그는 보험회사 직원으로 활동 중에 의친왕을 만나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의친왕의 후궁이 되어 이해경 등을 낳았다.[2]

당시 의친왕은 독립군에 가담하려다가 조선총독부 경무국과 상하이 영사관 경찰에 발각되어 강제 은퇴당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의친왕의 배려로 궁 안의 보육교사로 취직하였다.[2]이해경을 낳은 다음 달에 의친왕이 벳푸에 유폐되었다. 김금덕은 3년간 홀로 이해경을 키운 것으로 보인다. 3살인 이해경을 데리고 의친왕의 유폐지인 벳푸에 찾아가 소리를 질러 사동궁에서 쫓겨났다.[3]

출궁한 이후 수년간 이해경을 되찾기 위해 사동궁 근처릴 배회하고, 재판을 시도했지만 시대적 한계로 실패했다. 큰 부자에게 시집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부호 윤씨의 후취로 재혼하였다. 이후 이해경을 만났을 때, 궁궐의 법도와 다르게 하대를 해서 이해경은 의아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이해경에게 호피무니 외투를 선물하기도 했다.

해방 후 여성으로 1~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1948년 5.10 제헌국회의원 총선거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 당시 김금덕은 대전 제1선거구에서 후보자로 출마하였다. 말을 타고 장터를 돌며 선거활동을 하다 동네 노인들에게 욕을 먹기도 했다.[2] 그러나 그는 ‘내가 지금 이렇게 해야 나중에 여성들이 정계에 진출할 수 있다’고 했다. 선거는 모두 낙방했다.[2]

이후 김서우로 개명한 것으로 보인다. 해방 시점에는 대전 지역 유지였다. 전쟁 전에는 대전의 유일한 지역신문인 동방신문을 잠시 운영하였다. 대전의 첫 사립대학인 호서민중대학 설립에도 관여해 자금을 제공하였다. 40개 이상의 객실이 있는 당대 최고급 호텔인 성남장의 사장이었고, 1970년엔 삼화기업 사장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국전쟁 시기 서울서 피난 온 정부고관과 정치인과 사회 저명인사 등 3백여명이 성남장에서 묵었다. 이들은 평택까지 침입 제보를 믿고 1950년 7월 1일 성남장에서 몰래 도망가는 등 피난 소동을 벌였는데, 이때 김금덕은 이들이 성남장에 다시 들어오는 것을 막고 자가용 몇 대의 타이어 바람을 빼버렸다. 일본으로 피난가자는 자에게는 욕을 퍼부었다고 한다. 이를 성남장 사건이라고 부른다.[4]

쌀 3백 가마를 팔아 군자금을 댔고, 초대 여군부장 김현숙과 함께 여자의용군교육대를 창설했다. 이는 대한민국 여군의 모태이다. 전쟁 중에 군복을 입고 지프차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2 같이 보기

3 각주

  1. 全國立候補者總覽
  2. 2.0 2.1 2.2 2.3 이해경…고종의 손녀, 의친왕의 다섯째 딸 ‘왕가의 아련한 추억’ 중앙일보 2011.06.04.
  3. 정순태 (2006년 12월 1일). “[역사 현장 답사] 高宗황제의 손녀 李海瓊 여사, 皇嗣孫 李源씨와 함께한 古宮 산책『황실은 우리 민족의 文化 콘텐츠 중 하나일 뿐이죠』”. 《월간조선》. 
  4. “(62)<민족의 증언>(62)대전의 25시(1)|제2의 엑서더스 소란(1)|「6·25」20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 자료로 엮은「다큐멘타리」한국전쟁 3년”. 《중앙일보》. 1970년 8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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