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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1년 6월 18일 [2] 황해도 룡연군 구미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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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44년 3월 13일 강원도 원산시 |
거주지 | 황해도 황해도 서울 중국 장쑤성 상하이 시 미국 뉴욕 주 뉴욕 시 |
본관 | 광산 김씨 |
학력 | 소래초등학교 정신여자고등학교 동경여자학원 난징대학교 (졸업) 파크 대학교 시카고 대학교 (석사) 성서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수료) |
경력 | 광주수피아여자고등학교·정신여자고등학교 교사 대한애국부인회 상임고문 한국독립당 상임위원 재미국한인근화희 회장 대한애국부인회 상인고문 함경남도 원산신대학교 교수 김규식 임정 외무총장 (1933년 ~ 1934년) [3] |
직업 | 교사, 교수, 사회운동가 |
정당 | 대한애국부인회 |
종교 | 개신교 |
상훈 | 건국훈장 독립장 |
정보 수정 |
김마리아는 대한민국 교사 출신 페미니스트 독립운동가이다.
생애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 소래마을에서 세자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1899년 8살때 소래학교에 남장을 하고 입학하였고, 1903년에 소래학교를 졸업하였다.
1906년에 서울로 이주하여, 서우학회 발기인인 작은아버지 김윤오와 신민회에서 활동하는 작은 숙부 김필순을 알게되었다.
1906년 6월에 이화학당→정신여자중학교로 편입하여 졸업하였다.
1910년 6월에 광주수피아여자고등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1912년 가을부터 1년간 히로시마 고등여학교에서 유학하고, 1913년에 정신여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1915년에 동경여자학원의 본과로 유학하였다. 1916년 3월에 본과를 졸업하고 동경여자학원 고등과로 들어가서 1919년 3월에 고등과를 졸업하였다.
동경여자학원을 다니면서 나혜석과 만나고,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주 1]에서 황에스터, 나혜석과 같이 활동하였다.
1919년에 동경에서 2.8독립선언[주 2]에 참가하였다. 총회주최자와 선언서에 서명한 10명과 기타 10명이 출판법 위반 죄목으로 체포되어 동경 지방재판소에 송치되는 가운데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조선청년독립단 대표 11명 중 여학생이 한명도 없었음을 체감하였다. 이후 2.8 독립선언서를 숨겨 귀국하여 국내에 배포했다.
김마리아는 3월 졸업을 앞두고 국내에서 만세운동 준비를 하기 위해 2월 17일에 귀국하여, 1919년 3월 5일에 서울역 광장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3월 6일에 체포되었다.
총독부의 경무총감부에서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코와 귀에 고름이 잡히는 메스토이병에 걸렸다. 보안법 위반이란 죄목으로 서대문 형무소로 이송되어 수감되었고,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였다가 8월 4일의 면소판결에서 병환을 이유로 석방되었다.
세브란스 병원에서 퇴원 후 정신여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였다.
1919년 10월 19일에 통합된 애국부인회를 정비하고 회장직을 맡았다. 1919년 11월 28일에 애국부인회 회원들과 함께 검거되어 대구경찰서로 압송되었다. 1920년 6월 7일에 애국부인회 관련 제1회 공판이 열렸고, 6월 29일에 징역 3년을 언도받았다. 김마리아는 이에 불복하고 상소하다가 고문의 후유증으로 7월 1일에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였다. 2차례 수술을 받은 뒤 반신불수증[주 3]에 시달렸다.
부자유스런 몸을 이끌고 12월 16일의 제1심 공판 법정에 참여하였으나 1심과 동일한 판결이 나왔다. 1921년 1월 22일에 상고하여 5월 13일에 동일한 판결이 나왔다. 재차 언도에 불복하고 상고하였으나 김마리아만이 병환을 이유로 5월에 보석되었고, 애국부인회의 다른 회원들은 6월 20일의 최종 판결에서 1심과 동일한 결과를 받았다.
김마리아는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치료하다가 1921년 6월 29일에 요양을 이유로 세브란스 병원에서 퇴원하였다. 성북동의 농가로 옮겨갔다가 곧바로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로 망명한 후에는 한국 여자 유학생들을 집결하여 대한여자청년회를 조직하고, 여성 지도자 양성을 위해 남경의 금릉대학에 등록하였다.
1923년 5월에 미국으로 유학하여, 미주리 주 파크빌의 파크 대학에서 문학사를 연수하고, 시카고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연수하였다. 컬럼비아 대학의 대학원에서 교육행정학 석사 학위를 획득한 후 뉴욕 신학대학에서 3년간 종교교육학을 연수하였다.
1932년에 귀국하였으나 일제로부터 주거제한령을 받아 서울에 돌아가지 못하고, 함경남도 원산의 마르다 윌슨 신학교에서 교사로 일하였다. 3번에 걸쳐 위턱뼈를 수술하면서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1944년 3월 13일에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김철수와의 인연
1923년 초 상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서 고려공산당 파견대표 김철수에게 연정을 품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철수는 고향에 본처가 있었다. 당시에 고향을 떠나 살던 남자들이 현지처를 두는 일은 잦았으나, 김철수는 "나에게 시집오면 첩이 된다. 내가 승낙하면 두 여자에게 죄를 짓는 일이 된다."라며 거절하였다. 김철수는 김마리아의 사망 후에도 1986년 94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김마리아의 사진을 간직하며 꽤나 미안해했다고 전해진다.
업적
1917년 10월 17일, 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의 임시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친목회 기관지로 여자계[주 4]를 발행하였다.
1919년 동경의 2.8독립선언에 참여하고, 3월 5일에 서울역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10월 19일에 애국부인회를 정비하고 회장직을 맡았다.
1922년 2월 18일에 임시의정원 보궐선거에서 김구와 함께 황해도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대의기구에서 당선된 최초 여성이다.
1923년 1월 31일 국민대표회의에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대표로 개막 연설을 하였다.
상해로 망명한 후에는 대한여자청년회를 조직하였다.
상해 대한적십자회 대한지부 결성, 임시정부를 위한 군자금 모금 등의 활동을 했으며 일본, 미국, 상해 등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4]
1928년 2월 12일에 황에스터와 더불어 뉴욕 한인교회당에서 근화회를 발족시켰다.
부연 설명
출처
- “여성독립운동의 발자취”.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 서대문구도시관리공단 (2006). 《3.1운동기 여성과 서대문형무소 :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개관 8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 서울 : 서대문구 도시관리공단.
- “김 마리아 -김마리아 金瑪利亞- 순국열사 서거 70주년 기념 학술 토론회”. 《LA 3.1여성동지회 다음블로그》.
- 임경석, 독립운동 열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