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덕

최근 편집: 2023년 5월 3일 (수) 09:16

김금덕(金今德, 1909년[1] - 1975년)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자 일제 강점기대한민국의 여성 운동가이며, 유치원 보육교사, 대한제국의 황자 의친왕의 후궁이었다. 의친왕의 유폐지인 벳푸에 찾아가 소리를 질러 사동궁에서 쫓겨났다. 그 후 유치원 교사로 활동했고 정치, 사회활동에 투신하였다. 해방 후 1948년 제1대 국회의원 총선거와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대전 제1선거구에서 출마했다가 낙선하였다.

생애

경성보육학교(京城保育學校)를 나와 유치원 보육교사로 활동했고, 한때는 보험회사 직원으로 취직했다. 일제 강점기 초반, 그는 보험회사 직원으로 활동 중에 의친왕을 만나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의친왕의 후궁이 되어 이해경 등을 낳았다.[2]

당시 의친왕은 독립군에 가담하려다가 조선총독부 경무국과 상하이 영사관 경찰에 발각되어 강제 은퇴당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의친왕의 배려로 궁 안의 보육교사로 취직하였다.[2]이해경을 낳은 다음 달에 의친왕이 벳푸에 유폐되었다. 김금덕은 3년간 홀로 이해경을 키운 것으로 보인다. 3살인 이해경을 데리고 의친왕의 유폐지인 벳푸에 찾아가 소리를 질러 사동궁에서 쫓겨났다.[3]

출궁한 이후 수년간 이해경을 되찾기 위해 사동궁 근처릴 배회하고, 재판을 시도했지만 시대적 한계로 실패했다. 큰 부자에게 시집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부호 윤씨의 후취로 재혼하였다. 이후 이해경을 만났을 때, 궁궐의 법도와 다르게 하대를 해서 이해경은 의아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이해경에게 호피무늬 외투를 선물하기도 했다.

해방 후 여성으로 1~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1948년 5.10 제헌국회의원 총선거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 당시 김금덕은 대전 제1선거구에서 후보자로 출마하였다. 말을 타고 장터를 돌며 선거활동을 하다 동네 노인들에게 욕을 먹기도 했다.[2] 그러나 그는 ‘내가 지금 이렇게 해야 나중에 여성들이 정계에 진출할 수 있다’고 했다. 선거는 모두 낙방했다.[2]

이후 김서우로 개명한 것으로 보인다. 해방 시점에는 대전 지역 유지였다. 전쟁 전에는 대전의 유일한 지역신문인 동방신문을 잠시 운영하였다. 대전의 첫 사립대학인 호서민중대학 설립에도 관여해 자금을 제공하였다. 40개 이상의 객실이 있는 당대 최고급 호텔인 성남장의 사장이었고, 1970년엔 삼화기업 사장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국전쟁 시기 서울서 피난 온 정부고관과 정치인과 사회 저명인사 등 3백여명이 성남장에서 묵었다. 이들은 평택까지 침입 제보를 믿고 1950년 7월 1일 성남장에서 몰래 도망가는 등 피난 소동을 벌였는데, 이때 김금덕은 이들이 성남장에 다시 들어오는 것을 막고 자가용 몇 대의 타이어 바람을 빼버렸다. 일본으로 피난가자는 자에게는 욕을 퍼부었다고 한다. 이를 성남장 사건이라고 부른다.[4]

쌀 3백 가마를 팔아 군자금을 댔고, 초대 여군부장 김현숙과 함께 여자의용군교육대를 창설했다. 이는 대한민국 여군의 모태이다. 전쟁 중에 군복을 입고 지프차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같이 보기

각주

  1. 全國立候補者總覽
  2. 2.0 2.1 2.2 2.3 이해경…고종의 손녀, 의친왕의 다섯째 딸 ‘왕가의 아련한 추억’ 중앙일보 2011.06.04.
  3. 정순태 (2006년 12월 1일). “[역사 현장 답사] 高宗황제의 손녀 李海瓊 여사, 皇嗣孫 李源씨와 함께한 古宮 산책『황실은 우리 민족의 文化 콘텐츠 중 하나일 뿐이죠』”. 《월간조선》. 
  4. “(62)<민족의 증언>(62)대전의 25시(1)|제2의 엑서더스 소란(1)|「6·25」20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 자료로 엮은「다큐멘타리」한국전쟁 3년”. 《중앙일보》. 1970년 8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