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 항일여성운동 단체 '근화회'와 상해 대한여자청년회를 조직한 독립운동가이다.

1 생애

이름 김마리아
출생 1892년 6월 18일
사망일 1944년 3월 13일
상훈 1962년 독립장으로 국가유공자 인정
국적 대한민국
소속 근화회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 소래마을에서 세자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1899년 8살때 소래학교에 남장을 하고 입학하였고, 1903년에 소래학교를 졸업하였다.

1906년에 서울로 이주하여, 서우학회 발기인인 작은아버지 김윤오와 신민회에서 활동하는 작은 숙부 김필순을 알게되었다.

1906년 6월에 이화학당에 입학하였다가 보름후 연동여자중학교로 편입하였다. 1910년에 정신여학교[주 1]를 졸업하였다.

1910년 6월에 광주 수피아여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였다. 1912년 가을부터 1년간 히로시마 고등여학교에서 유학하고, 1913년에 정신여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1915년동경여자학원의 본과로 유학하였다. 1916년 3월에 본과를 졸업하고 동경여자학원 고등과로 들어가서 1919년 3월에 고등과를 졸업하였다.

동경여자학원을 다니면서 나혜석과 만나고,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주 2]에서 황에스터, 나혜석과 같이 활동하였다.

1919년에 동경에서 2.8독립선언[주 3]에 참가하였다. 총회주최자와 선언서에 서명한 10명과 기타 10명이 출판법 위반 죄목으로 체포되어 동경 지방재판소에 송치되는 가운데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조선청년독립단 대표 11명 중 여학생이 한명도 없었음을 체감하였다.

김마리아는 3월 졸업을 앞두고 국내에서 만세운동 준비를 하기 위해 2월 17일에 귀국하여, 1919년 3월 5일에 서울역 광장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3월 6일에 체포되었다.

총독부의 경무총감부에서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코와 귀에 고름이 잡히는 메스토이병에 걸렸다. 보안법 위반이란 죄목으로 서대문감옥소로 이송되어 수감되었고,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였다가 8월 4일의 면소판결에서 병환을 이유로 석방되었다.

세브란스 병원에서 퇴원 후 정신여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였다.

1919년 10월 19일에 통합된 애국부인회를 정비하고 회장직을 맡았다. 1919년 11월 28일에 애국부인회 회원들과 함께 검거되어 대구경찰서로 압송되었다. 1920년 6월 7일에 애국부인회 관련 제1회 공판이 열렸고, 6월 29일에 징역 3년을 언도받았다.

언도에 불복하고 공소하다가 고문의 후유증으로 7월 1일에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였다. 2차례 수술을 받은 뒤 반신불수증[주 4]에 시달렸다.

부자유스런 몸을 이끌고 12월 16일의 제1심 공판 법정에 참여하였으나 1심과 동일한 판결이 나왔다. 1921년 1월 22일에 상고하여 5월 13일에 동일한 판결이 나왔다. 재차 언도에 불복하고 상고하였으나 김마리아만이 병환을 이유로 5월에 보석 석방되었고, 애국부인회의 다른 회원들은 6월 20일의 최종 판결에서 1심과 동일한 결과를 받았다.

김마리아는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치료하다가 1921년 6월 29일에 요양을 이유로 세브란스 병원에서 퇴원하였다. 성북동의 농가로 옮겨갔다가 곧바로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로 망명한 후에는 한국 여자 유학생들을 집결하여 대한여자청년회를 조직하고, 여성 지도자 양성을 위해 남경의 금릉대학에 등록하였다.

1923년 5월에 미국으로 유학하여, 미주리 주 파크빌의 파크 대학에서 문학사를 연수하고, 시카고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연수하였다. 컬럼비아 대학의 대학원에서 교육행정학 석사 학위를 획득한 후 뉴욕 신학대학에서 3년간 종교교육학을 연수하였다.

1932년에 귀국하였으나 일제로부터 주거제한령을 받아 서울에 돌아가지 못하고, 함경남도 원산의 마르다 윌슨 신학교에서 교사로 일하였다. 3번에 걸쳐 위턱뼈를 수술하면서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1944년 3월 13일에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 업적

순국열사 김마리아 흉상

1917년 10월 17일, 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의 임시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친목회 기관지로 여자계[주 5]를 발행하였다.

1919년 동경의 2.8독립선언에 참여하고, 3월 5일에 서울역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10월 19일애국부인회를 정비하고 회장직을 맡았다.

1922년 2월 18일에 임시의정원 보궐선거에서 김구와 함께 황해도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대의기구에서 당선된 최초 여성이다.

1923년 1월 31일 국민대표회의에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대표로 개막 연설을 하였다.

상해로 망명한 후에는 대한여자청년회를 조직하였다.

1928년 2월 12일황에스터와 더불어 뉴욕 한인교회당에서 근화회를 발족시켰다.

3 부연 설명

  1. 1909년에 연동여자중학교는 정신여학교로 개명하였다.
  2. 나중에 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로 개칭한다.
  3. 동경유학생들이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학우회총회를 열면서 400명의 유학생이 모인 가운데 독립선언문과 결의문 낭독한 사건.
  4. 한쪽 손과 다리가 굳어지면서 몸 절반이 부자유스럽게 되는 것.
  5. 숭의여학교 출신여자유학생들이 1917년 봄에 창간호를 내었으나 이후 자금사정으로 뜸해진 것을 친목회가 발행하였다.

4 출처

  1. 김형민 (14 March 2013). “1944년 3월 13일 김마리아 죽다”. 《레디앙미디어》.